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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댁 Nov 05. 2022

02. 퇴근길 풍경 속 나는

열심히 살아내다 돌아가는 길일까



아무리 일찍 업무를 마치고 튀어도 집 근처 지하철 역에 내리면 어둑어둑하다. 어둠이 스륵 내려올 즈음에 퇴근하게 되면 집 앞 거리는 이미 짙은 어둠 속 간판 불빛만 찬란하다. 퇴근길의 나는 온전히 혼자이지만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 그 이상일 때가 많다.


퇴근길 느린 발걸음으로 주변을 살펴보는 때가 잦다. 나 오늘 이렇게 열심히 살아내다 돌아가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두리번 두리번. 어디선가 담배 냄새가 난다 했더니 횡단보도에서 떡하니 길빵을 때리는 용자가 있다. 개같은 놈 같으니라고. 하여간 오롯이 나를 위해 집중하고 싶어도 이 망할 길빵러들은 욕을 안할 수가 없다. 하필 방향이라도 같은 날엔 손모가지 잘라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저 사람도 어디선가 열심히 살고 돌아가는 길일텐데. 흠 그러거나 말거나. 동정심은 찰나지만 적개심은 눈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다.


휴.

감정이 앞섰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총을 쏘던 칼침을 놓던 했을 수준이다. 현실은 궁시렁대며 자리를 피하는 일개미 직장인1이지만.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주유소를 지나고 있었다. 이 주유소는 그다지 저렴하지도 않은데 항상 사람이 많다. 널찍한게 차 끌고 오기 편해서 그런가보다. 오늘도 입구에서는 들어오는 차량을 안내하는 아저씨가 서있다. 내가 7시에 이곳을 지날 때도, 9시에 여기를 지날 때도 마주치는 아저씨다. 이 아저씨는 언제 퇴근하는거지?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면 아파트 단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따라 유난히 마주치는 사람들이 많다. 쿠팡플렉스인가? 레이 트렁크에 쿠팡 박스를 잔뜩 회수하는 아주머니가 있다. 아마도 부업으로 하고 계시나 보다. 작고 높은 레이 뒷꽁무니엔 착착 포개진 쿠팡 박스가 한가득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한걸까. 이 동네가 거의 마지막인건지, 아주머니 표정이 아주 지쳐보였다. 긱(Geek) 노동자의 삶도 퍽퍽하기만 한가보다. 아주머니는 마지막 박스를 포개어 싣고는 다시 쿠팡 물류센터로 가야할거다. 수거한 박스를 반납해야 할테니. 아마도 당신의 퇴근길은 아직 아득해 보인다.


그 옆에는 한진택배차량이 주차 중이다. 문이 살짝 열려 있어 보니까 아직 배달해야 할 박스가 꽤 보인다. 이미 어둑어둑한데. 이 아파트 단지만 배송하면 오늘 물량은 끝나는건가. 생각해보니 우리 아파트 단지에 오는 택배사 중에서 한진택배는 항상 저녁 이후에 배송이 왔었다. 때로는 새벽 1시에 문앞에 배달했다는 문자가 오기도 했다. 아마도 물량이 터진 날이었으리라. 그래도 오늘은 몇몇 동만 더 돌면 끝날 것 같아 보였다. 퇴근이 머지 않았을테다.


터벌터벌 걷다보니 어느새 공동현관에 다다랐다. 뒤에서 끼익 소리가 나길래 돌아보니 배달 라이더다. 오토바이는 아니고, 자전거로 배달하는 청년이 보였다.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배고픈데 음식 냄새가 코를 후벼판다. 배달 청년의 목적지는 3층이 목적지였다. 청년은 내렸고 나는 마저 올라갔다. 이내 우당탕탕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으로 뛰어갔나보다. 다음 콜이 잡혔으려나. 아무리 전기자전거라지만 오토바이보다는 힘들텐데. 밥은 먹고 배달하는건가 궁금하다.



일개미 직장인1도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가방을 내려놓고 손을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새벽 6시 30분에 출근했는데, 퇴근하니깐 오후 8시가 넘었다. 아내와 늦은 저녁을 함께하고, 너무나도 눕고 싶지만 참아내고는 노트북을 열었다. 오늘은 왠지 퇴근길에 본 모습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모두가 열심히 살고 있다. 길빵하던 놈도 열심히 살아낸 하루였겠지만, 적어도 걔한테는 관심 없다. 쿠팡 플렉스 아주머니, 한진택배 아저씨, 배달의민족 청년 모두가 열심히 살고 있다. 나는 퇴근하는 길이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근무 중인 시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도 퇴근길에 오를테고, 마찬가지로 여전히 퇴근하지 못한 누군가를 보게 될 수도 있다.


퇴근길 풍경 속에서 행인1 정도였을 나는,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다 돌아가는 길이었을까. 누군가 물어본다면 나 오늘 정말 치열하게 열심히 살았어! 라고 할 수 있는 하루였을까. 일개미 직장인 10년차가 되다 보니깐 오래 전의 파릇한 열정도 없고. 그저 버텨내다 온 것만 같은데. 열심히 산 하루였을까. 다들 치열하게 사는 것 같은데, 나만 치열한 척 열심인 척 하면서 오늘을 산 건 아닐까. 열심히 살아놓지도 않고 열심인 척 하고는 뿌듯해 하진 않았을까.


10년을 몸 담은 직장에서 더 이상의 열정을 찾을 수 없다면 말이다. 다른 곳에서 열심히 살아야 할 요인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다. 이쯤되면 회사생활의 매너리즘이 아니라 삶의 매너리즘이 찾아온 게 아닐까 싶다. 문제의 원인도 나, 해결의 실마리도 나한테 있다. 뻔한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것 또한 나 자신이다.


퇴근길 풍경 속 행인1, 나는 말이다. 일개미 직장인1로서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며 퇴근하고 있었을테다. 풍경 속 다른 사람들처럼 나 또한 열심히 살아내다 돌아가는 길이라고 뿌듯해 했을거다.



개뿔도 없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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