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여행(2015. 8. 24 - 9. 12) 다섯 번째 이야기
두고 두고 말하지만 이번 파리 여행의 목적은 무려 파리지앵의 일상에 침투(!)하여 파리의 진짜 모습을 만나는 것이었다. 에펠탑이나 루브르 박물관도 파리의 빼놓을 수 없는 모습이지만, 시장이나 카페, 영화관도 역시 그렇다. 이번 글은 (관광객이 거의 가지 않는) 일상적인 공간에서 파리지앵의 삶 La Vie Parisienne 을 경험해본 이야기다.
01.
영화를 좋아하고, 파리는 세계영화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도시이기에, 파리의 로컬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해보고 싶었다. 파리에서 오래 유학했던 아는 언니에게 영화관 몇 곳을 추천 받아, 웹사이트에서 상영일정을 뒤지며 갈 곳을 골랐다. 처음으로 선택한 곳은 라탱지구에 있는 작은 영화관 Les 3 Luxembourg. 예술성 있는 개봉 영화들 또는 기획전을 통해 지난 영화들을 상영하는 곳으로, 서울의 아트하우스 모모나 씨네큐브 같은 곳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라탱지구는 소르본대학교라고 불리는 파리대학교, 콜레주 드 프랑스, 이·공과 대학교, 앙리4세학교 등 명문학교가 자리한 학생들의 거리이다. '라탱(Latin)'이라 불리는 이유는 프랑스혁명 때까지 소르본대학교의 교수와 학생들 모두 라틴어로 대화하는 것을 즐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Les 3 Luxembourg 외에 라탱지구에 있는 작은 영화관으로 Filmothèque du Quartier Latin과 Le Champo - Espace Jacques Tati도 추천 받았다.
상영시작 한 시간 전쯤 영화관에 도착했는데 영화관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한국인답게 '어쩜 한 시간 전인데 오픈 준비를 안 하지? 참 느긋하다'고 약간 비난조를 띤 생각을 하다가, 같이 느긋해지기로 했다. 여행 내내 예산이 빠듯했고, 이날 지출 계획에 커피값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비가 오니 카푸치노 생각이 간절했다. 잠시 돈 생각을 접고 근처 카페에 갔다. 할머니 두 명이 운영하는 관광객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을 것 같은 동네 카페였는데, 처음엔 (원래 그런건지 내가 동양애라 그런건지) 불친절했는데 나갈 때 내가 용기를 내어 불어로 얼마냐고 물어보자 귀여웠는지 미소를 보여주셨다. 그나저나 일단 불어로 묻긴 했는데 대답을 못 알아들어 다시 영어로 물었던 순간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ㅎㅎ
상영시작 10분 전쯤 다시 영화관에 가니 그땐 문이 열려 있었다. 나름 친절한 직원과 나름 쾌적한 시설. 마음에 들었다. 보기로 한 영화는 <상갈리에의 여름 The Summer of Sangailė>이라는 리투아니아 영화로,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섹션에 초청되고 선댄스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작품이었다. 프랑스에서는 <Summer>라는 보다 단출한 제목으로 개봉해있었다. 리투아니어로 듣고(소용 1도 없음) 프랑스어로 보는, 새로운 관람 경험! 조금 아는 프랑스어 자막이 영화 이해에 꽤 도움이 된 게 다행이었고, 그보다 더 다행인 건 내용 자체가 어렵지 않은 점이었다. 게다가 영상이 스타일리시하고 주인공이 예뻐서 그걸 보는 재미만도 충분했다.
02.
파리에 오기 전 <아메리칸 울트라 American Ultra>라는 영화의 예고편을 보고 '보고 싶은 영화 리스트'에 넣어뒀는데, 파리에 개봉해있길래 보기로 했다. 프랑스에도 한국의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같은 프랜차이즈 영화관이 있는데, UGC, MK2, Gaumont이 그들이다. <아메리칸 울트라>를 보게 된 곳은 MK2 사이트 중 12구 베르시 지역에 있는 MK2 Bibiliotèque. 베르시 지구에 가는 겸 그곳에서 영화를 보는 거였나, 영화를 보는 겸 베르시 지구를 둘러봤었나. 기억이 안 난다.
*베르시 지구는 프랑스 파리 동남부의 신시가지이다. 19세기 주요 와인 거래지로 유명했으며 현재는 파리 시민들의 새로운 쇼핑 및 문화 놀이 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신시가지에 있는 영화관답게 한눈에 봐도 현대적이고 깔끔하고 널찍했다. Les 3 Luxembourg와의 분위기 차이는 CGV와 씨네큐브의 분위기 차이와 마찬가지라고 보면 된다. (씨네큐브보다 Les 3 Luxembourg가 더 소박하고 마이너한 분위기이긴 하지만.) 큰 영화관과 작은 영화관은 시설이나 인테리어뿐 아니라 관객 수나 관객 개개인의 분위기에서도 차이가 난다.
좋아하는 두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제시 아이젠버그의 출연과 기대감을 자극하는 멋진 예고편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칸 울트라>는 별로였다. 후에 찾아보니 네이버에 '이 영화 예고편 만든 사람한테 상 줘야 한다'는 평이 있더라. 예고편을 엄청 잘 만든 거였어..... 영화는 기대 이하였지만 새로운 동네와 새로운 영화관 구경은 기분을 좋게 했다. 베르시 지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더!
03.
주민들의 생활을 엿보기 좋은 장소를 하나만 꼽으라면 시장이지 않을까?
