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했습니다. 과거형이라 미안합니다.
우리 둘 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던 세상.. 살아보니 괜찮더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당신 이름을 버스 창가에 입김불어 새겨 놓고 내린 후, 영영 당신에게 이별을 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을 만났습니다:
미안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당신을 버리고 와서 미안했지만 과거형으로 말하는 이유는 내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기에 마냥 미안하지만은 않고 싶어서입니다.
미안했었다고
몇 번이고 입에 담거나
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죽었고,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당신이 보고 싶을 때
죄책감이 사무치던 때 오던 송도에 와 있습니다.
당신을 그리워하던 시절의 송도와는 모습이 많이 다릅니다.
그래도 차 타고 오가며 보니
당신 그리워하던 시절
그 바닷가에, 당신 그리며 내 발길 닿던 시절
그대로의 간판 몇몇이 눈에 뜨입니다.
그곳에선 안녕하신지요.
나만 잘 살겠다고 떠난 후
당신은 죽었고,
당신을 버리고,
당신의 죽음을 잊고자 한 나의 이기적인 결혼엔
죽음 같은 현실만 있을 줄 알았는데 아이와의 행복한 시간이 간혹, 아니 자주 비집고 들어옵니다.
중년의 고통을 모르는 당신이 행복한 걸까요?
그나마 살아남아 중년의 노쇠함을 인지하는 시간과 아이와의 지지고 볶는 시간을 겪는 내가 행복한 걸까요?
당신 죽음만큼 행복하게 살아재껴주고 싶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가고 싶다고 노래 부르던 뉴욕을 남편과 함께 가며 당신의 영혼을 데려간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당신 몫만큼 살아재껴주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남편에게도, 친구에게도, 동생에게도, 당신 죽음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묵묵히
당신 죽음만큼 견고하게 잘 살아내고 싶었습니다.
좋은 것을 보고, 책을 보고, 글을 쓰고,
남편에게 사랑받고 사는 것이,
그게 죽은 당신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길이다.. 아니면,
혹시라도 이기적으로 당신보다 처음으로 더 사랑하게 된 내 아이들을 다 키우고 저 세상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안녕했지요?’하고 우리 서로 하던 존댓말 인사 그대로 건넬 수 있을 양심만큼은 챙길 수 있는 삶을 사는 방법이라 생각했는데..
이것저것 지키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송도에 오지 않던 18년 동안 몇 번 당신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당신보다 살아남은 나를 챙기기가 버거웠습니다.
작년 가족끼리 남편의 권유로 왔을 때도 부러 바다 쪽은 눈길 주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당신이 영적인 곳에서 보고 있다 내 아이들 밉다 여길까 잠깐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압니다. 당신은 기꺼이 내 닮은 구석, 발톱 가시랭이조차 찾아내어 내 아이조차 나만큼 어여삐 여기고 사랑해 주었을 것을…
그래도 못난 나는,
미안한 마음에 아이들 얼굴 보이기 싫었나 봅니다:
미안했었습니다.
당신이 선택한 그 죽음을..
그 죽음을 딛고 내가 선택한 이 견고하다 생각한 결혼의 울타리가..
미안했습니다.
아니. 미안하다고 지금도 말해야 하겠습니다.
난 지금의 내 아이들을 보기 위해선
다시 돌아가도
당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 결혼을 또 선택해야겠습니다.
20년이 가깝게 지나갑니다.
영원히 그 모습이겠지요?
난 녹내장이 오고 노안이 오고 늙습니다.
샤를 보들레르의 의식에 관한 인간의 무지를 운운하는 시를 나눠 읽으며 정녕 죽어지지 않아 살아있다면 35세엔 같이 죽자던 광기 어린 말에
손가락 걸었지만
첫째가
“엄마는 어떤 시를 좋아해? “란 말에
샤를 보들레르를 떠올렸지만
“아는 시가 없는 걸..”하고 말았습니다.
난 죽음을 약속한 35세 그 해에
나의 둘째를 낳았습니다.
둘째를 낳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당신과 내가 죽기로 한 해에
낳은 아이니 더 강하고
올곧을 것이라고,
(아이 낳는 순간 첫사랑을 생각했다니 이 여자 외도냐 싶겠지만 수년 전 애초에 죽은 사람 생각하며 더 잘 살아지었거라~내 삶아~내 자식아~ 이랬더랬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둘째는 내 죽음과도 맞바꾼 아이란 생각을 간혹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꾸 생에 발을 헛디디는 건 아닌지 당신과 나의 서툰 대화가 송구치게 아이에게 미안합니다.
더 잘 돌보다 가겠습니다.
아직 당신 보러 갈 날이 50년은 더 남았겠지만
하하. 깁니다.
아직 남편도 돌봐야 하고
첫째도
둘째도
그보다 더 챙겨주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 기억 당신으로 충분했기에, 내가 다 지켜주고 그들에겐 상실의 기억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살아보니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아직 그들이 혼자 겪기엔 살아보니 괜찮지 않은 세상이어서 말입니다.
언젠가, 50년 후에 영적인 존재로 마주하면 살아보니 괜찮았다고 말해보려 3월 1일 삼일절 큰 날인데 괜히 의미 심장하게 송도에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