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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Apr 14. 2021

밸런스 육아, 무계획이 계획

'아무것도 하지 않는', 피로함의 저항



달력을 보니 시간이 지나있다. '오늘이 몇 월 며칠이구나'라고 인지하기보다는 '내 아이가 몇 개월이다'라는 게 익숙한 나의 변화된 시간 계산법으로 하루를 맞이했다. 날짜 개념은 무뎌졌지만 계절을 느끼는 감각은 또렷해지고 온전히 한 계절을 이렇게 느슨하게 즐겼던 때가 언제인가 기억나지 않는 아득한 여유가 주는 편안함을 즐긴다. 


대부분 아기가 먼저 일어나 나를 토닥토닥하며 정확한 시간에 아침을 알리곤 하는데 모닝 분유 라테를 타서 먹인 후 베란다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면서 공기를 확인한다. 손가락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결이 오늘 아이의 등원룩을 선택해준다. 차갑지 않고 따뜻한 공기도 점점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알려주는데, 잠깐 맑음과 흐림의 정도를 확인한 후 다시 하려고 했었던 일을 한다. 




평일 하루의 시작은 거의 늘 똑같다. 그리고 엄마가 된 이후의 삶을 본격적으로 체감하는 대단한 사건이 어린이집 준비였다. 아기 몸체만 한 가방에 기저귀와 물티슈를 넣고 원에서 사용할 개인 용품들을 구매하면서 내가 앞으로 이 아이에게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챙겨줘야 할 것의 시작임을 느낀다. 아직 아이는 불평이 없다. 내가 골라주는 색깔의 아이템을 챙겨서, 입혀주는 옷을 입고, 밥을 떠먹이고, 살짝 졸려하는 것 같은 아이를 안고 어린이집에 데리고 간다. 가던 길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손을 자주 흔들며 기분 좋은 인사를 전하고 윙크도 하면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멀리서 접촉해간다. 




아이는 생후 10개월 말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바이러스로 세상의 여러 가지가 단절되어 있는 이 시점에, 더군다나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무시무시한 경쟁사회 정글에 아이를 그냥 던져버린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씩씩하게 잘하리라' 아이를 먼저 믿어본다. 아기가 있는 삶이 아니라 아기랑 함께 사는 조화로운 삶이 곧 내가 행복한 일이다. 내가 행복해야 육아가 행복하다. 


코로나바이러스 이 전 우리 사회는 선을 그은 세대론에 지나치리만큼 명확했다. 각 구획에 포함되어 있는 세대는 포함되지 않는 다른 세대들과 교집합 하지 않았다. 서로를 절대적으로 이해할 수 없어했고, 종족 특성에 따른 각자의 플레이는 매끄럽지 못한 많은 불편한 상황들을 만들어냈다. 이 세대론이 점점 힘 빨을 얻어 갈 때쯤 코로나 팬데믹은 세대론을 비롯한 전 세계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의 피로한 마인드 조차도.






임신을 한 여성이 회사생활을 잘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노력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회사의 남자 오너, 남자 상사들은 임신한 여자 직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임신을 무기로 삼지 않았다. 임신 8-9개월 때까지 내가 임신을 했다는 것에 스스로도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어쩔 수 없이 배가 많이 나온 8개월 이후에 알게 된 직원과 외부 협력사 사람들도 있었다. 코르셋처럼 꽉 끼는 유니폼을 벗고 고무 바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래도 그 시기의 나는 열심히, 또한 씩씩했다. 피로한 일상생활이었지만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해치운 뒤 집에 돌아와 겨우 남은 에너지로 생활을 하는 것의 병행이 당연했다. 그것이 임신은 했지만 24시간 꽉 채워 살고 싶은, 열심히 일하고 싶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의 밸런스에 잘 맞았다.






그리고 지금은 어떤 계획도 하지 않는 무계획의 계획에 자연스럽다. 아기의 어린이집 생활이 시작되면서 나도 밸런스 육아가 가능해졌다. 균형 있는 삶은 생기를 돌게 하고 그 기운은 분명하게 겉으로 드러난다. 아이의 어린이집 등원 시작과 동시에 육아를 뺀 나의 밸런스 생활도 시작된다. 등원 후 바로 하는 70분 요가, 요가원으로 걸어가는 길 한 계절의 날씨를 또렷하게 흡수하는 산책, 그리고 좋아하는 책 읽기와 전시회 관람, 새로운 곳 가보기, 고양이 안아주기 같은 것들을 이용해 휴식한다. 일할 때 늘 가지고 있었던 볼록 솟아 긴장된 승모근과 목을 앞으로 쭉 뺀 불편한 자세에서 벗어나 힘을 빼고 편안한, 그리고 늘 규칙적인 수면 생활을 하며 하루를 나무랄 곳 없게 사용한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간 고요한 시간 청소, 빨래, 설거지 같은 것들은 30분~1시간 정도로만 짧게 한다. 그 이후의 시간은 온전히 내가 플레이되는 시간으로만 사용한다. 일상의 수련도 많이 이용해 청소와 설거지를 할 때도 짧게 명상을 한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다. 완전히 머릿속의 스위치를 off 시킨다. 이 생활에 적응이 되면 미래에 대한 걱정에 에너지를 쏟는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늘 하루 그리고 지금 흐르는 1분에 충실한 삶을 살고, 오늘 버려야 할 음식물 쓰레기를 내일로 미루지 않는 것만으로도 잠자리에 들어서 아무것도 걸릴 게 없는 편안한 휴식을 즐길 수 있다. 아무렇게나 옆에 놓여있던 어디까지 읽었는지 모르는 책도 휘리릭 넘겨보며 쪽수에 집착하지 않는다. 





커리어 관리와 어떤 두 가지를 병행하는 슈퍼맨의 삶이 아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계획하지 않아 피로하지 않은 삶에 평안한 오늘을 정성껏 잘 살아간다. 나의 밸런스는 곧 아이의 밸런스와도 같다. 스트레스가 거의 없는 하루는 근거 있는 자신감을 준다. 


출산과 동시에 엄마라는 '부캐'를 얻었지만 나의 본캐는 부정할 수 없는 '나'이다. 아이에게 집중하느라 분주해 나의 정체성을 잊지 말자. 아이를 잘 키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 하나뿐인 내 이름 고유명사를 잃지 않는 것이다. 


수만 가지의 보통명사 속에서도 분명하게 반짝거리는 고상하고 매력적인 우주에 존재하는 오직 하나뿐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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