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내가 누구게?

넌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by 월하수희

지훈을 집에 들이면 어색할 거라는 생각은 엘리베이터에서 지훈이 던진 폭탄 발언 때문에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수련은 지훈이 보는 앞에서 삑삑 비밀번호를 누르고 종이 인형처럼 힘없이 현관문을 열고 걸어 들어갔다.


“일단 소파에 좀 앉아있어. 나 좀 씻고 나오게 클럽 들어갔다 나오면 몸뚱이가 재떨이가 돼있거든. 알아서 아무거나 꺼내서 마셔”


손짓으로 대충 냉장고를 가리키며 터덜터덜 방 안으로 들어간다.


그 옛날 수련에게 도움을 줬던 무당 할머니의 손주가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붙어 다녔던 소꿉친구였단 얘기를 들었을 땐 그저 괴로운 기억 상자에 갇힌 어쩌면 소중했을 어린 시절 동창 녀석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그가 할머니의 무업을 이어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호기심이 생겼다. 교수님의 말대로 그를 찾아 가려 했을 때 지훈이 한발 먼저 수련을 찾아왔다..


샤워하는 동안 지훈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거짓일 리가 없다. 그가 꾸며낼 이유도 없다.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요란한 물줄기 소리 사이로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고막을 두드리는 심장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긴 머리를 수건으로 털털 말리는 동안 어느새 복잡했던 생각들도 털털 날아가는 중이다.

그렇게 잠시 맹한 표정으로 거울을 보는데

아뿔싸! 갈아입을 옷은 몽땅 다른 방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잡생각은 다 사라지고 방안 욕실에서 홍당무가 돼버린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거실에 있는 지훈을 부르기 시작했다.


“지훈아~지훈아~~.”


방과 방 사이 문이 하나 더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나 보다.


“야! 땡땡이!!!.”


그래도 층간소음을 의식 한 그녀가 단말마의 외침으로 지훈을 소환했다.


그제야 지훈이 문을 벌컥 열고 벌거벗은 수련의 욕실 코앞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다.


지훈도 수련도 당황한 순간이었다.


“아…. 그게 옷이. 다 저쪽 방에 있어서 그런데…. 미안한데 아무거나 좀 집어서 갖다주면 고맙겠습니다.”


수련은 얼굴만 간신히 내밀어 꾸벅하며 부탁했다.


황급히 방을 나서는 지훈. 곧 무언가를 챙겨서 수련에게 가져다준다.


수련은 언제 홍당무였냐는 듯 당당하게 허리에 손을 얹고 수건을 머리에 동여맨 채, 씁쓸하고도 괘씸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은 지훈을 노려보며 서있다.


무심결에 물 한 모금을 들이켜던 지훈이 그 모습을 보고 푸학! 하고 터져 나오는 물과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그래 웃기지? 너 일부러 이거 갖고 왔지? 나 멕일라고? 내가 뭐 바둑이야? 블랙 앤 화이트로 깔도 기가맥히게 잘 맞췄어? 상반신 하반신 절도있게 잘도 나눴네. 내 몸뚱이가 분단국가야 뭐야?.”


수련의 차림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평소 좋아하는 옷을 색깔별로 정리해 두는 그녀인지라 지훈이 엉겁결에 정말 손에 잡히는 데로 두 개만 집어다 준 그것은.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몸에 달라붙는 터틀넥 상의 두 장이었다.


어쩔 수 없이 검정 흰색 상의 두 개로 몸뚱이만 겨우 가리고 나왔다. 무릎쯤에서 덜렁거리는 넥 칼라는 정점을 찍었다.


그런 수련을 보고 낄낄대는 지훈을 보고도 수련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리를 쩍 벌려 하반신의 덜렁이는 목덜미를 선보이며 지훈을 마음껏 웃게 두었다.


잠시후-


“덕분에 한결 자연스러워졌어.”


“뭐가?.”


“너랑 이렇게 한 침대에 누워있는 게.”


수련은 어느새 잠옷으로 갈아입었고 지훈은 붉은색 타이였던 홍실을 왼손에 감아쥐고 재킷만 벗은 채 수련의 곁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나는 하나도 안 자연스러워.”


지훈의 말을 듣고 수련이 지훈을 다시 보니

침대 끝에 떨어질 듯 말 듯 겨우 걸쳐서 포즈는 그럴싸하게 머리를 한 손에 기대고 수련을 보고 비스듬히 누워있었으나 침대 밖으로 뻗어있는 두 발은 쥐가 날것처럼 경직되어 있었으며 교차해서 꼰 두 다리도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그리고 올려다보니 그렇게 말하고 있는 지훈의 표정도 영 어색하고 관자놀이에 식은땀마저 송골 맺혔다.


“너 괜찮아? 좁아서 그래? 이쪽으로 더 와. 침대 넓어. 옷이 불편해? 내 거 뭐 큰 거 아무거나 입어볼래?.”


