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았어 지금 나가 뭐? 안들려! 차 댈데가 없다고? 알았다니까 지금 나왔어 너 차 뭔데?
뭐? 벤...벤츠도 아니고.. 벤틀리?.”
수련은 여전히 입장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클럽 입구에 번쩍이는 외제차 앞에 그보다 더 번쩍이는 한 남자 앞에서 아주잠깐 오늘밤 먹은 술값을 계산했다. 그 비싼 술이 다 깨버릴 지경이었으니.
남자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것은 수련 뿐이 아니었다. 클럽 입장하려던 여자들도 남자만 바라보다 높은 하이힐을 삐끗하는 바람에 넘어지기도 하고 눈이 맞은 남자와 쏙닥이를 타려고 담배 타임을 갖던 여자가 옆에 남자는 안중에도 없이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 물고 있던 담배마저 떨굴 정도로 남자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빛이 났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릿밑으로 반듯한 이마가 훤히 드러났고 짙고 길게 뻗은 눈썹은 고집스럽고 남자다워 보였다. 베일 듯이 날카로운 턱선과 오뚝한 콧날,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전체적으로 다가가기 어려울 만큼 사나운 인상일 수 있으나, 외꺼풀이 시원하게 트인 눈 그 안에 맑고 깊은 눈망울이 순수함과 선함을 품고 있었다.
짙은 회색 정장에 붉은색이 도는 짙은 감색 타이를 하고 주름 하나 없는 광택이 살아있는 명품 구두마저 신고 자기 차에 기대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있다.
‘김수련 너까지 홀릴 셈이야 저 사기꾼한테?.’
수련은 자기 머리를 한 대 세게 내리치고 남자에게 돌진했다.
“야! 너 이 도깨비 같은놈! 여기가 어디라고 누굴 홀릴려고 그 꼬라지로 온거야? 빨리타 언능! 안들어가?.”
수련이 그림같이 서있던 남자를 운전석에 억지로 구겨 넣기 시작했다. 모여든 여자들은 수련을 부럽다는 듯 쳐다보기 시작했고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운 수련도 잽싸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남자가 안전벨트를 메주려 하자 수련이 질색을 한다.
“이게 오늘 미쳤나? 야 땡땡이! 너 오늘 선봤냐?.”
“아니 그런걸 왜 봐? 그리고 이름좀 불러줄래? 언제까지 땡땡이야? 강남 클럽 같은데 처음와보니까 너 창피할까봐 동영상까지 보고 오늘 급하게 사입은거야.”
"오오~ NICE TRY~! 시도는 좋았지만 나의 뇌리에는 너의 땡땡이 한복밖에 없어."
수련은 남자가 쉽게 출발을 하지 못하고 헤매는 모습을 보고 한심하게 내려다본다.
“너 지금, 뭐하냐?.”
“아. 이제 됐다. 가자. 이 차 몇 번 안 타봐서 시동거는게 자꾸 헷갈려.”
남자가 버럭 출발했다가 다시 급정거하더니 거북이처럼 새벽 강남 도로를 슬금슬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수련이 안전띠를 두 손으로 꼭 부여잡고 말한다.
“야 땡땡이! 너 이 차는 누구 차냐? 운전은 할줄 아는 거지?.”
“차는 내 차고 운전은 할줄 아는데 네가 오늘 너무 많이 달고 나왔네. 조심해서 가는 게 나쁠 건 없지.”
“뭐? 이게 또 무슨 개소리야! 나 귀신같은 거 안 믿는다고 했지? 이 돌팔이 사기꾼 MZ무당 같으니라고! 내가 뭘 또 달구와?.”
“원래 귀신들은 시끄럽고 술 많은데 좋아해 번쩍번쩍하고. 그래서 내가 차 타기 전에 너한테 뿌려 주려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네가 그냥 태우는 바람에…. 자, 들고라도 있어.”
남자는 조심히 운전 하는 와중에 주머니에서 붉은 팥을 꺼내어 수련에게 한 줌 건넸다.
