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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섬

by 아티초크

프랑스에 와서 오랜 시간 동안 내 모국어는 섬에 갇혀버렸다. 섬안에서 스물몇 살의 온전한 성인으로 사고하고, 말할 수 있었지만 섬 밖으로 나오는 순간 더 이상 언어를 잃었다. 짤막하고 어눌하게 단어와 구조가 맞지 않는 문장들을 나열했고, 엉뚱한 발음으로 사람들을 당황시키는 4살짜리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 내가 어린아이처럼 말하자 사람들은 나를 어린아이로 대했고 차츰 나 역시 그런 대접에 익숙해져 갔다.


어린아이는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받았고, 당연하게 매일같이 겪는 일들도 버거워서 섬으로 자꾸 숨고 싶어 했다. 하지만 숨어 있자니 다시 스물몇 살의 자아가 깨어나 어린아이를 다그쳤다. 숨어버린 행동은 죄책감으로 변해 섬의 날씨를 우울하게 만들었고, 어린아이는 억지로 다시 섬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 곳에도 온전히 전달되지 못할 순서가 꼬여있는 미완의 말들을 계속해서 내뱉었다. 부딪히고, 또 부딪히며 조금 더 큰 어린이가 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했다.


시간이 흘러서 조금은 큰 아이처럼 말했지만 어린아이처럼 말을 내뱉고, 실수를 반복했다. 프랑스어에서 숫자 계산에 대한 실수는 ‘erreur(오류)’라고 하지만 언어, 문법적 실수는 ‘Faute(잘못)’라고 칭하는데 그것이 사람들을 더 긴장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라디오에서 들은 적이 있다. 언어적 실수는 왜 결여, 부족, 잘못, 죄를 뜻하는 ’faute’를 사용하는 걸까?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더 많은 언어적 잘못을 저질러버려도 괜찮겠다는 마음 가짐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어의 그 복잡성은 알려고 할수록 더 헤매게 했다. 마치 다가가면 멀어지는 까칠한 고양이처럼, 좀처럼 가까워 지기가 어려웠다. 영원히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을 늘 생각하며, 그럼에도 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이상한 말을 하는 게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이상함 자체가 곧 나를 이루는 요소였다. 나는 매력적으로 비치기도 하고 불편함으로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나 자신만은 스스로를 평가를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한 번은 같은 한국인 친구에게 발음에 대해 놀림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어조와 발음을 완벽히 프랑스인처럼 만드는 것에 공을 들이는 사람이었다. 이 말에 어폐가 있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완벽한 한국어의 어조와 발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프랑스어 역시 개개인의 말투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완벽한 프랑스어란 그 친구가 정의하는 특정한 기준일 뿐이다. 아무튼 그 친구는 한국인의 어조로 프랑스어를 하는 사람들을 낮추어 말하기를 일삼았고, 어느 날엔 내 발음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묘한 불쾌감이 들었는데, 곱씹어 생각을 해보니 이런 무례함의 배경에는 그 친구의 가치관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 친구의 목표는 프랑스에 왔으니, 프랑스인처럼 생각하고, 프랑스인처럼 말하고, 프랑스인처럼 글 쓰고, 프랑스인처럼 읽고, 프랑스인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은 프랑스인처럼 자기 자신을 성공적으로 개조해 내는 걸 목표로 삼아야 할까? 물론 이 물음에도 어폐가 있음을 독자님들은 눈치채셨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모국어의 섬으로 돌아와 생각했다. 내가 사는 환경을 바꾸었다고 해도 나는 이 세계를 잃고 싶지 않았다. 스무 해가 넘는 동안 나의 세계는 견고하고 섬세하게 설계되었고, 그 주재료는 모국어였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조금씩 내 세계를 넓혀가는 것은 이것을 지키느냐 마느냐와는 별개로 의미 있고 흥미로운 일이라 생각한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미드를 보며 물 흐르듯 굴러가는 영어 대사를 따라 해 보는 것,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프랑스 인들의 숨 가쁜 토론 방식에 놀라는 것, 일본인 친구들의 조심스러운 어조를 들으면 차분한 음악을 듣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북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의 음의 높낮이가 껌처럼 늘어난 프랑스어를 듣고 재미있어하는 것. 언어에는 문화와 개인과 삶의 궤적이 뒤 섞여 만들어낸 고유한 캐릭터 성이 묻어난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언어의 섬은 내가 나와야 하는 세계가 아닌, 새로운 언어들이 들어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확장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나는 어떤 언어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조금 가벼워질 수 있었다. 내 언어는 그렇게 내가 살아온 시간을 품으며 계절이 바뀌듯 천천히 변화했고, 외국에 살고 있지 않은 지금도 미세하게 변화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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