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이고 흐릿한 시야. 금박지에 쌓인 고급 초콜릿을 받아 든 작은 아이의 손 을 보고 있어.
다시 감은 눈을 떴을 때, 팡! 소리와 함께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밝은 빛이 터져.
여긴 어딜까?
키가 크고 마른 남자의 뒷모습.
외국인? 금발인가?
강렬한 빛에 서서히 적응해 가자, 돌아선 남자 앞에 놓인 붉은색 벨벳 의자가 보여.
그 밑으로 땅에 닿을 듯 말 듯 달랑거리는
여자아이의 두 다리!
유난히 반짝이는 새빨간 구두. 레이스 양말.
힘없이 축 처져있어.
저 아이를 구해야 해! 뭐라도 해야 해!
내가 뭐라고 소리쳐.
저 남자는 내 목소리를 듣고 돌아 보지도 않아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뭐라고 중얼대.
그리고 곧 자기 얼굴을 미친 듯이 긁어대.
긁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중얼거리는 소리도 마치 주문처럼 빨라져.
그러다 그가 모든 걸 멈추고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심장을 짓누르는 공포심이 내 턱밑까지 차올라. 그래도 나는 봐야 해.
저 얼굴을…. 기억해야 해!
결국 그 얼굴이 나를 향했어.
이건 꿈이야!
저 남자는 분명 나를 돌아봤지만, 그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게 소용돌이치며 뒤엉키기 시작해.
눈과 코, 입이 돌풍처럼 일그러지더니, 마침내 나를 삼킬 듯한 거대한 입으로 변해 나를 향해 벌어졌어.
지저분한 색의 침이 뚝뚝 떨어지며 들쑥날쑥한 이빨들이 번들거려.
그 무서운 시선이 나를 꿰뚫었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내 다리는 마치 땅에 뿌리라도 내린 듯 움직일 수가 없어.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았어.
쩝쩝 소리를 내며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게 느껴져. 진득하고 역겨운 비린내…. 토할 거 같아.
감았던 눈을 떴더니 어느새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시커먼 목구멍에서 혓바닥 같은 거대하고 시뻘건 뱀이 기어 나와 꼿꼿이 선 채로 내 눈을 보고 정확하게 말을 해.
“찾았다! 여기서 뭐 해?.”
쇳소리가 섞인…. 불쾌한 목소리…. 분명 들은 적 있어!
“허허 헉….”
수련은 땀 범벅이 된 채 잠에서 깼다.
그녀는 잠에서 깨자마자 급하게 메모지를 찾아 째깍째깍 매초 마다 흐려지는 꿈속의 모든 것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을 뒤지기 시작한다. 역시나 세탁실 구석에서 피가 묻은 티셔츠와 찢어진 청바지를 찾았다.
“젠장…. 다시 시작됐어!.”
00대학 상담심리학 임가영 지도 교수실
벌써 십여 분째 수련은 머릿속에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초조한 표정으로 교수실을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수련의 복장은 늘 그렇듯 무늬가 없는 흰색 티셔츠, 편안한 청바지, 그나마 여러 가지 색이 있는 오늘의 컨버스는 수련의 기분 탓인지 회색이다.
가느다란 팔다리와 긴 생머리가 그녀를 따라 정신없이 나풀거렸다.
그에 비해 턱선을 따라 내려오는 자로 잰 듯한 단발머리. 깃이 바짝 세워진 하얀 셔츠, 스키니한 감색 정장, 반짝이는 세련된 하이힐.
삼십 대 중반인 임가영은 상담심리학 교수로 앉아 있기 아까울 만큼 도시적이고 빈틈없는 매력을 지녔다.
테이블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수련이 건네준 메모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반으로 접어 손에 쥐고 다소 가벼운 말투로 먼저 입을 여는 임가영 교수.
“일개 대학원 조교가, 지도 교수를, 그것도 황금 같은 주말에 이렇게 아침부터 불러낼 때는 지구멸망 수준을 일으킬 거대한 혜성을 발견했다거나 프로이트가 사실은 변태였다는 증거를….”
“악아아아!!!!!!!!!!!!!”
수련이 가영의 말 도중 갑자기 멈춰서서 자기 얼굴을 세차게 때리기 시작한다.
가영이 즉시 얼굴에 웃음기를 빼고 수련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말린다.
“수련아, 무슨 일이야? 진정해.”
“저예요 수련이예요. 저예요. 저 라고요.”
가영이 무언가 눈치를 챈 듯 곧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 앞에 무릎 꿇고 다정하게 말한다.
“알아. 수련아 너야. 알아. 무슨 일 있었어?.”
“다시 시작됐어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어쩌면 꿈에서 본 아이가 실제로 위험한 상황이고 내가 직접 본 거라면….”
울먹이며 내뱉은 수련의 호흡이 자신의 정리되지 않는 생각처럼 불안정하다. 그러나 가영은 흔들림 없는 단단한 어조로 차분히 말한다.
“꿈속에 나온 형태들은 상징적인 거라는 거 누구보다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럼, 피가 묻은 청바지랑 티셔츠는요? 그때랑 똑같아요. 제가 분명 어디를 다녀온 게 틀림없어요. 그리고 그때는 도망치고 있었다면 이번에는 제가 쫓고 있었어요. 결론은 마찬가지지만….”
파리한 얼굴로 초조하게 떨고 있는 수련의 어깨를 단단하게 붙잡고 달래듯 물었다.
“수련아 이 계절이 너한테 어떤 느낌이야?
요즘 같은 날씨와 바깥공기가 어떻게 느껴져? 마른 낙엽이나 어두운 밤 골목이라든지….
놀이터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
요새 잠은 잘 자는 거야?.”
갑자기 수련의 표정이 굳었다. 눈꺼풀이 빠르게 흔들렸다.