“야! 너 그 아까 기대서 주머니에 손 찔러 넣고 있던 게 그 사람 많은 앞에서 나한테 이거 던지려고 했던 거야?.”
“응.”
무심한 남자의 말투에 답답했던 수련은 창문을 열고 내지르듯 소리쳤다.
“우와 간발에 차이로 내가 개쪽을 면했네!!.”
“그래 창문 좀 열어줘 술 냄새 때문에 어질어질했거든 그러다 나 음주 걸리면 어떡해.”
“이게 진짜! 술 냄새 맡고 취하는 사람이 어딨냐?.”
“나. 나 술 입에도 못 대. 소주 한 잔만 마셔도 기절할걸? 근데 너 위가 안 좋은가? 술 냄새가 심하다. 이차 공기정화 기능 같은 거 있을 텐데 그런 것 좀 찾아봐 줄래? 난 운전 중이라.”
수련은 무심하면서 배려 없는 이 남자의 화법에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공기정화 기능을 찾고 있는 수련.
“내가 정말 너랑 친했던 게 맞냐? 너같이 센스도 없고 말도 안 통하고 벽돌같이 생긴 애랑 둘도 없는 친구였다니….”
“벽돌같이 생겼다는 건 칭찬이지? 네모반듯하게 잘생겼다는 거잖아.”
수련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눈을 깜빡이며 말한다.
“방어력이 꽤 높은데? 의외로 천재일 수도.”
“근데 친구? 누가 그래? 우리가 친구 사이였다고?.”
갑작스런 되물음에 수련이 당황했다.
“아니야? 엄마가 그러던데..”
수련이 이 완벽한 듯 하지만 빈틈 투성이인
지훈을 다시 만나게 된 건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1년전 그 어느 주말 역시 삼총사들과 불타는 밤을 보내고 그날은 수련의 술잔의 아슬아슬하게 가득히 차올랐던 술에 한 방울이 또록 하고 더 떨어졌었나 보다.
다음 날 정오.
수련이 늦게 자기 집에서 눈을 떴다.
“으으아아아아악!!!.”
배게 위에 깨끗한 타월 여전히 덜 마른 머리카락 뽀득뽀득 머리부터 발끝까지 샤워를 마치고 잠옷까지 갈아입고 잠이 든 수련은 왜 일어나자마자 이불킥을 하고 난리를 치는 것일까?
“으아아아아 이 쫄보년 죽일꺼야!!! 죽은 귀신이라도 또 죽일거야!!!!.”
드문드문이지만 선명히 박제된 기억 흐느적거리며 엉덩이를 흔들고 남자들을 유혹했던 전날 밤. 그 교태의 남자들은 빨려 들어왔고 몇 명의 남자들에게 전화번호를 줬는지ᆢ
심지어 어떤 남자는 집 앞까지 데려와 놓고 현관문 앞에서 보내버렸다.
그 황당해하는 남자의 표정이 생생히 기억난다. ‘이거 또라이 아냐?.’ 분명 얼굴로 쌍욕을 하고 있었다.
술만 마시면 나오는 수련의 또 다른 자아.
수련은 그녀를 ‘쫄보’로 부르고 있다.
엄청난 짓을 저지를 것처럼 온갖 교태를 다 부리면서도 막상 끝까지는 가지 못하는 거 보면 이 녀석도 자기처럼 잠자리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은 알고 보면 순진한 녀석이란 생각에서 지어준 별명이다.
냉장고를 향해 가면서 중얼거리는 수련.
“세상에 귀신이 어딨어? 나는 다중인격 장애가 분명해. 근데 그때 날 도와준 건 교수님이 아니라 그 할망구가 확실하긴 한데…. 한번 찾아가 봐?”
수련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응 하나밖에 없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세상에 둘도 없는 엄마의 목숨 같은 존재 따님이야.”
수련은 전화기 너머로 이어지는 잔소리가 익숙한지 귀에서 한참 떨어뜨려 놓고 기다리다 다시 이어 말한다.
