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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권형 Jun 26. 2023

타자의 세계를 마주하는 두 가지 자세

‘복다진’의 <외국인>과 ‘전유동’의 <참, 맞다>

이 글은 2022년 '문화도시부평'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지역 뮤지션 앨범 제작 지원사업'의 사업 결과 리뷰로 작성된 글입니다.


'복다진'의 싱글 <외국인> 아트워크

 ‘복다진’과 ‘전유동’은 각자 꾸준히 작업해 온 싱어송라이터이자, 연주자로서 오랜 기간 함께 활동해 온 음악적 파트너이기 때문에, 그 두 이름을 이번 사업에서 나란히 발견하는 건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외국인>과 <참, 맞다>를 연달아 듣고 흥미로움은 더해졌는데, 까닭인즉, 이 두 곡은 타자의 세계와 마주침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같은 주제를 공유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타자의 세계과 마주침에 있어, 어떤 면에선 거의 정반대라고 할 정도로, 상이한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기에 따로 또 같이 활동하는 두 음악가에게서 (게다가 한 사업 안에서) 비슷한 주제에 대한 미묘한 온도 차를 체감하는 건 즐거운 일이었고, 이 두 곡을 짝지어 리뷰하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두 곡을 함께 사유함으로써 더욱 선명히 느껴지는 동시대적 화두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전유동'의 싱글 <참, 맞다(Feat. 해파)> 아트워크


 먼저, <외국인>은 다가오는 타자의 세계를 마주침에 있어 다름을 차라리 직접 드러내고, 경계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려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세계를 자신의 문턱 안으로 환대하고, 외모와 언어 등의 차이를 전언어적인 본연의 감정과 리듬 속으로 수렴시키려는 것 같아요. 복다진이 이전 커리어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색다른, Funk 리듬 장르를 구사하는 것도 그런 점에서 설득력 있습니다. 춤출 땐 말이 필요 없는 법이니까요.


 그렇게 “우린 너무 다른 것 투성이”지만, “나는 너와 함께 춤을 출 거야”라고 노래하는 그의 자세엔 일종의 풍요와 믿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몸이 들썩이는 리듬 속에서, 서로 환대할 수 있는 풍요 속에서 노래하는, 일종의 ‘파티’나 ‘축제’, 나아가서는 음악의 힘을 믿는 것처럼 느껴져요. 자신만의 터치로 파티를 이어가려는 듯 건반은 리듬 연주를 반복하면서, 음악이라는 장르 본연의 디오니소스적 효과를 상기시키려는 것 같습니다. 축제의 환희 속에서 모든 차이는 무화(無化)되어 하나로 수렴하는 법입니다. 그 안에서 다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그야말로 음악가다운 태도라는 생각이 들어요.


 새로 마주친 타자를 환대하는 <외국인>의 입장과는 다소 반대로, <참, 맞다>는 어떤 대상에 매혹되어 다가가 보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그 사이의 위계를 의식하는 듯 머뭇거리고, 낯설지만 그래서 매혹적인 타자와의 마주침을 두려워하죠. 그간 자연 이미지를 대상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그려왔던 전유동의 전사(前史)를 고려한다면, 이는 다른 종, 혹은 그 생태를 대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세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어른과 아이, 남성과 여성 등, 심적, 물리적으로 위계를 의식할 법한 타자들 간의 세계가 마주치고 있는 상황에 빗대어 볼 수도 있겠죠. 이때 <참, 맞다>는 낯선 세계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의식하고 거리를 두는 자세를 취합니다. ‘참’인 것은 오로지 내가 당신의 세계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 뿐이라는 것처럼.


 낮선 타자와의 마주침은 이렇듯 때론 설레고, 때론 조심스러운 일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태도로 맞이해야 하고, 어떤 자세로 다가가야 할까. 이때, 음악이 때론 환대의 방식이 되기도 하고, 타자와의 관계를 고민하고 자신의 태도를 사유하는 장(場)이 되기도 한다는 것. 그것이 제가 <외국인>과 <참, 맞다>라는 세계를 마주하면서 새삼 느낀 사실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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