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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CONN 에콘 Mar 03. 2023

콩꽃 할머니


둘째까지 낳고도 친정엄마는 35킬로 정도 겨우 됐다. 원체 약한 사람이 거꾸로 있던 동생을 낳고 더 야윈 데다 천식이 심한 나를 키우느라 몸이 더 연약해졌던 모양이다.


자꾸 아픈 엄마를 위해 아버지는 집에 그 시절 식모라 부르던 지금의 상시입주도우미를 들이기로 결정하셨다.


주변에서 여러분을 추천받았나 보다. 며칠 사이로 낯선 아주머니 몇 분이 다녀갔었다. 그중 맨 마지막에 오셨던 분은 60이 훨씬 넘고, 고향을 떠난 피난길에서 파편을 맞아 다리를 저는 이북사투리가 낯선 분이셨다.


엄마는 마지막 그분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다. 훗날, 다른 젊은 분들보다 일은 더뎌도 외로우신 분들이 정 붙이고 제집 살림하듯 해주실 거라 여겼다고 그때를 회상하셨다.


우리 집 현관 앞 작은 방에 할머니 이불과 요, 작은 서랍장 같은 세간살이가 놓이고 얼마 후, 절름발이 할머니가 보따리 하나를 들고 우리 집에 오셨다.


할머니가 없던 내게 진짜 할머니가 생긴 것 같았던 기분이었지만,  살갑지 않고 투박한 말투를 장착하고 다리까지 절뚝이던 할머니와 금방 친해지지 못했다. 내 나이 고작 여섯이었다.


밥을 늦게 먹으면

“날래 먹으라루”

시시덕거리다 안 자면

“날래 자라우”

너무 배고파 빨리 먹으면

“체하묜 바늘로 손가락 후비야하네까 알아서 하라우“


어딘지 모르게 무섭지만, 체하면 바늘 들고 오기 전에 거친 손으로 등을 쓸어주며, “내 뭐라했네”라며 퉁명스레 말하면서도 손길은 멈추지 않던 할머니가 서서히 오래도록 좋았다.


초등학교 들어가서 서예를 배우고 한자를 알게 된 후

‘조두화‘라는 할머니 이름의 한자를 물었다.

“할머니, 할머니 이름은 한자가 뭐야?”


“콩두짜에 꽃화짜지비, 7월에 콩꽃이 필 때 태어나끼든. 어찌나 그 콩꽃이 이뽀쓰묜 내래 내 이름도 그리 조아써”


‘은혜, 빛남, 밝음, 착함.’따위의 뜻만 이름에 가득하던데 콩꽃할머니라니… 왠지 할머니 오른 다리에 움푹 파여 징그럽게 아문 파편의 흉터도 곱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콩꽃할머니와 함께 산지 5년이 넘어갈 무렵부터, 할머니 몸에선 이상한 냄새가 났다. 처음엔 슬쩍 지나칠 수 있는 냄새였는데 6년째쯤 되자 유달리 후각이 예민한 나로서는 같이 말을 할 때,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고 밥을 먹을 때, 밥맛이 떨어질 정도였다.



주위를 분산시킬 어떤 것도 없이 할머니와 단 둘이 밥을 먹게 된 어느 날.

난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 말이 터져 나왔다.

“할머니. 할머니한테 오줌냄새나. 요즘 할머니랑 밥 먹으면 학교 화장실에서 밥 먹는 거 같다구.”

지금 와서 생각한 거지만, 당시 70이 넘은 콩꽃 할머니는 요실금이 심했던 모양이다


그 후론 아무리 엄마가 같이 밥을 먹자고 해도 우리가 밥을 다 먹은 후 홀로 앉아 드시고, 함께 티브이를 볼 때도 몇 미터 옆에 곁을 두고 앉아 보셨다.


마치 화가 나 잔뜩 눈살을 찌푸린 얼굴을 해야만 티브이 속 얼굴이 보인다던 할머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오줌냄새라고 말한 후엔 할머니가 티브이를 보는 게 아니라 진짜 화가 나 있는 모양새로 보였다. 눈치가 자꾸 보였지만 어린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엄마에게 말하면 혼날 것 같아서 입을 함구해 버렸다.


