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쓰레기통 덜어내기
생각해보니 내가 벌써 9년 차 직장인이다. 세상에나. 내가 어느새 이렇게 나이를 먹었다니. 9년 전 파릇파릇한 20대 후반의 신입사원은, 이제 푸석푸석한 30대 중반의 과장이 되었다. 20대 후반의 신입사원은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며 미래를 꿈꿨을 텐데, 30대 중반의 과장은 하루를 어찌어찌 살아내며 당장의 휴식에 목말라하고 있다.
10년 가까이 직장인 신분을 유지하며 난 무엇을 얻었을까. 세어보진 않았지만 잃은 건 많은 듯한데..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 걸 보니 마음에 여유가 없긴 없나 보다. 아무거나 다 좋으니 끄적여보기로 했다. 내 안에 놓인 감정 쓰레기통을 조금씩 덜어내는 거다. 그 자체만으로 힘듦이 조금은 가실 수 있으니.
몇몇 사람. 정말 소수의 몇 사람들. 비즈니스 관계에서 맺어진 인연이지만 그 와중에서도 사사로운 친분을 쌓은 사람들을 얻었다. 사실 한 편으로는 회사 생활을 그만두면 아스라이 사라질 인연일까 두렵기도 하다. 그래도 이만큼 직장인으로 살며 얻은 몇 안 되는 자산이다.
맥주 안주거리 정도 되는 업무 지식. 많은 기간 같은 업무를 해왔고 나름 전문성도 갖췄지만, 이직을 준비한다 했을 때 인정받을 수준인가 하는 질문엔 쉽게 답을 못하겠다. 어쨌든 직장인이 되기 전엔 몰랐던 세상과 지식을 알았으니, 깊이를 떠나서 얻은 것이라 하겠다.
에피소드. 각 잡고 썰 풀려면 1박 2일 각오해야 할 정도로 다양한 에피소드들. 직장인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었을 다양한 경험들을 얻었다. 하나하나의 이야기는, 그때 당시로 가서 말하자면 거를 타선 없이 퇴사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경험들이었다. 지금이니까 안주거리 삼아 추억으로 얘기하는 거지 뭐.
돈. 가장 중요한 돈. 도대체 어디로 다 흘린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직장인으로서 버티며 얻은 가장 큰 자산은 결국 돈이다. 지랄 맞아도 월급 때문에 성과급 때문에 버틴 거고, 그래서 경기도 어드매에 집도 사고 차도 사고 결혼도 할 수 있었던 거다.
건강. 그래, 잃은 것이 뭘까 생각하자마자 떠오른 건 건강이다. 안 그래도 약했던 허리이긴 했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허리디스크로 두 번이나 크게 고생했다. 두 번째는 지금 하고 있는 중. 지금은 코로나 수혜를 받아 회식이 없지만, 입사 초반 잦은 술자리로 체중도 급격히 불었다. 급격히 찐 주제에 빠질 생각을 안 함. 심적으로도 상처가 많다.
시간. 너무 아까운 시간들을 버려왔다. 초반엔 야근하고 주말 출근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워라밸은 개뿔. 시간 관리만 잘했어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을 허투루 쓴 때가 너무 많았다. 직장인이 가진 몇 안 되는 무기가 시간인데 생각 없이 살았다.
열정과 의지. 처음엔 뿜뿜 했다. 뭐든 열심히 했고 배우려는 열정도 강했다. 지금은 많이 잃어버렸다. 앞으로의 삶을 위해 항상 새로움을 배우고 깨닫고 해야 하는데 열정도 의지도 부족하다. '해야 하는데'라는 비생산적인 생각만 하고 있다.
여유. 삶의 여유. 뭔가에 쫓겨 항상 정신없고 조급하기만 하다. 따지고 보면 직장인이 아니더라도 언제는 삶의 여유가 있었겠냐만, 유달리 더 없어진 기분이다. 멀리멀리 달아나서 여유를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매번 한 걸음 정도씩만 도망치는 중이라 여유가 없다.
쓰고 보니 신세한탄 같기도 하네. 얻은 것은 그렇다 치고, 잃은 것을 되찾기 위한 솔루션은 나와 있다. 열정과 의지를 먼저 되찾고, 시간을 알차게 쓰면서 새로움을 배우고, 그렇게 두 걸음 세 걸음 더 멀리 달아나다 보면 어느새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거다. 아주 멀리 달아났다면 직장인 꼬리표 따위 떼어버리고 살 수도 있다. 그땐 좀 더 집중해서 건강도 챙길 수 있겠지.
열정과 의지를 되찾는 방법이 모호하지만, 이건 꾸준히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수밖에 없는 거 같다. 지금처럼 살래? 아니면 니가 부러워만 하는 그 사람들처럼 살래? 라고 말이지. 더 세게 얘기해야 한다면, 이대로 가다간 지금만도 못한 삶을 살 거라고 몰아치는 거다.
후.. 뭔가 차근차근 덜어낸 것 같기는 한데.. 감정 쓰레기통이 가벼워진 기분이 아니라 더 채워진 느낌은 뭘까. 괜히 더 답답한 마음이 생긴 것 같아서 언짢다. 하여간 직장인이라는 테마로는 뭘 해도 끝이 지저분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