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내가 누구게?

찾았다! 여기서 뭐해?

by 월하수희

문을 걸어 잠그자마자, 가영은 의문의 남성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는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고, 입술 사이로 뾰족한 말이 흘러나왔다.


“왜? 내 말이 틀려? 저 아이 말이 다 사실이라면 지금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모른다는 게 말이 돼?.”


키가 크고 머리숱이 많지 않은 깡마른 남자는 가영을 노려볼 뿐 대답이 없다.


가영은 작은 두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치려다 그저 부들거리는 두 주먹을 올려놓는 것으로 대신했다.


“답답해 죽겠네. 당신이 말이라도 좀 걸어보지, 그랬어? 당신이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다면 그날처럼 저 애를 써먹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남자를 등지고 있던 가영이 다시 몸을 돌린 순간 어느새 그 남자는 길쭉한 몸을 늘려 가영의 코앞까지 퀭한 눈을 들이밀었다.


가영은 침을 꿀꺽 삼킨 후 입가를 비틀어 차갑게 웃었다.


“아무리 그렇게 쏘아봐도 난 당신이 무섭지 않아. 이젠 지루하고 유치할 정도야. 널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환시! 또는 환영! 또는 헛것! 넌 그냥 내 죄책감이 빚어낸 심리적 잔상일 뿐이야. 내가 궁금한 건, 이렇게 병풍처럼 서 있기만 하던 당신을 잠시나마 나에게 다시 데려온 게 6년 전 자신이었다는 걸 그 아이는 정말 잊었을까? 아니면 나를 봐주고 있는 건가? 집행유예 뭐 그런 거?.”


가영은 차가운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가방을 집어 들고 문을 나서기 전 다시 한번 벽 모서리를 향해 가늘게 눈을 접고 쏘아보며 속삭이듯 말한다.


“그날 널 다시 데려온 수련은 내가 미쳤다는 가설의 증인이 돼버렸지만. 미친년들이 어떻게 정상인처럼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깨닫게 해준 것도 수련이니까 그 아이를 탓하진 않아. 이쯤 되면 네가 그 더러운 주둥이로 뭐라고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니까? 훗!.”


쾅-! 하고 대차게 문이 닫히고 연기가 걷히듯 검고 흉했던 긴 그림자도 그 바람결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당일 신사역 사거리 커피숍. 불토 22:35분


테이블이 없어서 둘러보고 나가는 이들도 있을 만큼 만석이다. 게다가 하나같이 잘 빼 입고 잘생겼고 잘빠졌다.


목적은 여기서 개기다 클럽으로 직행하든지 한잔하고 클럽 가던지 둘 중 하나.

그중 수련과 그녀의 절친 은교도 있었다.


수련은 허공을 바라보며 깍지를 낀 채 손목만 꺾어 왔다 갔다 팔로 자기 옆구리를 때리고 있다.


“뭐하노 가시나야 쪽팔린다 고마해라.”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이는 수련은 여전히 한곳만 바라보며 규칙적으로 옆구리를 때리며 말한다.


“소화가 안 돼. 내려보내는 거야 볶음밥 괜히 먹었어.”


질렸다는 듯 잔에 담긴 얼음을 아그득 씹어먹으며 눈을 흘기는 은교.


“니 거 아깝다고 꾸역꾸역 쳐 무을때부터 알아봤다.”


“근데 매번 느끼는 거지만 너 사투리 왜 쓰는 거야? 너 거기 산지는 얼마 안 됐잖아? 중학교 때 서울 올라와서 대학을 미국으로 갔다가 졸업하고 서울에서 쭉 살았으면 이제 서울말 쓸 때도 됐잖아. 심지어 좀 어색해. 오히려 내가 더 잘하는 거 같아. 영화 친구를 감명 깊게 봤어? 아님. 부산 사투리가 매력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은교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한다.


“허! 나 사투리 안쓰는~데? 나 서울말 서울말. 사투리 한번도 쓴적이 없는~데?.”


수련이 기이한 체조를 곧장 멈추고 은교의 얼굴을 들이박을 기세로 버럭한다.


“니이~가 지금 쓰는 게 사투리 거~든?.”


은교는 빙글빙글 웃으며 억울해하는 수련을 놀리듯 댓거리 한다.


“사투리는 니 가 쓰네. 니 와 사투리 쓰는데?.”


수련이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분통 터져 한다.


“으아아! 이기집애!! 너 때문에 옮은 거잖아!!.”


