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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ortyeight days Mar 01. 2021

2011 세대주로 세입자가 되다

결혼하고 첫 집

나는 초본을 떼면 서너 장이 연달아 나오는 가정의 세대원이었다. 나의 엄마는 이사라면 지긋지긋하다 못해 치가 떨린다고 했다. 일산에 첫 내 집을 마련하고 감격해하셨지만 불과 5년을 채우지못했다. IMF가 터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세입자가 되어야 했고 그즈음 나의 부모님은 꽤 많이, 오래 싸우셨다.


이런 역사 때문일 것이다. 나의 엄마는 내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 혼신을 다해 “집 마련”에 집착했다. 당신이 얼마나 힘들게 나를 키웠는지 아침저녁으로 어필했고, 그런 딸이 자기 집도 없이 결혼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다. 하지만 내 뜻은 완고 했으며, (부모님 께만은 지지 않았던 불효녀였기에..) 엄마가 그러실수록 속되 보였고, 나는 엄마처럼은 안 살거니 걱정 마시라 정도로 단칼에 가르며 결혼을 진행했다.




그렇게 직진만 했던 결혼 후 첫 집은

경기도 중에서도 북쪽 끝 파주, 운정신도시였다.

당시 수천 세대가 한꺼번에 입주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대중교통이 발달되지 않아 집값도 쌌다. 그 와중에 1세대 갭 투자가들이 2-3채를 사들여 전세를 놓고 있었다. 나의 첫 집주인이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 집을 두고 우리 집을 1억에 사고 분양권 하나를 더 갖고 있었다. (그 동네 집이 많아 전셋값이 집값의 5-60프로밖에 안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양가에 최대한 손을 벌리지 않고 싶었지만 유학생에 대학원 졸업을 앞둔 남편은 전셋값 1억 중 100만 원 도 보탤 수 없었다. 시부모님이 일부, 내가 일부, 내 이름의 전세 대출 일부를 받아 전세로 집을 마련했다.


한 문단으로 간단히 요약된 나의 첫 집은, 당연히 친정 엄마의 집착에 힘입어 꽤 고초를 겪었다. 위치, 자가냐 전세냐, 몇 평이냐 등등의 난관이 있었으나 결혼을 앞둔 젊은 처자는 신혼여행을 앞뒀으니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렇게 신혼은 참 달았다. 한 달 뒤 집주인에게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집주인은 집을 빼 달라고 요구했다. 집을 팔았고 이사 비용으로 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짐을 다 넣었고 신혼의 단꿈을 꾸고 있던 때, 집을 다시 구하고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달갑지 않았던 우리는 그 제안을 당당히 거부했다. 집주인은 결국 집을 처분하지 못했고, 곧바로 대한민국에서는 “하우스푸어”와 “깡통전세”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린 그 집에서 큰아이를 낳고 3년 4개월 만에 이사비용 250인가 150만 원을 받고 집을 비워줬다. 계약기간인 2년이 도래했을 때 집값은 떨어져 있었고 집주인은 전세금을 돌려줄 수 없었다. 우리에게 계약 연장을 통보했다. 계약금을 돌려주지 못하겠다고 통보받은 상황에서 애매하게 1년이 좀 더 흐르고 갑자기 본인 집이 팔렸다며 나가 달라고 재통보를 해온 것이다.


집주인은 이사 나가는 날 약속했던 이사비용을 모두 주기 아까웠는지 짐을 다 뺀 아파트 현관에서 남편과 꽤 오래 돈다발을 들고 실랑이를 했다. 자기들 덕분에(?) 전세 싸게 산거 아니냐며, 이 정도만 받고 그만 하자는 얘기였다.

맞다. 그 집이 그 당시 시세보다는 쌌다. 하지만 틀렸다. 우리가 계약 연장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연장은 그들이 요구했고 우린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집주인 내외는 결국 젊은 부부의 성깔을 굳이 확인한 채 우리와 인연을 끊어냈다.


그리고 나는 둘째를 임신한 상태로 두 번째  집, 세입자가 됐다. 2014년 6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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