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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권형 Apr 04. 2024

문서 SCP-093-IN-A

SCP-093-IN의 독백 기록 내용

 아, 또 여기네. 여전히 익숙해. 엄마랑 아빠도 없고, 동생은 피아노 가고, 테레비도 꺼져 있겠지. 햇살이 좋은 날, 나는 이제 막 부엌 쪽에서 공을 던졌을 테고, 너는 아직 튼튼한 다리로 거실벽에 튕겨 안방으로 날아간 공을 쫓아 달려갔을 거야. 맞지? 근데 이번에도 여기까진 아직인가 봐. 아쉽다. 많이 보고 싶었는데. 혹시 아직도 헤매고 있는 거야? 내가 신나서 너무 멀리 던졌나? 매번 초침 소리가 늘어지면 괜히 네가 걱정되고 불안해. 한두 번도 아닌데, 어쩌겠어, 익숙해져야지. 어쨌든 또 오게 돼서 기뻐. 얼른 와서 같이 놀자. 기다릴게.



 저기 봐. 우리가 놀던 아파트가 불타는 동안 내가 널 끌어안고 뛰쳐나오는 장면 말이야. 네가 공을 찾으러 내 품을 벗어나 있는 동안 난 가끔 저런 꿈을 꾸곤 했어. 사방이 무너지고 시커먼 연기에 휩싸여도 여전히 포근한 너를 품에 안으며 안심하곤 했지. 몇 번을 울면서 깨어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얼마든지 더 기다릴 거야. 신나게 달리는 네 모습을 상상하면 내가 못 할 일이 뭐가 있겠어.



 우리 이사 가던 날 기억나니? 그날 너랑 차 안에만 있었잖아. 겁많은 네가 신경이 쓰여서 곁을 비울 수가 없더라고. 해가 기울어 차 안이 노을빛을 띨 때쯤엔 이사가 빨리 끝나기만 바랐어. 어서 네가 편안하길 바랐어. 사실 네가 내게 오던 날부터 쭉 그랬어. 언제나 네가 날 떠날 날을 생각하며 노심초사했거든. 아마 이 아늑한 저주가 시작된 것도 그날이었겠구나. 커다란 상자 안에 벌벌 떨고 있는 널 처음 마주친 저기 저 현관에서.


 이삿짐 빼고 싱숭생숭한 기분을 미련하게 꽉 붙들고 되새겼어. 10년을 살았다고. 작고 약한 네가 살기엔 터무니없이 지독한 세상을 하루하루 배워가던, 그래서 반드시 널 지키겠다고 다짐했던, 그 10년을 이 집에서 보냈다고. 사실 10년을 꼭 채우진 못했는데. 사람이 그래. 뭐든 편한 대로 지우고, 자르고, 과장하고. 어쩌면 널 애타게 기다리는 이 순간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사실 이 근처를 지난 적이 있어. 어느 날 나는 떠나온 동네가 궁금했지. 많이 변했더라고. 길이 생각보다 낯설고 작게 느껴졌던 것 같아. 석바위사거리와 지하차도, 구법원고가와 그 밑에 항상 지나던 굴다리까지.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게 없더라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언제나 고가 방음벽 너머로 보이던 “로얄” 두 글자가 보이질 않더라고. 음... 그게 공사 중이었어. 로얄맨션아파트, 그러니까, 우리가 있는 이 거실도 펜스로 막혀서 그 안은 볼 수조차 없더라고. 내가 아직도 널 이렇게 기다리는데. 네가 어디에서 어떻게 헤매고 있을지 모르는데.



 2년 만에 마주친 네가 얼마나 낯설던지. 얼굴엔 고깔을 쓰고, 파란 옷이 배에 혹을 덮어 가리고 있었지.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 진통제로는 부족해서 소량의 마취제도 투여되고 있다고 했어. 그런데, 그때 나한테 잠깐 고개 돌렸었잖아. 혹시 기억하니? 널 다시 만나면 그때 나한테 인사한 게 맞는지 물어보고 싶어. 그게, 엄마가 연락했을 땐 너무 늦었더라고. 원망스럽기도 한 데, 네가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낯설어서 그랬겠지. 종일 누워 아파하는 네 신음이 낯설어서, 말라붙은 네 까만 코를 보여주기 싫었던 거겠지.


