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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바스 Sep 14. 2021

나는 친구를 동무라고 불렀다

러시아에서 북한 사전 사용기

유학생활에 필수품인 사전을 나는 챙기지 않았다. 바보 같은 결정일 수도 있겠지만 무거운 이민가방의 짐을 하나라도 줄여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러시아 현지에서 사전을 구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어느 커뮤니티를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표 서점 '돔 크니기'에가면 항상 재고도 있기에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사전을 구매하러 '돔 크니기'로 갔다. 서점에 도착해 직원에게 물어물어 1층 구석에 위치한 책장을 찾았다. 사전은 찾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제목은 <로-조 대사전>이라 쓰여 있었고 표지는 인조가죽으로 포장되어 뭔가 어두워 보였다. 더군다나 사전 크기가 A3 정도로 너무 컸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사전은 북한에서 출판한 사전이었다. 북한에서 출판한 사전이 판매되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 하지 못했기에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사전을 천천히 살펴보니 단어, 뜻, 문장의 뉘앙스가 우리가 쓰는 언어와 차이가 났지만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다른 선택지란 없었다. 공부를 위해서는 무조건 사전을 사용해야 하니 구매는 무조건이다. 그런데 사전 가격이 꽤나 나갔었다. 거의 권당 1500 루블(당시 6만 원) 정도로 한 달 생활비로 20만원을 쓰는 나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그렇다고 안 사자니 공부를 할 수 없으니 결국 사기로 마음먹었다.  이왕 사는 거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러시아어 공부도 하고 북한말 공부도 할 수 있으니 이거 나름 일석이조 아닌가?'라고 혼자 정신승리를 하며 로시야-조선, 조선-로시야 사전 두 개를 구매했다. 


막상 사용해보니 사전 찾는 재미가 있었다. 북한 단어와 우리나라 단어가 종종 차이가 있기에 찾는 데는 꼭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봐야 했다. 예를 들어 러시아에서 유명한 도넛을 먹기 위해 '도넛(пончик)'이라는 단어를 찾는다면 인터넷 사전에 '북한어로 도넛'이라고 쳐봐야 한다. 그러면 북한에서 사용 중인 '가락지 빵'이 검색된다. 그러면 나는 검색이 완료된 단어를 조선-로시야 사전으로 찾아 단어를 익히는 식이었다. 그중에서도 유추가 가능한 단어들이 있다면 검색 없이 찾아보기도 했다. 


마치 북한 아나운서가 사용할 법한 나레이션으로 내용이 기록돼 있다.


내가 가장 먼저 익힌 단어는 '타바리쉬'라는(товарищ) 단어였다. 분명 북한에서는 친구를 부를 때 '동무'라고 사용하기에 '동무'를 찾아 같이 살고 있는 중국인 룸메이트에게 어떻게 읽는지 물어봤다. 그렇게 룸메이트와 어학당 외국인 친구들을 부를 때 나는 '타바리쉬'라고 불렀다. 부족한 영어까지 섞어가며 "You and me 타바리쉬"라며 멋대로 작문도 하며 친구들을 불렀다. 가장 기초반이었던 어학당 친구들과 대부분 영어로 대화했지만 나는 중간중간 꼭 러시아어를 섞어서 사용했다. 빨리 유창하게 러시아어를 구사하고 싶었던 터라 영어에 꼭 러시아어를 섞어가며 이야기했다. 


어느 날 러시아어 숙제 발표 시간이었다. 한 명씩 돌아가며 자신 있게 작문한 러시아 문장 5개를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만든 문장은 대부분 친구들과 함께한 스토리로"친구들과 어디 어디를 간다", "친구들과 밥을 먹는다"와 같은 문장을 러시아어로 작문했다. 문법이 맞는지 틀린지도 모른 체 사전을 찾아가며 열심히 작문한 문장들이었다. 나는 가장 먼저 손을 들어 발표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 큰 목소리로 또박 또박 내가 작문한 문장들을 줄줄 읽어 나갔다. 첫 문장을 듣자마자 갑자기 러시아 선생님이 깔깔 웃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어떤 실수를 한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선생님은 '타바리쉬'라는 단어는 소련 시대 사용하던 단어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런 단어를 알게 되었냐며 되레 칭찬을 받았지만 순간 '타바리쉬' 단어의 뜻이 바로 이해가 됐다. 


북한말로 아이스크림은 '얼음보숭이' 이다


서둘러 로-조 사전을 찾아봤다. 그런데... 헉... '타바리쉬'(товарищ)는 친구가 아닌 '동무'였다. 분명 북한에서는 친구를 '동무'라고 사용할 것으로 생각하고 나는 조-로 사전에서 '동무'를 찾았었다. 이건 엄청난 실수였다. 순간 온몸에 닭살이 돋고 식은땀이 났다. 너무 부끄러웠다. 그리고 북한에도 '친구'라는 단어가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드룩(Друг)이라는 명백한 친구의 뜻을 가진 단어가 존재하고 있었다. 모든 외국인 친구들 앞에서 당당하게 처음으로 발표하겠다고 손까지 들고서는 말도 안 되는 문장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계속해서 손발이 오그라 들었다. 무엇보다 외국인 친구들과 아무것도 모르고 나는 지금까지 "동무~ 동무~"라고 불렀다. 다행히 외국인 친구들이 아무것도 몰랐기에 '타바리쉬'라 불러도 전혀 불편한 것은 없었다. 


그래도 이 부끄러운 상황을 맞이한 덕에 북한 사전을 찾아볼 때면 무조건 조-로, 로-조 사전을 반복하여 확인해보고 찾는 습관이 생겼다. 일평생 살면서 북한에 대해 생각조차 안 해본 나에게 북한 사전은 많은 깨달음을 줬다. 북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도 갖게 되었고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한민족이라 느껴지게 되었다. 외래어를 사용하지 않는 북한의 단어가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간결한 말투도 신비하기도 했다. 계속 북한 사전을 사용할 수 없어 결국 러한 사전을 구하게 됐지만 북한 사전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처음 러시아어를 밤새워 공부하며 익히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기에 내 유학생활중 소중한 물건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러시아 유학 생활 때 만났던 나의 동무들이 그리운 날이다. 

'Мой товари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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