그리곤 콩꽃할머니와 몇 개월 말을 섞은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러던 즈음 할머니와 둘이 있는데 어제부터 스멀스멀 이상하던 몸상태가 휘청휘청 어지럽더니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사과도 안 한 할머니한테 아프다 말을 할 수도 없고. 말을 걸어 할머니가 가까이 오면 또 그 냄새가 날 것 같고…


오늘은 할머니가 아들집에 다녀오실 거라고 그럼 볼일보고 엄마 금방 올 거니까 혼자 잠깐 있으라고 당부해 놓고 나가신 엄마를 핸드폰도 없던 시절 내 앞에 불러낼 수도 없고,


비닐봉지 바리바리 싸서 현관을 나가는 할머니께

“할머니 가지 마..”라고 말한 것도 같은데, 말이 묻혔었는지 아님 몽롱한 정신에 말을 뱉었다 생각한 건지..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급성폐렴에 열이 40도를 넘고 까딱 잘못하면 큰 일 날뻔했다면서 엄마는 병상 속 나에게 하는 말인지 벽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모를 말들을 뱉었다.

“가면 주정뱅이 아들한테 또 맞고 올 거면서 뭐 그리 급하다고.. 애가 이지경인데 두고 가.. 속상해서 참내..”



전쟁통에 남편 잃은 얘기, 같이 내려오던 동무들과 동굴에서 몸을 피하던 때에 굶다 굶다 처참히 죽어가는 모습을 설명할 때도 울지 않던 콩꽃할머니는 희한하게 일 년에 한두 번 아들집에만 다녀오면 우셨다.

방을 닦다가도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다가도 주름 패인 볼 가득 눈물을 흘려보냈다.


그런 할머니가 울던 이유를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퇴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콩꽃할머니는 영영 아들집으로 가버렸다. 분명 아픈 나 때문에 엄마는 된소리를 하셨을 테고 막연히 그 이유이겠거니 생각했다.

슬슬 사춘기가 시작되던 나는 동생과 같이 쓰던 방에서 벗어나 혼자 방을 쓰는 것이 마냥 기쁜 채로 상실 따윈 길게 느끼지 않았다.


간혹 동생이랑 성인이 된 후, 할머니 보고 싶다 얘기한 적이 있었지만, 내 나쁜 말들을 꺼내어 놓지는 못 했다. 나보다 더 어린 세 살 나이에 할머니와 살게 된 동생에겐 할머니가 더 큰 존재였단 걸 알고 있어서였다.




초등학교 4학년 실험관찰 중에 강낭콩 키우기가 있다. 뭐 키우기에 진심인 둘째가 어찌나 많이 심고 잘 가꾸었는지 한동안 우리 집 베란다에 콩꽃이 가득했던 때가 있었다. 그 많던 콩꽃이 지고 콩코투리가 생길 때쯤 잊고 있던 콩꽃할머니가 생각났다.



이제 그때의 콩꽃 할머니 나이가 된 엄마에게 물어봤더니 안타까운 마음에 몇 번 찾으러 아들 연고지에 가봤지만 끝내 못 찾았다고.


친정엄마가 없던 나의 친정엄마에게 콩꽃할머니는 친정엄마 같았었다고.. 같이 산 세월 그렇게 마음이 따뜻했다고..



이제 엄마가 요실금이 있을 나이이고, 내가 큰 기침하면 찔끔거리기 시작하는 중년이 되고 보니, 안 그래도 한 많고 사연 많았을 콩꽃할머니의 삶에 그냥 한정 없이 늙은 것도 속상했을 텐데 내 말이 얼마나 아팠을까.


살아보니, 나이 든다는 게 거창한 게 아니다.

그저 몰랐던 지혜 한 움큼 생기는데, 그 지혜의 8할이 뒤늦은 후회 한다고 미안했다고 인정할 수 있는 이해심 같다.



30년이 지나서야 콩꽃할머니를 아프게 했다는 것을 후회하고 할머니의 고되고 서글펐을 삶과 내 말에 가슴 아팠을 마음을 이해하는 거 그게 나의 나이 듦이다.


그리고 커다란 꽃다발에도 감흥 없다 작은 들꽃에도 환호하는 것. 그래서 올해도 7월, 콩밭에 어김없이 흐드러지게 필 콩꽃을 어여삐 여길 수 있게 되는 거. 그게 나의 나이 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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