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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ldsky Jul 07. 2019

워낭소리, 노스텔지어의 탈을 쓴 이기심에 관한 단상


어느 날, 소 한 마리가 어슬렁 어슬렁 인터넷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그 소에 대한 이야기로 웅성웅성 하더니,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그 느릿한 소가 극장가를 점령해 버렸더군요.

두루마리 휴지 한 롤은 가뿐하게 소비할 것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이 영화를 보고 울지 않는 자는 죄인으로 몰아 갈 듯한 감동에 대한 이야기들이 소가 되새김질 하듯 소비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사회적 신드롬이 되어, 이 영화에 등장했던 한 노부부는 뜻하지 않은 유명세에 시달려야 했고, 그 노부부의 자녀들은 일면식도 없는 이들에게 불효의 표본으로 손가락질 당하고 있습니다.

뭐, 바쁘신 분께서도 깜짝쇼로 극장을 찾으시고, 거기에 과잉 충성심을 발휘한 몇몇분들께서는 그간 외면하던 독립영화에 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해보자는 말씀도 하셨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40살 먹은 소 한 마리는 이곳 저곳에 싫든 좋든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스크린 저편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돌아가는 것과 상관없이 스크린 속의 풍경은 너무도 평화롭습니다. 그 푸른 녹음 속에 느릿느릿 굴러가는 소 달구지와 그 위에서 잠이든 할아버지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건, 우리의 어린 향수를 자극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제나 변치 않고 그 곳에 그 모습으로 있어 주길 바라며, 언제라도 그 진한 그리움을 찾아 내려가면 반갑게 맞이 해 줄 수 있는 고향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고향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새마을 운동으로 시작된 농촌 선진화는, 우리의 정서에 각인된 고향의 모습을 지워 놓습니다. 그곳에 소중한 누군가가 아직 머물고 있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나날이 옛 모습을 잃어가며 조금씩 조금씩 도시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시인 정지용이 그의 시 '고향'에서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고향이 아니러뇨'라고 노래한 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 우리들의 이기심이라고 정의 한다면, 그건 잔인한 것일까요?


우리는 늘, 고향이 언제나 그대로 머물러 주기를 희망합니다.

여전히 녹음이 우거지고, 최신 기술로 무장한 자동차로 가도 그 충격을 다 흡수 할 수 없는 비포장길이 정겹게 우리를 맞아 주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서 삶을 이어가는 그들이 문명의 혜택에서 멀어지며 하루하루를 불편하게 살아가는 건, 우리의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그냥 내가 가끔씩 찾아 갔을 때,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그냥 있어주길 희망합니다.


제가 이렇게 잔인하게 말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네 부모님은, 우리의 소망처럼 그대로 머무시기를 희망합니다.  할아버지가 아픈 다리를 이끌면서도 사료대신 꼴을 베러 가시는 것처럼, 소가 먹을 것이기에 농약을 치지 않고 힘겹게 제초를 하시는 것처럼, 우리네 부모님은 할아버지가 소를 돌보듯 우리를 돌봐오고 있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죄책감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손가락질 하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영화 속 그분들의 자제들에게 손가락질을 합니다. '고장 난 라디오 좀 바꿔드리지', '자식들도 많은데 좀 모셔가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이기심에 면죄부를 주고 안도하며 극장을 나서는 것이지요.


그런 이기심과 자기기만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은 그 삶 자체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40년을 살아온 그 소처럼 아직은 걸을 수 있을 때, 자신의 힘으로 더 많은 나무를 해 놓은 것처럼, 우리 부모님들에게는 스스로 힘으로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 공간이, 도심 속의 무료한 일상보다 더 소중하신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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