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난다. 왜 자꾸 화가 날까. 평소에는 잘 웃고, 친절하다. 가까운 가족들에겐 자주 무척 크게 화가 난다. 자주 통제력을 잃은 채 아이들을 통제하려고 한다. 나는 왜 아이들을 통제하려고 할까. 왜 자꾸 나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에게 화가 날까.
둘째 아이는 올해 7살이 되었다. 만지지 마하면 만지고 이리 와하면 가만히 있고 거기 있어하면 싫다고 하며 온다. 이런 청개구리가 있나. 원하는 것도 많고 사고 싶은 것도 많고. 저녁에 재우려 하면 왜 항상 배가 고픈 건가. 방금 밥 먹었는데. 씻는 건 얼마나 싫어하는지 매일 씨름하고. 씻으러 들어가면 또 안 나온다고 한다.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은 순간이 많다.
그런 둘째가 영어학원을 두 군데나 다니고 있다. 첫째는 초등 2학년 때 처음으로 영어 알파벳을 익히고 파닉스를 공부했는데 둘째는 좀 욕심을 내서 미리 시켰다. 그중 한 군데는 영어유치원 방과 후 유치원으로 파닉스를 배우는데 매일매일 해야 하는 숙제가 제법 된다. 그 숙제를 시키는데 얼마나 많은 인내심이 요구되는지. 그럴 거면 그만둬라는 말을 자주 뱉는다. 한 장의 숙제를 하는데 얼마나 많은 인내심을 발휘해야 하는 걸까. 지우개 쪼개고 장난감 가지고 놀고 피리 가져다가 불고. 못하게 하면 계속하겠다고 떼를 쓴다.
너무 어린 시기에 공부를 시작한 걸까. 즐겁게 다니는 영어 학원은 놀러 다니는 거냐며 그만 두라했다. 학습적인 영어학원은 아이가 힘들어서 못 다니겠다 하는 상황에서 둘 다 그만두라고 했다. 이게 맞는 걸까.
첫째는 어떠한가. 방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은 왜 항상 그대로인가. 바닥 공간도 좁은데 왜 그 자리에 놓는 건가 이부자리는 아침에 꼭 정리하라 수백 번 일렀지만 그냥 포기했다. 이건 안되는가 보다. 힘들어하는 수학 숙제는 여전히 어렵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수학숙제를 미루고 미루다가 닥쳐서 마지막에 찍듯이 대충 해서 간다. 틀리는 문제들이 대다수. 그 문제들 오답풀이를 다시 해야 하니 그다음 숙제가 또 부담될 수밖에 없다. 숙제 다 했다고 거짓말로 둘러대다가 어느 순간 숙제를 한 방식이 탄로 났다. 요즘은 다시 열심히 숙제를 해 가고 있긴 하지만 언제나 감시의 눈을 멈출 수가 없다. 숙제를 했는지 언제 할 건지 여부를 지속해서 계속 확인해야 한다. 이런 감시와 독촉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나조차 회의가 든다.
아이들은 나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다. 가자고 외쳐도 각자 자기 할 일을 할 뿐. 자자고 외쳐도 나는 누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건가. 아이 방엔 나 혼자 누워 있다. 아침이면 일어나라고 말해도 옆에서 일어날 때까지 떠밀지 않으면 한 시간이고 더 누워 있다. 세월호에서 선장이 가만히 있으라 이야기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듣지 않고 선반에 나와 있던 아이들은 살았다는데, 우리 아이들은 그 상황이면 살 수도 있다. 그건 감사해야 할 일.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잘 키우고 내 삶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우선 나의 화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화가 나도 그 화를 아이들에게 분출시키지 않고 잘 컨트롤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알아차림이 있어야 한다. 내가 화가 났고 곧 분노의 포효가 나갈 수도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둘째 그럴 때 화를 조절할 나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깊이 숨쉬기, 숫자 세기 같은 잠시 내 정신을 다른 곳으로 분산하는 작은 액션들이 필요하다. 셋째 미성숙한 나를 인정한다. 순간적인 분노표출은 일을 해결하는데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즉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화를 낼 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 다만 수위와 빈도를 좀 낮출 수 있다면 좋겠다. 넷째 아이들에게 엄마가 지금 화가 나고 있는 상황임을 알리고 곧 분노의 잔소리가 시작될 수 있다고 경고는 최소 두 번은 해주자.
마지막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상의 에너지가 나를 돕고 내가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하기. 앞에 네 가지 방법이 실용적인 방법이라면 마지막은 좀 더 큰 의미의 해결책이다. 현재 나와 아이들이 가진 것들에 감사하며 좀 더 너그러워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내 삶에서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하나도 당연한 게 아니란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기. 감사를 표현하고 분노를 조절할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더욱 기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