“응 알았어. 나도 사랑해 다짜고짜 물어볼 게 있어 고3때 그 무당 할망구 아직 거기 살라나?. 어? 아..아니 뭐 나한테 또 무슨일이 생긴건 아니고. 그냥 뭐 내년 운수나 한번 볼까? 뭐 남자가 생기려나 뭐 그런 거 물어보려고. 어..어?
뭐? 지훈이? 지훈이..............가 누구야?.”
수련의 표정이 상당히 곤란해졌다.
전화를 끊고 수련의 모친 혜란도 심란한 마음에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었다.
임가영 지도 교수실.
누가 봐도 혼이 나가 있는 수련에게 계속 신경이 쓰이는 가영.
“어이! 김 교수! 김수련 교수님! 제가 지금 학생들 토론 주제 정해달라고 몇 번 간청 드려야 합니까?.”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는 듯 허겁지겁 마우스를 움직이는 수련을 보고 한숨을 푹 쉬는 가영.
“또 뭐야? 빨리 말해 신경 쓰이게 하지말고.”
수련을 꿰뚫고 있는 임가영은 수련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진심으로 신경이 쓰인다.
“교수님, 저희끼리 있으니까 하는 말인데요. 저 깜빡이요. 아주 싫고 끔찍한 것만 갖다 놓는 게 아닌가 봐요. ”
“알아듣기 쉽게. F 말고 T로!.”
“저 끔찍하고 싫은 기억만 지우는 게 아니고 뭔가 소중하고 잃어버리면 안 되는 그런 기억도 지워지나 봐요. 근데 지우고 싶은 기억이 연관되면 같이 지워지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뭔데?.”
“엄마한테 들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아주 친했던 친구가 있다고 고등학교 때도 잠시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공교롭게도 두 시기가 제가 아팠을 때예요. 정신적으로…. 아시잖아요…. 교수님 저 미친….”
마지막 말은 둘밖에 없는 교수실을 요리조리 눈치를 봐가며 조용히 속삭였다.
“일리는 있네. 그런데 김수련! 누가 미쳐? 남을 속이려면 너 자신부터 속이라고 했지? 넌 정상이야 몇 번을 말해?.”
수련이 자신의 입을 치며 고개를 거북이처럼 쑥 집어넣었다.
“아무튼 그러면 저 너무 불행한 거 같아요. 너무 많은 걸 잃어버리고 사는 거잖아요. 그래서 하루 종일 우울해요.”
“너는 속마음이라는 게 없니? 상담심리학 조교라는 사람이 여기저기 그렇게 자기 우울을 전이시키고 다니는 거야?.”
“네?.”
수련이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차갑게 말하는 임 교수의 말에 당황해 되물었다.
“너희 어머니 왔다 가셨어. 오죽 답답하셨으면 나를 찾아오셨겠니?.”
약 한 시간 전.
수련의 모친 혜란은 만신 성자의 부재를 알고 있기에 갑자기 그녀를 찾는 딸이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엔 어쩔 수 없이 임 교수 를 찾았다.
조용한 커피숍에서 서로 불편하게 앉아 있는 두 사람. 먼저 입을 연 건 혜란이었다.
“곁에서 우리 애가 폐만 끼치고 있는 건 아닌지…. 늘 안 좋은 상황일 때만 봬서 송구스럽기도 하고.” - 진심이었다.
“아닙니다. 수련이 덕분에 웃는 일이 많아요.
밝잖아요. 오히려 제가 수련이랑 있는 시간을 더 좋아해요.” -진심이었다.
“그래도 교수님께서 곁에 이렇게 계셔주시니 얼마나 든든한지 그래서 혼자 사는 것도 허락해 준 건데. 통 연락도 안 하고. 요즘은. 잠은 잘 자는지 물어도 다 괜찮다고 만 하니….”
정작 물어보고 싶은 것은 묻지 못하고 머뭇댈 수밖에 없는 혜란.
“염려 하시는 거 뭔지 압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옆에서 잘 지켜보고 무슨 일 있으면 저라도 꼭 연락드릴게요.”
정작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갈무리 하는 가영.