“아…. 머리가 아파요. 제가 뭘 또 잊어버린 거죠?”
커다랗고 깊은 수련의 눈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담아 한쪽으로 넘겨준다. 그녀의 말은 따뜻한 커피 믹스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너에겐 꼭 잊어야 할 만한 기억이겠지? 무의식 속에 기억을 가둬두고 산다는 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할 거야. 그 스트레스로 너는 ‘그때’처럼 어딘가를 헤매다 들어왔을 수도 있어.”
가영은 바닥에 꿇린 무릎을 일으켜 세우며 여전히 의자에 앉아 혼란스럽다는 듯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수련에게 이어 말한다.
“넌 특별한 재능을 가졌어. 나도 너처럼 내 맘대로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기억 상자가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임 교수의 말에는 언제나 수련을 안심시키는 힘이 있었다. 결국 호기심이 묻어난 순수한 얼굴을 치켜들어 묻는다.
“교수님도 끔찍하게 지우고 싶은 흑역사 같은 게 있으세요? 절대 없으실 거 같은데….”
가영이 코웃음을 쳤다.
“어지간한 상자로는 담을 수도 없을걸? 어쨌든 수련이 뺨에 드디어 적혈구가 돌아다니나 보다 아까는 처녀 귀신이 들어온 줄 알았어.”
가영이 가볍게 농담하며 수련을 능숙하게 다루고 있다.
수련은 갑자기 그 언젠가를 떠올리며 단단해진 목소리로 씩씩하게 말한다.
“그래도 제가 나갔다 오긴 한 거 같아요. 교수님은 기억을 못 하는 게 부럽다고 하셨지만. 그때 저는 무슨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모르니까 그건 끔찍해요. 대비를 해야겠어요.”
“대비? 김수련 뭔가 업그레이드된 거 같은데?
뭐지? 나한테 비밀이 있어?.”
“비밀은 아니고 교수님은 검증되지 않은 가설은 낭설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시니까 검증되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뭐야? 나 빼고 진행하는 논문 있어? 서운하네? 그나저나 오늘은 클럽 제치는 거야? 클럽 죽순이께서 논문이나 악몽 때문에 삼총사의 의리를 저버릴 거 같지는 않은데?.”
수련은 폐 속 깊은 곳에서 묵직한 한숨을 허! 하고 꺼내 뱉은 후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문을 열고 나섰다.
“그러게요. 은교 성질머리를 아니까…. 기분은 좀 찝찝해도…. 뭐…. 어떻게든 되겠죠. 가볼게요. 오늘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했어요.”
“괜찮아! 어차피 볼일 있어서 나왔어야 했어. 어서 가봐!.”
수련이 나가고 가영은 묘한 표정으로 문에 기대어 허공을 향해 알 수 없는 말을 흘린다.
“역시 김수련 넌 특별해. 정말 특별한 기억장치를 가졌어. 겨우 작년 이맘때 놀이터 사건도 잊어버렸구나.
이기적인 너의 그 뇌가 부러울 정도야.”
그리고 문손잡이에 잠금장치를 철컥- 하고 걸어 잠갔다.
아까부터 창가 옆 귀퉁이에 그림자처럼 깊이 박힌 듯 서있던 한 남자를 향해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초리로 쏘아보며 또각또각 걸어가는 가영.
“왜? 내 말이 틀려? 저 아이 말이 다 사실이라면 지금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모른다는 게 말이 돼?.”
키가 크고 머리숱이 많지 않은 깡마른 남자는 가영을 노려볼 뿐 대답이 없다.
가영은 작은 두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치려다 그저 부들거리는 두 주먹을 올려놓는 것으로 대신했다.
“답답해 죽겠네. 당신이 말이라도 좀 걸어보지 그랬어? 당신이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다면 그날처럼 저 애를 써먹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남자를 등지고 있던 가영이 다시 몸을 돌린 순간 어느새 그 남자는 길쭉한 몸을 늘려 가영의 코앞까지 퀭한 눈을 들이밀었다.
가영은 침을 꿀꺽 삼킨 후 입가를 비틀어 차갑게 웃었다.
“아무리 그렇게 쏘아봐도 난 당신이 무섭지 않아. 지루하고 유치할 정도야. 넌 그냥 환시!
그저 내 죄책감이 만들어낸 무의식의 산물이야. 내가 궁금한 건, 이렇게 병풍처럼 서있기만 하던 당신을 잠시나마 나에게 다시 데려온 게 6년 전 자신이었다는 걸 그 아이는 정말 잊었을까? 아니면 나를 봐주고 있는 건가? 집행유예 뭐 그런 거? 후.”
가영은 차가운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가방을 집어 들고 문을 나서기 전 다시 한번 벽 모서리를 향해 가늘게 눈을 접고 쏘아보며 속삭이듯 말한다.
“그날 널 다시 데려온 수련은 내가 미쳤다는 가설의 증인이 돼버렸지만. 미친년들이 어떻게 정상인처럼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깨닫게 해준 것도 수련이니까 그 아이를 탓하진 않아. 이쯤 되면 네가 그 더러운 주둥이로 뭐라고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니까? 훗!.”
쾅-! 하고 대차게 문이 닫히고 연기가 걷히듯 검고 흉했던 긴 그림자도 그 바람결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수련은 학교를 나서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응 나야. 세시에 클럽 옥타비우스 앞으로 데리러 와줘. 아 바보야 오후 3시가 아니라 새벽 3시! 뭐? 그것도 일찍 나오는 거거든. 애들이 못 가게 할지도 몰라. 핑계 대고 일찍 나오는 게 그 시간이야. 암튼 그런 줄 알아.
아참! 올 때 잊지 말고 ‘칼’ 가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