은교가 목을 오그린 채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 주위 눈치를 보더니, 작아진 맹수처럼 낮게 그르렁거렸다.


“가시나 조용히 안하나? 니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민폐 덩어리야. 지 주둥이로 슈퍼 클러버 라카는년 꼬라지가 이게 뭐꼬? 흰 티의 청바지, 운동화 만 하이힐로 갈아신었네? 그라고 니 뛰댕기는거 보믄 니 신내림 받는줄 알겠어. 쪽팔리구로~ 샴페인도 한잔하고! 으잉? 부비부비도 좀 하고 으잉? 그래야 쪼매 우리도 같이 짝짝꿍 해서 나가서 놀지! 꼭 지 잘났다고 먼저 토끼고 지랄병이야, 오늘도 그라기만 해봐.”


수련은 처음부터 끝까지 반박의 여지가 없는 친구 신은교의 말을 듣고 결국 꼬리를 내린다.


중학교 때 만난 이들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그리고 이들의 중학교 1년 선배 구은정.


그녀가 등장한다. 등장부터 눈부시다. 블링블링의 결정체!

걸어 다니는 명품관!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할 때쯤 그녀들도 아! 하고 각자 한 손씩 내밀어 흔든다.


은정의 차림새만큼 목소리도 찰랑거린다. 종달새도 따라잡을 수 없을 가느다란 하이톤.


“니야~! 너희들 또 싸움박질하고 있었어? 홍홍홍~.”


이제야 삼총사의 완전체가 되었다.


“언니 왔나? 또 늦노?.”

“요~ 역쉬 오늘도 블링블링~.”


본인만 서울말이라고 우기는 부산 사투리

은교. -티나지 않는 명품을 선호한다.


덜렁거리는 건지 건들거리는 건지, 말과 랩의 중간쯤인 수련.-추위와 수치심만 막을 수 있다면 그것이 옷이다.


삑삑거리고 짹짹거리는 하이톤의 애교 장인 은정.-나를 빛내라 옷들이여. 내가 너희를 빛낼 것이니.


절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셋의 하모니.

목소리도 차림새도 얼굴도 제각기이지만, 누구 하나 빠짐없이 세련되고 각자의 매력이 있다.


은정은 최고급 외제 차를 보란 듯이 카페 앞에 세워놓고 나 몰라라 하고 들어와 버렸다.


그런 안하무인 은정이 익숙하다는 듯 수련은 하품하며 무심히 말한다.


“언니 마실 거야?.”


“야 니는 니만 생각하나? 언니도 마시야지.”


그때 마침 주차 문제 때문에 직원이 삐질삐질 하며 다가와 겨우 말을 꺼낸다.


“아..저기..저기가..주차하는데가 아닌.”


은정은 방금 자리에 앉았지만, 어느새 다리를 꼬고 우아하게 한 손에 차키 를 덜렁거리며 그의 말을 싹뚝 잘라버린다.


“아! 지금 나갈 거예요!.”


나간다는 데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직원은 그렇게 가버리고….


“여기서 죽때릴 시간이 어딨니? 클럽 가기전에 한잔하고 가자.”


“확신포차? 우리 지금 거서 나왔는데.. 닭발에 밥까지 비벼묵고 이년 소화 안 된다고 이지랄 하고 있는기야.”


그제야 다시 시작된 수련의 기이한 체조를 보고 은정 역시 복숭아 같은 입술을 뽕! 하고 벌렸다.


“수련아.쪽.팔.려!”


“아! 그래?.”


수련은 웬일인지 은정의 말에 그대로 하던 짓을 멈췄다. 그 모습에 은교가 카페가 떠나가라 소리 질렀다.


“니 왜 언니말만 듣는데? 내가 쪽팔리다 할땐 안듣고? 내 말은 똥이가?.”


.“은교야 지금은 네가 더 쪽팔려. 나가자 빨리.”


그랬다. 사실 브레이크가 없는 쪽은 은교였고 한번 뚜껑이 열리면 사람이 아닌 것 쪽에 가깝게 되는 것이 은교이기 때문에 은정의 판단은 늘 옳았다.


그들은 투덕거리며 은정의 고급 스포츠카에 탑승했다.

“회원제로 운영하는 데야 ‘그린도어’라고 오픈한지 얼마 안 됐어. 거기 들렀다 가자.”


차에 시동을 켜 둔 채 룸미러로 앞머리를 만지며 은정이 말했다.


