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여행(2015. 8. 24 - 9. 12) 세 번째 이야기
혼자 여행하면서 다가오는 심심함과 외로움에 가장 많은 위로가 되었던 존재는 단아언니였다. 단아언니는 학교 동기이지만 학교를 일 년 늦게 들어와 나에게 언니인, 그러나 사실 태어난 년도는 같은, 그러나 그녀가 일생 동안 사귀었을 (동갑)친구들은 나보다 언니일 것이기 때문에 내가 기꺼이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지난 학기 파리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하게 된 단아언니는 나보다 조금 먼저 파리에 들어가 새학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파리에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 사소한 것들, 추상적인 것들까지 각자의 파리 계획에 대한 잡다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나에겐 언니가 파리에 있다는 것이 여행의 기대치를 높여주었으며, 언니에겐 내가 파리에 오래 머무른다는 것이 교환학생 생활의 기대치를 높여주었다.
그리고 우린 예상했던 것보다 더 자주 만났다. 우리는 각자 가고 싶었던 곳들에 서로를 데려가며 좋은 것을 함께 나누었다.
언니와 함께 보낸 날들 중 좋았던 날들은 정말 많지만 그중에 특히 기억나는 날들이 있다. 장소의 분위기나 먹은 음식의 맛 같은 것들보다 ‘함께’ 했다는 사실이 가장 빛나게 기억나는 날들.
8. 27.
이 날은 이번 여행 중 가장 기분이 좋았던 날로 꼽을 수 있는 날이다. 라탱지구에서 혼자 영화를 본 뒤 약속장소인 마레지구까지 걸어가 단아언니를 만났고, 평소 가고 싶었던 카페에 가 언니와 수다를 떨었다. 귀가한 뒤에는(이쯤부터 민박집을 집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민박 사람들과 삼겹살파티를 하였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여 잠시 들른 빈티지가게의 점원이 건넨 인사 'Bonne journée(좋은 하루 보내세요)'가 실현된 하루였다.
이 날 기분이 좋았던 가장 큰 이유는 혼자 보낸 시간과 함께 보낸 시간이 적절히 섞여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이 두 가지 시간의 양적 균형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들어가는 가게마다 점원이 친절했던 것, 내내 비가 보슬보슬 예쁘게 내렸던 것도 날 기쁘게 한 사랑스러운 것들이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위의 것이었다. 그 말은 즉, 단아언니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낸 것도 이 날의 기분을 좋게 만든 중요 요인이었다는 것.
이 날은 파리에 와서 단아언니를 두 번째로 만난 날이었다. 아직 서로에게 궁금한 것,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이 남아있었고, 우리가 파리에서 만나고 있다는 것에 완전히 적응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대화주제가 산발적이었고, 그래서인지 이 날 오간 말들 중 기억나는 것이 얼마 없다. 단아언니가 레몬머랭케이크를 먹고 이 케이크에 마약 들어 있는 것 같다고, 한 입 먹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한 것 정도만 뚜렷이 기억난다.
그래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우린 들떠 있었고, 서로에게 위로가 됐다는 것.결국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 날 간 카페는 마레지구에 위치한 'Le Loir dans la Théière’(해석하면 '다기 안 들쥐'다. 귀여워!)이다. 빈티지풍 인테리어, 복작거리면서 정겨운 분위기, 다양한 종류의 탐스러운 케이크가 마음에 들었던 곳.
8. 29.
우리 둘 다 가보고 싶었던 방브벼룩시장. 그곳에 도착했을 땐 이미 상인들이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후 1~2시까지 한다는 정보를 보고 갔지만 오전이면 사실상 끝나는 분위기인가 보다.
허무한 마음으로 어디에 갈까 고민하다 생 마르탱 운하(Canal Saint Martin)로 발걸음을 옮겼다. 요즘 파리 젊은이들이 여유를 즐기기 위해 자주 찾는 곳이라고 한다. 난 운하 옆에 줄줄이 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고 그곳에 꼭 가보고 싶었고, 단아언니는 영화 <Amelie Of Montmarte>(아멜리에)에서 아멜리가 물수제비를 뜨는 장소로 그곳을 알고 있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친구와 나란히 앉아 수다를 떠는 사람들, 책을 읽는 사람들, 아예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름다운 일상의 모습이었다. 아직 그런 모습이 익숙하기 보다 특별하게 다가왔던 우리는 몇 장의 사진을 찍은 뒤에야 자리를 깔고 앉을 수 있었다.
