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갔다. 이삿짐을 가지러 갔다. 자녀가 그곳에서 휴학하고 이곳에서 인턴을 해야해서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그곳에선 원룸을 플랫이라 했다.
그래, 맞아. 사직터널 옆에는 ‘밝은채 원룸’이 있었다. 고가도로 아래 옛날 여관 같은 걸 개조했을 것 만 같은 건물. 밝은채라는 이름과 달리 창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나는 이곳을 떠올렸다. 쥐가 출몰하고 진공청소기는 아시아계 유학생들의 머리칼이 뒤엉킨 채 캑캑댔다. 밝은 볕이 부족한 그곳 비좁은 베란다에서 이전 세입자가 빨랫줄 전선에 매단 CD들이 뱅글뱅글 돌았다.
빛이 오면 강한 레이저를 컴컴한 실내로 쏴줬다. 지금 빛이 온다고 기상 캐스터처럼 예보를 해줬다. 어서 나와, 볕을 쐬고 빨래를 말려.
그 쓸모가 사라진 CD들은 과거에 문서나 음악을 저장해뒀던 것이지만, 어쩌다 오는 빛을 인지해 이곳의 타지인들에게 선사했다. 그 CD가 ‘밝은채’ 원룸처럼 오히려 느껴졌다.
베란다 너머에는 아랍인들의 거리였다. 이곳 유학생들이 버린 쓰레기를 뒤지고 이불이나 버려진 유통기한 지난 양념과 음식을 가져갔다.
나는 그곳에서 모하메드를 만났다. 최초로 만난 아랍인이었다. 놀라웠다. 그가 건네준 명함에는 점성술사이며 글쓰기 테라피스트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나도 글 쓰는 사람이라고 모하메드에게 말하지 않았다. 나의 내면에는 아랍인들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저 거리에는 가지 마. 더럽고 병균이 들끓고 살상이 매일 일어나는 곳이야. 이런 편견의 말에 젖어서 그렇게 몽매해서 말이다.
이곳에 와서는 자주 그 거리를 생각한다. 코로나 펜데믹 전 내 시의 타지며 현지였던 곳. 그곳에서 느꼈던 여러 가지 시차를 생각하며 그곳의 CD를 생각한다. 내가 쓴 시가 편견과 공포로 가득찼다 해도 나는 그곳에서 모하메드가 고마웠다. 그곳에서 만난 아랍인 할머니가 밝게 웃으며 ‘take care’할 때, 나는 밝은채 원룸의 그 ‘밝음, 그 박혁거세같은 혁혁함’을 소유했다.
타지와 현지를 교차하며 순차 교배하며 썼던 시들을 그 시간의 공CD에 내장하여 빨랫줄에 걸어둔다. 그 시들은 어둠보다 밝음과 호환하기를 더 좋아한다. 빛이 오면 무엇보다 뱅글뱅글 돌며 빛의 트랙을 이곳으로 보내준다. 먼 가자지구 무너진 건물에서 발견된 갓난쟁이가 이미 차가워진 엄마의 젖을 여전히 물고 있는. 어찌 되었든 어린 생명은 그 CD처럼 다시 뱅글뱅글 돌며 빛의 헌신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