파리에 있는 3주 중 2주 동안 머물렀던 민박집은 메종잘포흐 Maisons-Alfort라는 파리와 조금 떨어진 외곽 도시에 있었다. 난 돈이 부족한 장기 여행자였기에 그럴 듯한 방문이나 활동은 하루에 약 1회만 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남는 많은 시간을 '동네'에서 보냈다. 자연스럽게 민박집 언니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었는데, 하루는 언니들이 동네 5일장에 나를 데려가줬다. 이른 아침에도 찬거리나 주전부리를 사기 위해 온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분위기가 좋았다. 질서 있는 북적임은 갑갑함이 아닌 활기를 만들었다!
동네 시장에 가면 현지 식문화를 고스란히 접할 수 있다. 요리에 어떤 채소를 많이 쓰는지, 어떤 과일이 저렴하고 대중적인지, 인기 있는 간식은 뭔지... 우연히 인심 좋은 사장님을 만나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마카롱 가게를 구경하다 마카롱을 무려 하나씩(총 세 개) 선물 받았다. 그냥 한번 맛보라며. 그냥 한번 맛본 마카롱이 무척 맛있어서 민박집 주인 언니는 몇 개 샀던 것 같다. 여튼 결론은, 동네 시장 구경 강추!
04.
이날은 여행 중 최악의 날이 되었는데, 웬 스토커를 만났기 때문이다. 스토커란 표현이 정확한지 모르겠으나 편의상 스토커라고 명하겠다. 거리를 걷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이야기는 자기소개에서 점차 유혹으로 변해갔고, 근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자는 제안을 몇 번 거절했으나 끈질기게 꼬셔서 끝내 알겠다고 수락했다. 이성적인 매력은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여행지에서 새로운 사람과 대화하고 친구가 되어보는 것도 재밌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일어나 자연스럽게 그 남자가 계산을 했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 이 사람이랑 놀 바엔 혼자 노는 게 재밌겠다 는 생각이 들며 이성이 돌아왔다. <비포 선라이즈>가 영화인 건 그것이 허구이기 때문이다... 일정이 있어 가봐야겠다고 친절히 설명하며 돌아서려는데, 그 사람이 먹튀를 하면 안 된다 말하며 나를 붙잡았다. 뭐지? 농담인줄 알았다. 같이 먹어'준' 건데? 몇 번이고 거절했는데도 놓아줄 생각을 않자 뭔가 쎄한 느낌이 들었지만, 농담이라고 받아들이고 겨우 떼어내 원래 행선지인 뤽상부르 공원에 갔다.
아니 근데. 쎄한 느낌은 웬만하면 맞다. 그 사람이 뤽상부르 공원까지 나를 쫓아온 게 아닌가. 그 스토커는 내가 여유를 만끽하려 펴놓은 돗자리에 쳐들어와 아이스크림 값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너무 어이없는 상황이라 분노가 차오르면서 눈물까지 났다. 논리적으로 따지기에 영어가 짧았던 데다, 논리적으로 따진들 그 사람이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혹은 나를 어디론가 데려간다면 꼼짝 못하고 당할 것이었다. 그게 너무 무서웠다. 도움을 청할 곳이 없는 것이. 완전히 혼자가 된 느낌이었다. 그래서 수중에 있는 현금을 탈탈 털었으나 아이스크림 값에 미치지 못했고, 나는 그 스토커에게 'poor girl'이라는 조롱까지 들은 후에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휴... 이 에피소드를 말하려던 게 아닌데 길어졌다. 말하려던 건 다음이다.
고맙게도 이때 파리에 교환학생으로 와있던 지인(단아언니-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의 연락을 받고 뤽상부르 역까지 와줬고, 그 덕에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때 우연히 단아언니의 기숙사 친구들을 만났다. 북유럽 출신의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같이 저녁을 먹자고 제안해주었고, 우린 생마르탱 운하 쪽으로 이동했다. 캄보디아 식당에 따라갔는데, 와 정말 너무 맛있는 쌀국수를 먹었다. 튀긴 돼지고기와 구운 돼지고기, 그리고 생채소들이 가득 든 비빔 쌀국수였는데, 아직도 생각나는 맛이다. 이 식당의 이름을 못 적어온 게 한... 혹시 짐작 가는 분이 있다면 제발 알려주세요!!
식사를 하고 2차로 아프리칸 스타일 바에 갔다. 역시 단아언니 친구들이 데려간 곳인데, 그들도 교환학생인데 어떻게 이런 좋은 곳들을 꿰고 있지? 유러피안 정보통은 다른가? 평등하지 않다. (자격지심) 이런 이상한 생각은 잠시만 하고, 덕분에 파리 힙플레이스에도 와보네 고마워하며 분위기를 즐겼다. 서서 칵테일을 마시며 대화하거나 가벼운 춤을 추는 분위기였다. 하드하지 않은 분위기가 꽤 마음에 들었지만! 이곳 역시 이름을 못 적어왔다...
막상 정리하다 보니 파리지앵의 생활과 한국인의 생활은 다르다면 다르지만 비슷하다면 비슷하다. 문명이 이만큼 발달된 곳이라면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일 것 같다. 일하고, 장터에 가서 장을 보고, 친구들과 식당이나 카페에서 이야기하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 보고, 가끔 바나 클럽에 가서 특별한 저녁을 보내고. 다만 그 시간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도시 분위기의 차이가 생기는 것 같다. 파리지앵이 되어본 적은 없기에 이 정도 뭉뚱그린 생각뿐이다.
파리에서 영화 봤던 시간들은 정말 그립네. 언젠가 파리 예술영화관 투어를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