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걸음 Apr 24. 2021

#15 여행의 이유

일상 속 선물

일상 속 선물


이런 게 여행이 주는 일상 속 선물일까요. 위로가 됐습니다. 사실 많이 다니지도 않았는데, 이토록 소중할 일인지요. 힘을 잃어가던 날에 예상치 못한 따스한 위안이 되었고, 무겁던 발걸음이 가벼워졌습니다. 




돌아오자 마자 자다가 이불을 천장 높이 차고도 남을 만큼 창피한 일을 겪었습니다. 해외 투자 전시를 다녀왔다는 이유로 한 교수님께서 학우들과 경험을 공유할 기회를 마련해 주셨고, 국제통상 전공생들 앞에서 개인 경험을 발표하게 하셨습니다. 이미 전공 발표는 수 십 차례 했었고, 세미나와 토론 수업에는 익숙했지만 사적인 경험은 공유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준비해야할 지 몰랐고, 어설픈 준비는 강단 앞에서 머리를 새하얗게 만들었습니다. 수 백 개의 눈 앞에서 횡설수설이 이어졌습니다. 누가 봐도 망친 발표였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생각만 하면 쥐구멍으로 숨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처럼 경험과 추억의 양이 다음 날의 행복을 담보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쉽게 불행해질 수 있는 환경을 갖춘 듯 보였습니다. 살짝 삐끗해도 낭떠러지에 떨어질 듯한 위태로운 것들 투성이였습니다. 작은 발표가 촉발한 스트레스는 들풀에 불 붙듯 삽시간에 다른 일들로 퍼져 나갔고, 불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제까지의 성취가 부담스러워졌습니다. 생각이 많아지자 몸도 비 맞은 솜처럼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링겔을 맞아야 했고, 무엇을 위해 이렇게 고군분투 해야 하는지 회의감이 넘나들기도 했습니다. 노력할 수록 더 대단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고, 미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행복했던 과거에 안주하고 싶은 심정이 커졌습니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 불안이 넘실거렸고, 자질도 없는 주제에 노력하는 모습이 한심스러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자주 허탈했습니다. 


날 좋은 휴일에 혼자 뜀박질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친구들은 교환학생을 준비하고, 휴학 중이거나 여행중이거나 연애 중이었습니다. 옆에서 소풍 나온 듯 여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똑같은 스물 두 살  왜 저만 유독 뛰고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습니다. 무채색의 칙칙한 운동복을 껴입은 채 홀로 달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모습이 스스로도 어색해  보였습니다. 왜 이토록 악착같이 해야 하는지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멈출 자신이 없었고, 주변을 따를 용기도, 불안한 미래를 주시할 배짱도 없었습니다. 덕분에 지리하고 외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단지 할 수 있었던 거라고는 제 발만 보고 뛰기. 

그러다 넘어지면, 또 다시 시작하기. 밑도 끝도 없이 자꾸 달렸습니다. 부족하다고 해서 놓아버릴 수 없었고, 무섭다고 멈춰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만둔다고 해서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지친 몸을 이끌었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시간이 길어질 수록 길고 외로운 혼자만의 싸움을 멈추고 싶어서, 끝을 향한 열망이 커졌습니다. 맹목적인 열심을 마치기 위해서 끝을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해내야 하는 일들에 질식할 것 같은 순간들의 연속이었고, 작은 일에 쉽게 무너졌습니다. 가끔 의지가 나약해진 듯한 기분으로 공원을 서성일 때면, ‘안되면 어쩔 건데‘와 같이 자책하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스스로에게 가혹한 말들은 평소보다도 더욱 쉽게 존재를 드러냈고, 이를 억누르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아야 했습니다. 때로는 ‘해야 함은 할 수 있음을 함축 한다’처럼, 왠지 노력의 끝에 활짝 웃는 결과가 기다릴 것 같은 글귀들을 찾아 읽고는 했습니다. 어쩌면 조금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희생이었을 지 모르겠습니다. 지쳐도 꿋꿋이 앞을 향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어디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현실이었고, 꿈보단 끈기로 버텼습니다. 