수련이 반대쪽으로 몸을 비켜주며 자리를 더 만들어 줬으나 지훈은 요지부동이었다.


“아. 아니. 넌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어느 템포에 숨을 쉬어야 할지 콧바람이 세서 네가 불쾌하게 느껴지진 않을지. 그….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 어떠한 내 신체 반응이 불가피하게 너를 겁에 질리게 할 수도 있을 거 같아서 아주 매우 엄청! 조심하는 중인데.”


수련은 눈알을 한번 크게 굴리더니 풉!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 나를 겁에 질리게 할 만큼 대단한 걸 지니셨나 봐요? 히히히.”


그제야 지훈이 훽 하고 등을 보이고 큰 몸을 말아 돌아누웠다.


새빨개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잠시 숨었다. 그리고 다른 얘기로 화제를 전환 시켰다.


“그래서 꿈 말인데…. 너는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지? 어렴풋이라도 뭔가 직접 나가서 본 거고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거기 때문에 네가 무의식적으로 형체를 바꿔서 꿈이라고 기억한다는 말이잖아?.”


“정확해. 교수님께는 그냥 꿈이라고 했지. 너까지 이제 다섯 명이야. 내가 미쳤다는 걸 아는 사람은. 자다가 밖에 나가서 뭘 보고 어떤 짓을 하는 건 몽유병이 맞아. 그런데 나는 교수님 말처럼 그냥 아무 데나 헤매다 들어온 것 같지 않거든. 분명 어떤 목적이 있고 무언가를 했어. 그건 내 의지가 아니잖아. 그렇다면 나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 즉 다중인격이란 뜻이야. 지금껏 미치지 않은 척 노력해 왔어. 보지 않은 척 못 들은 척 다할 할 수 있어. 환청 환시 환각. 다 아닌 척하고 살 수 있어. 하지만 잠잘 때 누군가 나 아닌 다른 인격이 나온다면 그건 곤란하잖아. 들켜버려! 내가 미친년이라는 게.”


지훈은 답답하다는듯 토해내듯 그 말을 받았다.


“수련아 너는 미친 게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너의 그 가설을 증명해달라고 널 부른 거잖아. 어쩔 수 없어. 날 도울 사람이 너밖에 없어.”


지훈은 드디어 경직됐던 몸을 번쩍 일으켜 앉았다.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깊은 한숨을 허공에 내뱉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시 다정한 눈으로 수련을 바라본다.


“네가 믿지 않으니까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와닿지는 않을 거야. 사실 그냥 신장칼 만 갖다 대도 잡귀 따위야 쉽게 쫓을 수 있어. 근데 수련아 넌 좀 특별해.”


“그 특별이, ‘특’공부대가 와도 ‘별’수 없다는 그런 뜻?.”


가볍게 이 순간을 넘기고픈 수련의 2행시를 지훈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게 사실은….”


“아 몰라 됐어. 어쨌든 그 특별이 좋은 뜻에 특별이 아니라는 거잖아. 알고 싶지 않아. 어제 다시 그 꿈이 시작됐어! 나는 분명 나갔다 왔고. 오늘 자다가 누가 튀어나올지도 몰라. 네 말이 맞다면 너의 그 번쩍번쩍 은장도? 은 장검? 그걸로 내 목을 후려쳐라. 알았지? 그래서 만약 내 정신이 반짝 돌아온다면 널 믿어줄게. 너에게는 고단한 밤이 되겠지만 나는 기절할 거 같다. 네가 꽤 든든한가 봐.”


어느새 지훈은 다시 수련에게 돌아서서 수련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 있다. 마음놓고 푹 자라는 듯.


“걱정하지 마! 내가 날릴 수 없는 것들은 잡아라도 두려고 늘 홍실을 엮어서 목에 메고 다니는 거야. 널 위해서….”


아까까지 목에 타이처럼 메고 있었던 붉은 매듭이 엮인 홍실을 왼손 주먹에 둘둘 말고 있던 지훈이 다시 한번 굳은 표정으로 주먹을 들여다본다.


“응? 날 위해서? 언제부터? 땡땡이 한복? 음.. 그날…. 나 그날 생각나려고 한다..”


수련의 숨소리가 커지고 목소리는 옅어진다.


“생각하지 마. 기억하지 마. 아팠던 날들은 기억하지 말자.. 널 위해서라면 매일 밤이라도 네 목에 이 은장검을 겨눌게.. 그게 내 사랑이야.

먼 시간을 돌아서 힘들게 여기까지 왔어. 이제 내가 지켜줄게.”


낮게 수련의 코고는 소리가 들리자. 지훈이 다정했던 표정을 돌덩이처럼 바꾸고 작지만 깊이 박히도록 수련의 귓가에 속삭인다.


“김수련 잘 들어. 넌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