은교는 은정을 따라 자연스레 화장을 고치고 있었지만, 수련은 뒷좌석에서 그녀들의 얼굴 사이로 발사하듯 자기 얼굴을 들이밀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어 거기 완전 핫 하다며 테이블 잡으려면 잘나가는 여자 모델들도 비싼 샴페인 한두 병은 까야 한다던데?.”


말끝에 은교와 은정이 수련을 어이없게 쳐다봤고 수련도 그 표정을 보고 자기가 한 말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깨달았다.


출발하는 고급 외제 차의 요란한 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어쩌라고? 까면 되지?.-


‘THE GREEN DOOR’는 그린도어 가 아니라 골드도어 같았다.


묵직하고 커다란 황금 문을 남자 직원 두 명이 일일이 닫았다 열기를 반복하며 입장객들이 이곳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지를 심사한다.


드디어 황금문 이 열리고 발을 들이게 되는 순간 동화 속 주인공이 되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식들로 가득한 통로를 지나 거대하고 반짝이는 아슬아슬한 유리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 내려가면 드디어 붉은 카펫 위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수련은 마치 자신들이 신데렐라라도 되는 양 미스코리아 언니들의 미소로 그 계단을 조심스레 걸어 내려오는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들을 보고 진심으로 안타까움과 화가 뒤섞여 치밀어 올라왔다.


“이거 무슨 개수작이야? 우리야 애초에 클럽 복장이라 다행이지만 여기가 어딘지 알고도 저 꼬락서니로 저 유리 계단을 내려오는 거야? 웩~ 쟤는 제모도 안 하고 티팬티를 입고…. 저래서 남자들이 저 계단에 몰려 있는 거야? 보여주러 온 거고, 보러왔으니 당연한 건가? 나만 토할 거 같아?.”


“내도 닭발이 올라온데이 그래도 보지마래이 또 싸움난데이.”


“싸움은 맨날 네가 끌고 오지, 손가락질 좀 하지 마!.”


수련이 위스키를 홀짝이며 말과는 다르게 손끝으로 여자들을 가리키고 있는 은교를 이죽거렸다.


은정이 은교의 곧게 뻗은 손가락을 끌어내라며 중재한다.


“은교야 손가락질 눈가락질 금지!!. 오케이?.”


“어? 내 손이 또 언제 저 가 있었지?.”


-짝짝짝!!!


수련이 은교를 향해 고급 소파에 늘어지게 몸을 기대고 손뼉을 쳐준다.


“난 존경해 너의 정직한 몸과 눈깔을 존경해. 우직하다 못해 아주 올곧아. 흠…. 옛날 어렸을 때…. 그…. 뭐가 떠오를 것도 같은데…? 마치…. 아주 옛날에….”


소파에서 튀어나와 수련을 피해 다니는 은교의 눈동자를 집요하게 찾아 굴린다.


웬일인지 수련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당황해하는 그녀를 마치 취조하는 형사처럼 예리하게 바라보는 수련.


그러다 결국 떠올랐다는 듯 자기 허벅지를 철벅하고 때리더니 말한다.


“그래 생각났다…!”


은교의 얼굴은 이제 사색이 되었다. 반면 수련은 재미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다.


“난 공산당이 싫어요! 그게 누구더라? 그런 애가 있었다지? 콩 사탕을 잘못 말해서 죽었다나? 뭐 그런 얘기 있었잖아. 그게 실제 있었던 얘긴가?. 뭐 비슷한 얘기가 떠올라. 아무튼 너는 그런 기개가 있어. 아주 칭찬해 몸이 정직하게 반응하는 거야. 지가 죽든 공산당이 죽든 말이야 키키키.”


은교는 멈춰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고막을 울리던 음악소리가 점점 멍울 지더니 이제는 시끄러운 사람들의 목소리마저 틀어막혀 버렸다.

은교의 아주 어린 시절 토막 난 짧은 기억.


레이스 양말에 빨간 구두를 신고 덜덜 떨고 있는 어린 소녀.

숲속 폐가 안에 가득한 담배 연기….

폐가 뒤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소녀.

빨간 구두 소녀의 발목을 휘감는 수많은 뱀.

‘싫어! 저기!! 저리로 가!.’

소녀의 손끝은 숨어 있던 또 다른 소녀를 향했고 소녀를 휘감던 뱀들은 스르륵 방향을 바꾸었다.



낙엽을 밟는 수많은 발소리.


"찾았다! 여기서 뭐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