치열한 일상은 여행을 잊기에 충분했습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듯, 여행지에서 느꼈던 감격 어린 감정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매일매일 주어진 일상을 살아갈 뿐입니다. 분명 타지에서 느낀 영향들로 이 길을 걷고 있을 터인데,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느끼기 쉽지 않았습니다. 


여행과 삶이 멀어질 수록 타지에서 겪었던 일들도 더 이상 재미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웃음기 쫙 뺀 현실과 대비를 이루며 씁쓸한 감정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또 대단한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휴학을 하고 몇 개월 씩 다녀오는 친구들, 전액 지원으로 열 댓번이나 세계를 누볐다는 선배, 벌써 80개국을 다녀왔다는 택시기사님, 출장으로 다양한 경험을 쌓는 분들. 가끔 멋진 여행 후일담을 듣다 보면 제 자그마한 경험들이 초라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기억 속에 묻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집을 가는 길에 흐리멍텅한 날을 마주했습니다. 기분을 대변하듯 하늘은 한 없이 우중충했고, 때 마침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우산 없는 걸 하소연 할 수도 없게 만드는 정도라 한숨을 간신히 참았습니다. 습기 가득 찬 우중충한 공기에 기분까지 가라앉던 찰나, 문득 네팔의 추억이 습한 바람과 함께 흘러 들어 왔습니다. 


‘엇, 네팔 아침에 만났던 그 날씨다!’


보름 넘게 있던 지역에서 아침마다 맞았던 습하고 어슴푸레한 아침 공기가 떠올랐습니다. 빨래를 널어 놔도 도무지 마르지 않는 공기에 아침마다 궁시렁 거리며 한 명씩 양말을 드라이기로 말려야 했던, 그 날씨 말입니다. 우울하게 여겨졌던 날씨가 갑자기 정감 있게 바뀌는 순간입니다. 피식 웃음이 나왔고, 다사다난했던 추억이 비디오 플레이 버튼을 누르듯 재생되었습니다. 갑자기 네팔 속 웃고 울었던 기억 속으로 풍덩 빠져버렸습니다. 


이런 게 여행이 주는 일상 속 선물일까요. 위로가 됐습니다. 사실 많이 다니지도 않았는데, 이토록 소중할 일인지요. 힘을 잃어가던 날에 예상치 못한 따스한 위안이 되었고, 무겁던 발걸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여전히 일상과 동떨어진 과거의 추억거리 하나에 불과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누빈 사람들과 비교하면 자그맣고 보잘 것 없는 여행일 겁니다. 바쁜 하루를 살아가며 자주 잊는 기억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 곳에서 제가 경험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네요. 잠시 잊혀진 경험들조차 저를 구성하고 있었고, 몸의 감각들은 머리가 잠시 숨겨놓은 추억들을 기억하고, 위로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여행을 한 모두가 각자의 사연과 소중한 기억을 갖게 되듯이, 저에게도 그런 소중함들이 가득했나 봅니다. 순간이 갖는 특별함이 이미 삶에 스며들어 있었고, 일상에서 멀어진 게 아니라, 오늘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 중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행을 기억하는 의미가 조금씩 바뀌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일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구성하고 소중하게 만들어 줄 추억을 조금씩 더 많이 쌓고 싶었습니다. 우중충한 공기 하나에도 웃음짓게 만드는 그런 경험들을요. 때 마침 그 주에 오사카행 비행기 특가가 떴습니다. 대학생활 마지막 시험 이후 떠날 수 있는 일정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또래인 친언니와 함께 둘이서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나중에 또 미소 지어질 추억이 하나 더 쌓이길 바라면서요.



*** 브런치 독자분들을 위한 글

- 1년도 넘게 적은 글들을 매주 한차례씩 전달드립니다.

 - 한 주를 또 치열하게 살아냈을 매주 토요일 밤, 지나온 발자취와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

 - 여러분의 삶에 자그마한 위로가 되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14 우물 안 개구리의 탈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