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우리 중에 하나는 여기서 죽어”, ‘오징어 게임’의 이유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에서 약육강식 혹은 운, 잔꾀의 법칙을 거스르는 인물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살기 위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게임에서 이기려 악을 쓸 때, 자신과 함께 해준 상대를 살리기 위해 제 목숨을 내준다. ‘오징어 게임’의 안팎의 세계에서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돈도 어찌할 수 없는 존재다.
배우 ‘이유미’가 ‘오징어 게임’에서 맡아 연기한 인물 ‘지영’의 이야기다. 4회에서 문득 나타난 지영은 게임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과 상반된 모양새를 띠며 우리의 시선을 장악한다. 딱히 이기고자 하는 의욕이 전혀 없어 보이는 단조로운 눈빛과 생기를 잃은 하얀 피부, 그 위에 얇게 떠올라 있는 붉은 조소, 흡입력 충만한 첫 등장이 아닐 수 없다.
“어차피 우리 중에 하나는 여기서 죽어, 서로 무슨 이야길 하든 다시 얼굴 보고 민망할 일은 없잖아”
팀원을 모아야 하는 게임을 앞두고, 누군가의 선택을 원하진 않았지만 바라지 않은 것도 아닌 채로 앉아 있는 지영에게 강새벽(정호원)이 다가온다. 이유는 단출했다. 같이 해줄 것 같은 사람이 지영밖에 없어 보였다는 거다. 먼저 자신을 찾아준 게 고마웠던 걸까. 지영은 새벽에게 이름을 묻지만 듣지 못한다.
얄궂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오징어 게임’은 이 둘을 목숨을 걸고 경쟁을 벌여야 하는 위치에 놓는다. 제한 시간 내에 어떻게든 승부만 내면 되는 거라 지영은 새벽에게 게임은 마지막에 하고 그 전까지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못해 본 이야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서로의 깊은 속내가 나누어지고 둘은 비로소 이름을 나눈 친구가 된다.
“너는 여기서 나갈 이유가 있지만 난 없어”
‘오징어 게임’에서 지영의 서사는 그리 길지도 양이 많지도 않다. 그녀가 품고 있는 사연 또한 으레 보아왔던 그러한 인물의 것으로, 가정폭력 속에서 자랐고 결국 어머니의 목숨을 앗아간 아버지란 작자를 제 손으로 제거했다는, 상당히 비극적이지만 전형적이기도 한 설정이다. 자칫 밋밋한 인상만 주고 지나갈 가능성이 높았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친구를 위해,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줬다는 이유로 제 목숨을 내어준다는 한층 더 전형적인 상황이 붙는다. 그런데 할당된 장면은 적고 대부분 대사로 처리되고 만다. 인물의 구석구석이 웬만큼 생생하게 구현되어주지 않는 이상, 설득력은 물론이고 매력을 얻기 어려운 조건에 처한 것이다. 하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전히, 지영의 서사로 쌓아 나타난 이유미의 모습은 우리의 모든 우려를 순식간에 기우로 만들기 충분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강한 파트너를 찾으려 안간힘을 쓰는 중에도 그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구석에 앉아있을 뿐이고, 게임에서의 승리는 다른 의미에서의 살인이기도 하단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자각시킨다. 이런 그녀가 유일하게 말을 듣고 적극적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은 새벽이다. 홀로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어쩌면 누구보다 외로웠을 지영에게 먼저 다가와준 비통한 얼굴의 친구.
“여기서 나가면 너 나한테 남조선에서 폼나게 돈 쓰는 법 좀 배워야겠다, 아 둘 다는 못 나가는구나”
특히 지영이 새벽과, 최후의 일인이 되어 밖으로 나갔을 때 하고 싶은 일을 이야기하는 대목은 백미다. 새벽의 하고 싶은 일 혹은 해야 하는 일을 들으며 제대로 돈 쓰는 법을 알려줘야겠다는 등, 제주도 같이 가자는 등 둘 중 하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게임을 앞둔 사람의 희번뜩한 표정 같은 것 하나도 없이, 그저 친구로서의 말간 눈빛과 목소리를 보여주는 까닭이다.
이 때부터 우리는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한다. 예상은 했지만 지영은 정말 새벽을 위해 게임에서 져줄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고.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애틋함을 느끼는데 그야말로 지영이란 인물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완벽히 몰입한 상태가 된 것이다. 이제 그녀는 우리에게, 실제 분량과 상관없이 작품의 주인공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존재다. 배우의 연기력이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을 때 일어나는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