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련이나 조신 따위 모르는 자발적 응전자들
최근 가장 활용도 높은 OTT서비스, 넷플릭스에서 대중의 애정을 듬뿍 받은 작품의 여자주인공들은 가련하지도 조신하지도 않다. 입도 참 걸고, 자신의 욕망을 양보하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남자주인공에게 사랑받으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주어진 도전과 갈등에 최선을 다해 응하며 욕망을 취해 나갈 뿐이다.
“계좌 이체 한도가 얼마나 되세요? 두 분 합쳐서.”
‘인간수업’의 ‘배규리’(박주현)는 표면적으로는 예쁘고 공부 잘하고 친구들에게 인기 많고 어른들의 신뢰가 두터운, 게다가 부유한 가정의 자녀로 남부러울 것 없는, 말 그대로 전도유망한 여고생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식조차도 이익창출의 법칙에 넣는 부모와의 어긋난 관계에서 비롯된 결핍이 있어, 알고 보면 비뚤어질대로 비뚤어진 두 얼굴의 소유자다.
흥미로운 점은 그렇다고 움츠러든다거나 그늘이 진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 특유의 강단과 기지로 언제 어디서나 자신만만함 혹은 오만함을 잃지 않으며, 부모의 강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 든다. 그것이 설사 성매매를 알선하는 데 참여하는 일이고, 아빠 엄마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는 일이라 해도 규리의 양심엔 그 어떤 거리낌도 없다. 이런 그녀가 유일하게 미안함을 느끼는 존재가 있다면, 우연찮게 비밀을 들켜버리는 바람에 규리를 자신의 사업 파트너로 삼게 되며 일이 꼬여 버린 ‘오지수’(김동희)일 테다.
“이런 말 하면 제가 이상해 보일 텐데, 솔직히 기운이 좀 특별하세요."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타고난’ 희한한 여성 히어로, ‘보건교사 안은영’의 ‘안은영’(정유미)이다. 그녀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인물인데, 젤리의 형태로 생긴 그것이 때때로 살아있는 사람에게 위협이 되는 까닭에 본의아니게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을 들고 이상한 괴성을 지르며 다녀야 하니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기는커녕 이상한 사람 취급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다.
어쩌다 이런 괴이한 능력을 타고 나서, 남들은 보지 못해 있는 줄도 모른 채 살아가는 괴로움 덩어리들을 홀로 다 떠안게 되었는지, 은영은 자연스레 욕을 입에 달고 살 수밖에 없다. 그러다 기운이 특별한 한문교사 홍인표(남주혁)를 새로운 에너지원이자 동료, 친구로서 만나게 되나, 보통 이러면 다들 애정선을 형성하는라 정신이 없는데 참 남다른 여자주인공 은영에겐 애정이란 감정조차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여전히 똑같이 괴이한 몸짓으로 장난감 칼을 휘두르며 세상을 구하는데 여념이 없고, 애가 닳는 건 인표의 몫일 뿐이다.
“그래서 뭐, 어쩌자고. 어차피 죽을 거니까 다같이 동반자살이라도 해요? 우는 소리 좀 작작해.”
가냘픈 몸에 예쁜 얼굴, 여기에 발레까지 이제는 너무도 익숙하여 식상해진 여자주인공의 요소를 두루 갖추었다 싶지만, ‘스위트홈’의 ‘이은유’(고민시)는 첫 등장 이후 채 몇분이 지나지 않아 그러한 시선들을 흔쾌히 걷어내 버린다. 입만 열면 상대가 상처를 받든 말든 철 없고 고약한 말 투성이에다 반항으로 가득찬 삐딱한 시선. 그러나 다 자란 척 다 아는 척 못되게 굴면서도 실은 누구보다 주어진 상황이 공포스러우며, 정 많고 따뜻한 속내를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는 어린 아이가 들어앉아 있는 내면까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나이때의 고등학생인 것이다.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 쳐? 다른 방법이 있었을 거야, 사람 이용하는 거 말고."
‘스위트홈’에서 또 한명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특전사 출신의 소방관 ’서이경’(이시영)이다. 임신한 상태에서도 해당 세계의 괴물들과 거침없이 몸싸움을 벌이고 사람들을 지킨다. 그녀에겐 누구의 보호가 필요치 않다. 특히 극 중 괴물에게서 벗어나느라 상의를 탈의하는 장면에서 탄탄히 잡힌 근육질의 몸매를 선보여, 본인의 캐릭터를 더욱 생생하게 구현하는데, 이러한 장면에서 여성이 으레 받곤 하는 반응과 전혀 다른 방향의 탄성을 자아냄으로써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겠다.
여자주인공, 여성 캐릭터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졌음을, 현 시대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그렇다고 이제부터의 작품 속의 여성은 무조건 강하고 적극적이어야 하며 약하고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이어선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은 이러 해야 하고 남성은 저러 해야 하는 성별에 따른 잘못된 프레임이 낳은 오류에서 벗어나 어디까지나 개인의 성격의 범주로서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다. 어찌 되었든 당분간 대중의 인기를 누릴 작품의 여자주인공이 조신하지 않을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