우린 앉아서 마트에서 사온 샌드위치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고, 운하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산책했다. 그러다 보니 늦은 오후가 되었고, 우린 이 날의 진짜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우리가 이 날 만난 이유는 붉은 모자 언덕 공원(Parc de la Butte du Chapeau Rouge)에서 열리고 있는 실루엣단편영화제에 가기 위해서였다.
나는 파리에 오기 전 씨네21에서 파리의 크고 작은 영화제들을 소개하는 기사를 읽고 이 축제를 알게 되었다. 씨네21은 이 축제를 *8월28일부터 9월5일까지 뷔트 드 라 샤포 루주 공원에서 진행되는 '실루엣단편영화제'는 콘서트와 더불어 재기발랄한 단편들을 관객에게 선보일 예정이다*라는 한 줄로 설명하고 있었다. 빈약한 정보였지만 '파리의 한 공원에서 열리는 영화제'라는 설명은 '파리에서 갈 곳’ 목록에 들어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우린 지하철역에서 나와 공원까지 걸어가는 길에 캔맥주, 중국음식, 파인애플을 구입하였고 어느 곳에 들르든 신난 우리를 귀엽게 쳐다보는 시선이 따라다녔다. 관광객이 전혀 없는 외진 동네였는데, 우린 그 동네의 분위기가 신선했고 동네 주민들은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난 동양인 소녀 두 명이 신기했을 것이다.
축제 분위기는 소박하면서도 활기찼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무늬의 돗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와인과 치즈를 먹으며 공연과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아, 너무나 이상적이다. 잔디밭 모두를 향한 공연과 돗자리 내 사적인 대화, 이 두 가지에 동시에 집중하는 것. 더 나아가, 전자가 후자에게, 후자가 전자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비록 언어 때문에 영화 내용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여름밤, 잔디밭, 음식과 술, 음악, 영화 그리고 마음 맞는 사람. 이들의 조합은 사랑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니까.
9. 8.
민박을 나와 에어비엔비에서 빌린 숙소에 묵고 있을 때였다. 벌써부터 한국음식을 그리워하는 단아언니와 숙소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기로 하고 pyramides 역 근처에 위치한 K Mart에 가서 장을 봤다. 교환학생, 유학생에게 오아시스 같은 곳, 한인마트! 물론 한국보다 많이 비쌌지만 인스턴트밥, 라면, 소주, 막걸리, 한국과자 등 다양한 식품이 풍족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두 손 가득 장을 보고 잔뜩 신이 나서 숙소로 돌아와 바로 요리를 시작했다. 삼겹살은 베이컨처럼 얇았고, 계란후라이는 망했고, 밥은 인스턴트였고, 곁들여 먹을 채소라곤 갓김치가 전부였지만, 머나먼 타지에서 한국 친구와 한국 음식을 먹는다는 것으로 그것은 행복하고 맛있는 식사가 되었다. 맛있는 식사의 조건에선 의외로 맛있는 음식이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다.
우린 이 날도 열심히 수다를 떨었고, 많이 웃었다. 음악을 듣다 일어나 춤을 추기도 했다. 좀 더 밤이 깊었을 땐 단아언니가 가져온 노트북으로 영화 <중경삼림>을 틀었다. 이처럼 마음이 출렁이는 날 왕가위 영화는 좋은 선택이다. 그러나 무척 아쉽게도 우린 맥주에 취해 꾸벅꾸벅 졸다 영화를 다 보지 못하고 잠이 들어버렸다. 살짝 아쉬운 마무리였지만 문제 될 거 없었다.
매 순간 주어진 것들에 열심인 것. 내 모토와도 같은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력할 때보다 노력하려는 의식이 없을 때 더 잘 실천되곤 한다. 그 날이 그런 날이었고,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예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