 난 늘 그랬듯이 어서 네가 편안하길 바랐어. 정신을 차려보니, 마치 우리가 처음 마주쳤을 때처럼 다시 상자 속에 담긴 널 내가 끌어안고 있었지. 그때 달리는 차 안에서 본 바깥 풍경이 어땠는지 아니? 어쩌면 이것도, 나 편한 대로 부풀린 과장인지 몰라. 그래도 얘기해줄게. 노을이 지고 있더라고. 우리 이사 가던 날 같이 본 딱 그 정도 온기로.



 있잖아. 만약 네가 다시 돌아오면 지금의 날 알아볼 수 있을까? 그동안 나도 세상도 많이 변했어. 공사 중이던 석바위 로얄맨션아파트 자리엔 무섭게 건물이 올라갔고, 벌써 ‘주안 극동스타클래스 더 로얄’이라는 어이없는 이름도 붙어 있어. 내가 널 기다리는 여기 1동 302호 거실 자리도 이제 다 사라지고 없는 거야. 이런다고 지나간 시간이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아. 하지만 난 여전히 이 무너져 가는 세계로 몇 번이고 돌아와 널 기다리는구나. 솔직히 그런 생각도 들어. 차라리 애초에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하염없는 공놀이를 시작할 일도 없지 않았을까? 아님, 네 아픈 다리를 제때 치료해 줬더라면, 혹이 커지기 전에 수술해 줬더라면. 그러면 진작에 네가 튼튼한 이빨로 공을 물고 달려와 나에게 안겨있지 않았을까. 더 잘할 수도 있었던 순간들. 지금이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매번 이곳으로 날 돌아오게 만드는 건 어쩌면 그런 후회들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나보다 훨씬 빠르고 불공평한 시간을 살았던 너는 이해할 거야. 이 적막하고 느린 집에서 홀로 누군갈 기다리는 마음이 무척이나 외롭고 쓸쓸하다는 거. 이제 와 궁색하지만, 그땐 그 마음을 이해하기엔 너무 모르고 어렸어. 그리고, 바보 같은 내가 이 쓸쓸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마저도 네 덕이 아닐까 생각하면, 내가 매번 여기서 널 기다리는 게 꼭 후회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너와 함께하면서, 또 이렇게 널 기다리면서 이해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이 날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거니까. 그러니 난 앞으로도 이곳에 돌아와 이 쓸쓸한 공놀이를 계속할 거야. 후회가 아니라, 나를 키워온 마음들을 되새기면서.



 언젠가, 이 놀이도 끝나는 날이 올까? 그때가 되면 우리도 다시 만나 내가 살아온 그동안의 세월과 우리가 함께한 기억을 맘껏 추억할 수 있을까? 우린 서로 정말 작을 때 만났지. 허겁지겁 밥그릇으로 달려가던 네 모습이 미칠 듯이 생생해. 함께 커갈 친구가 있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인 것 같아. 널 보내는 것도 그래서 그만큼 힘들었지만 말이야. 그렇게 네가 떠난 뒤에도 난 더 나이 들었고,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 이해해야만 했어. 그리고 네가 그리울 때마다 여기에만 머물렀다면, 아마 난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을 거야.


 이제 내 곁엔 이 모든 걸 함께 이뤄온 동료들이 있고, 그 덕에 난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게다가 난 그들과 하고 싶은 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았어. 그리고, 그동안 그랬듯이 쉬운 일만 있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이번에 가면 자주 못 올 수도 있을 것 같아. 이렇게 긴 안부를 남기게 된 건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이 하릴없는 독백도 끝나가네. 가야 할 때가 된 거겠지.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래도 언젠가 이곳이 다시 그리워지면, 그때 다시 올게. 네가 공을 찾아 헤매고 있을 이 시간이 나에겐 점점 안식이 되어가는구나. 항상 고맙고, 미안해. 저기 알람 소리도 낮게 울려오는 걸 보니, 이제는 정말 내 할 일을 하러 가야겠구나. 이번엔 정말 좋은 곡이 나올 거야.


그럼, 다음에 또 올게. 

안녕.


일련번호 : SCP-093-IN


자료 SCP-093-IN-B : SCP-093-IN이 독백 중 흥얼거린 노래의 완성본(제목 : 공놀이)


자료 SCP-093-IN-C : SCP-093-IN의 증언을 토대로 제작된 SCP-3020-IN의 몽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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