그렇게 양쪽 모두에게 찝찝함을 남긴 짧은 만남이었다. 그러기에 임 교수는 작은 기분 하나 감추지 못하고 어머니를 걱정시키는 수련에게 조금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 친구가 신경 쓰여? 다시 만나봐 그럼.”
된소리를 뱉어놓고 마음이 쓰였는지 다시 은근한 말을 건넸다.
수련은 언제 핀잔을 들었냐는 듯 가영의 책상 쪽으로 의자를 끌어다 놓고 본격적으로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요 여자가 아니라 남자더라고요. 게다가 꽤 유명하던데요?.”
“뭐? 유명해? 연예인이라도 됐나 보지?.”
여전히 무심한 말투로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가영.
“아뇨 유튜버..는 아니고 어떤 유튜버가 올린 동영상의 그.. 뭐라해야 하나? 그 검색하면 나와요. 갓미남 갓도령?.”
그제야 할 일을 멈추고 수련을 돌아봤다. 가영의 눈빛이 불안한듯 잠시 흔들렸다가 곧 평소의 냉정함을 찾아왔다.
“갓도령? 또 F처럼 말하는 거야? 아님. 내가 해석한 게 맞아?.”
“네! 무당이요! 심지어 엄청 유명하고 점사는 안보는데도 줄을 서는 여자들도 있고 팬클럽도 있고 그렇게 또 용하대요.”
“요즘 젊은 무당들도 다 잘생기고 예뻐야 하더라. 그것도 다 마케팅 전략인가 봐. 그래서 뭐? 그 친구가 다시 만나려면 뭐? 복채라도 줘야 한대?.”
수련이 자지러지게 손사래를 친다.
“아뇨~~ 우리는 그래도 자연과학을 믿는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이랑 만나면 무슨 대화를 하겠어요? 대화가 되려나? 나한테 무슨 귀신 쓰였다 내림굿 받아라! 그러면 어째요?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죽탱이 날릴수도 있잖아요?.”
가영이 미소 지었다.
“귀신 때려잡는 수련이도 귀엽겠다. 가서 만나봐. 잊고 싶은 기억은 그대로 둬도 좋지만 소중한 거라면 되찾아 와야겠지?.”
그렇게 지훈을 찾게 된 이야기를 털어놓는 동안 어느새 수련의 집에 주차하고 지훈은 한숨을 내몰아 쉬었다.
“그랬구나. 어쩐지. 일단 차에서 내려 봐 .”
안전띠를 풀고 가방을 챙겨 내리는 수련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묻는다.
“뭐가 어쩐 지야? 칼 챙겼어?.”
“아니야 나중에 얘기할게. 칼이 뭐냐 칼이.. 우리 집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를.. 잠시만 거기서서 왼쪽 방향으로 천천히 한바퀴만 돌아봐.”
시키는 데로 우물쭈물하며 수련이 제자리에서 도는 동안 지훈이 중얼거리며 팥을 세게 수련에게 뿌려댔다.
“아이씨 뭐야 또 이거 하려고 한 거야? 귀신 안 믿는다니깐. 빨리 들어가자 피곤 하다.”
엘리베이터에 탄 두 사람은 갑자기 서로 어색해졌다. 처음으로 자기 집에 남자를 들이는 날이었다.
“야 근데 너 아까 친구 아니라고 한거 같은데..왜 처음부터 날 돕는다고 한거야?.”
“너랑 나랑 친구였던 적 없다고 얘기했을 텐데.”
“알겠고,잘났고,그러니까 남이나 마찬가진데 왜 너희 집 가보까지 들고 와서 날 돕는다고 하냐고 이 시간에 불려 나와서!.”
“당연하지 내 사람이니까.”
“그러니까..왜? 뭐?.”
잠시 수련이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내 사람. 내 연인. 우리는 처음부터 결혼 하기로 약속했어. 어차피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띵!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내리지도 못하고 멍하니 지훈을 올려다보는 수련의 정수리를 커다란 손으로 움켜쥐고 귀엽다는 듯 내려다보며 말한다.
“기억 하지마. 너 아픈 거 싫어. 괜찮아. 내가 다 기억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