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재 전국에서 가장 인구수가 작은 광역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 도시는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섞여 살아가는 공간이였고,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가장 평범하고 평탄한 삶으로 여기는 곳이며, 더운 여름이든 추운 겨울이든 아저씨들은 시내에서 회사 유니폼을 곧 아우터로 입고 다니는 도시였다. 조선 해양 산업이 기울면서 활기차던 공장은 점점 기가 죽었고, 플랜트 3개 중 1개가 문을 닫았다. 덕분에 회사 부장이었던 아버지도 그 시절 자진 퇴사 아닌 퇴사를 하게 되었고, 나의 고향의 옛 영광은 점점 지는 듯 하다.
고등학교 때는 자사고로 진학하게 되면서 전주로, 이후 재수를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가, 첫 대학교는 대구의 위성도시인 경산으로 갔고, 삼반수 때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강원도 원주로 의대를 진학 했다. 졸업 후, 인턴으로 근무를 시작하고 첫 상반기는 대전, 하반기는 인천에서 근무하였으며, 이후 순환 근무로 인해 서울, 부천, 인천, 수원, 서울 그리고 다시 인천으로 돌아오는 삶을 살게 되었다. 역마살이 낀 건지 정말 여러 도시를 다니며 살게 된 덕분에 항상 짐을 단촐하게 꾸리는 법을 알게 되었고, 미련 없이 떠나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향수는 아직 남아 있어서 집으로 내려가는 버스나 기차를 탈 때는 늘 설레는 맘을 안고 향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공장' 이라고 하면 폐수와 매연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겠지만, 나에게는 번쩍이는 전기와 화염이 일어오르는 삶의 활력이 넘치는 장소이다. 블루 칼라 노동자들이나 화이트 칼라 노동자들이나 너나 할것 없이 모두 자신의 사력을 다해 열심히 일하는 공간이었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엔 도시의 12경 중에서 산에서 바라본 공단의 야경이 있었다. 24시간 돌아가는 공장의 모습에서는 왜인지 모를 에너지가 항상 느껴졌다. 아쉽게도 현재는 공단의 야경은 대교 전망대에서 바라본 야경으로 바뀐 듯 하다.
올해 2월 근무를 중단 하고 2달 정도 고향에 내려가 있다가 현재 살고 있는 도시에서 다른 일을 구하게 된 덕분에 쭉 상경해서 지내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도시는 정말 일 외에는 아무 연고가 없는 도시라, 처음에는 외향적인 내가 꾸준히 만날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잘 지낼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슷한 시기에 고향에서 도저히 취업할 자리를 찾지 못한 오랜 친구가 취업을 빌미로 상경 하게 되어 1시간 내외로 내가 방문할 수 있는 곳에 살게 되었다. 덕분에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나 둘 이상이 있어야 먹을 수 있는 저녁을 먹고 싶을 때 스스럼 없이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저번 주에도 연락이 닿아 홍대입구 근처에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친구는 정부 24시에서 생활기록부를 열람할 수 있는 것을 아는지 물었다. 그렇게 발급이 쉽게 되는 지 알지 못했고, 수시로 학교를 간 것이 아니라서 생활기록부는 한번도 들춰본 적이 없어 내용이 궁금하였고 솔깃해 지는 이야기였다. 내 것을 열람하기 전에 친구의 생활기록부를 쭉 봤는데, 굉장히 공통적으로 적혀 있는 것이 '예의 바른 학생' 이라는 점이었다. 그 친구는 지금도 굉장히 예의 바른 친구라 어른들에게 많은 애정을 받는 친구이고, 우리 부모님도 그런 점에 더 마음에 들어하는 친구이기도 하다. 사람 성향 참 안 변한다 싶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내 생활기록부에는 혹시 안 좋은 말이 적혀 있으면 어쩌지?' 걱정이 들기도 했다.
내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때는 교우 관계가 썩 좋지 못했고, 중학교 때는 자의식 과잉으로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과 마찰이 없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자사고라 내신 성적도 좋지 못했고 그렇게 뛰어난 학생이 아니라서 존재감이 없었던 것 같았다. 막상 생활기록부를 들춰 보니 걱정과는 달랐다. 초등학교 때는 긍정적이며, 활발하고 교우 관계가 좋다고 적혀 있었다. 작성된 단점이라면 가끔 덜렁댄다는 말이 적혀 있었는데, 그건 지금도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나를 잘 파악하신 것 같다. 중학교 때는 성실한 학생이라는 평이 많았고, 고등학교 때는 발전가능성이 높은 학생이라는 말이 많았다. 이 단어는 다른 성적이 안 좋은 학생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어 주신 말인지 궁금하기는 했다.
인상적인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학생, 학부모의 꿈이 전부 '의사'로 도배 되어 있었던 것이다. 친구는 '의사 집착 광공'이라며 놀렸고 "그래서 어떻게 되기는 했네" 라며 서로 웃었다. 그 때는 어떤 삶이 기다릴 줄 알고 그렇게 의사라는 직업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그게 내 의지 였는지, 부모님의 의지였는지 헷갈리기는 하지만. 그리고 지금 별다른 판단 없이 진통제만 전산으로 처방하는 내 삶이 내가 원하던 '의사'의 삶인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 외에도 여러 기록들, 글짓기 대회에서 수상한 것, 축제에 나가서 퍼포먼스를 한 것, 무슨 공로를 했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체육대회에서 큰 공로를 했다고 한 것, 전국 넷볼대회에 나가서 수상한 것, 그동안 읽은 50권이 넘는 책들과 그에 대한 후기 등등.. 서로의 여러 기록을 보며 친구와 나는 "우리 참 열심히 살았다. 그치?" 라며 말을 주고 받았다. 앞으로의 미래는 잘 알지 못한 채, 그 시절 어른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잘 어울리기 위해 열심히 살았던 우리가 참 애틋하고 또 대견했다.
친구는 어렵게 기차표를 예매하여 곧 고향으로 내려가고 나는 월, 화 48시간 당직을 하고 연휴 마지막날이 되면 고향으로 내려간다. 과거의 영광은 빛을 잃어 공장이 유적처럼 변해가는 도시이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애틋하고 내가 제일 열심히 살았던 공간이다. 이번에 고향에 내려가서는 또 나의 어떤 과거의 모습을 마주할 지 궁금하다. 한치 앞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어렸을 적 긍정적이고, 밝고, 성실한 내 모습이 아직도 그대로인 것을 보면,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겠구나 싶다. 밝은 달이 귀성길을 안전하게 비춰주길. 모두들 안전하게 귀성하고, 또 귀가 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