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었다.
오전 6시부터 분주한 고교생의 어느 아침, 딸은 젖은 머리로 튀어나와 말했다.
"나 어젯밤부터 남친 생겼어."
목소리 톤이 까칠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이의 어투만 지적하고, 바쁘지 않았지만 바쁜 척, 출근해 버렸다.
마음이 좀 정리된 후, 카톡으로 물었다.
"아깐 미안했어. 너무 당황해서. 어떤 점이 좋아서 사귀게 되었는지 엄마도 궁금하구나."
어떤 점이 좋은지 궁금하다 썼지만, 사실 내가 당황한 포인트를 먼저 헤아려주기를 원했던 것 같다.
딸아이는 17세, 찹쌀떡처럼 말간 얼굴에, 오밀조밀 이목구비가 들어찬, 어미가 보기엔 예쁨이 넘치는 아이다. 거기에 160 조금 넘는 키에도 동양인 같지 않은 비율의 다리와 기다란 손가락, 오래 아팠던 그 몸으로 해내는 공부, 악기, 작문 실력 등은 엄마의 입장에선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돌아온 답은 역시나 내 당황함은 읽지 못했다.
대신 더 기분 좋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아이와 있으면, 내가 밝아져."
딸은 선천성 신장병으로 우유나, 고 나트륨, 합성식품들이 첨가된 음식을 먹으면 혈뇨를 눈다.
태어나 몇 달 안 됐을 때부터 아이의 오줌이 묻은 기저귀는 콜라색이었다. 내가 주는 젖을 자주 피오줌으로 내 보냈다. 병을 모르고 살았을 땐, 펑펑 나오는 젖을 거부하며 크지 않는 아이가 안타까웠지만, 훗날 아이의 병을 알게 된 후로는 본인을 아프게 했던 젖을 극구 먹지 않았던 아이에게 지금도 사과하고 싶어 진다.
너무 자라지 않아, 일찍 이유식을 시작하고, 간이 없는 음식들로 아이는 또래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
그 나날들 동안 죄인의 심정이었지만, 고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떠한 바깥 음식을 먹이지 못 한채, 케첩, 마요네즈, 빵, 흔히 사 먹는 모든 가공식품들을 손수 만들어야 하니 육체적 고난도 행군에, 아이 낳고 복직하고 싶었던 사회적인 나도 접어두어야 했다.
한살림, 생협 등이 번화가에 즐비한 요즘과는 다르게 아이의 유기농 식단을 위해선 발품 팔아 뛰어다녔었다.
이런 이유들로 아이는 또래들과 놀 때 제약이 많았다. 함께 놀다가도 집에 와서 간식을 챙겨야 했고, 바깥 음식을 먹지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 집에 놀러 가 짜장면을 시켜준 것을 보고 음식이 집으로 배달이 된 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며칠을 그 얘기만할 정도였다. 물론 아이는 먹지 못 하고 집에 와 천안까지 가서 구해온 무첨가 된장 맛의 짜장을 먹었다.
내 헌신을(헌신이라 말하기 뭣하다. 어떤 엄마라도 이리 했을 것이니, 하지만 달리 표현할 단어도 모르겠다.) 아이에게 강요하기 위해 장황히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 친구가 좋은 이유를 ‘내가 밝아졌다"했을 때, 내 기쁨의 이유를 설명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헌신이라 생각하는 시간 동안, 아이는 금욕의 시간을 견뎌냈을 것이다. 감히 상상가지 않는다.
밤이면 와인 한 잔 덜 먹기도 큰 절제심이 필요한 나인데, 모든 먹을거리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갖고, 그람 수까지 계산한 식단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급식표가 나오면 아이와 난 먹지 못할 음식을 형광펜으로 체크하고 냉장고에 붙여놓았다. 세월이 좀 지나니 아이는 이제 본인이 스스로 먹을 수 있는 음식과 아닌 음식을 체감하고 있었다.
본인을 장애 수준으로 느낄 때면, 더 큰 장애를 가진 주인공의 책을 읽어주고 아이를 단속시켰다. 늘 웃음이 많은 아이였지만, 17세에 비로소 밝아졌단 말에 그동안 밖에선 가식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 느껴 미안하고도, 첫 그 남친이 고마웠다.
하지만, 남친이 생긴 한 달 반 만에 나의 시간은 너무 생뚱맞다.
내가 차려놓은 저녁 대신 남친과 각종 것들을 먹고 들어온다. 음식들이 갈 곳을 잃고 내 안주로 전락하고 만다.
‘안아줘", "나랑 얘기하자" 던 딸은 없고, 남친과 통화 삼매에 문을 노크하기도 겁이 난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갑자기 내동댕이 쳐졌다.
뭘 먹었는지, 아이 컨디션을 확인해 보고 싶어 말을 붙이지만, 아이는 이 문제에 대수롭지 않은 듯하다.
피곤하면 신장에 좋지 않으니, 조금 자제하고 일찍 들어와 자자 말해 볼까 하지만, 새롭게 눈 뜬 사랑에 장사는 없다.
아이의 부재가 심해진 난, 한 달 정도, 예전 유행하던 첫사랑 발라드 가사를 들으며 엉엉 울기를 반복했다.
내가 이 아이만큼 누군가를 사랑해 보았던 적이 있었던지, 내겐 immortal love 아니었던가.
그러다 어린 시절 야하게만 느껴졌던 마돈나의 'like a birgin'의 you made me feel shiny and new 부분을 듣고 불현듯 아이를 이해해 보기로 했다.
I made it through the wilderness
somehow i made it through
Didn't know how lost I was until I found you
I was beat, incomplete
I'd been had, I was sad and blue, but you made me feel
yeah, You made me feel shiny and new
like a birgin
touched for very first time
like a birgin
아이에겐 지난 16년이 역경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해 낸 성과였을 것이고, 밝음을 찾지 못했다가 남자 친구를 만나고 길을 찾은 느낌이었을 것이라 상상해 보았다. 아프느라 슬프고 우울했지만 비로소 반짝이고 새로워진 느낌을 받았다고 말이다.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birgin이길 바라는 여자 부모의 마음이야 똑같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감정을 처음 느낀 딸아이가 상처를 덜 받기 위해선, 마음만큼은 birgin이 아니기를 바라본다.
그래서 오래도록 이 설렘을 익혀가 보면 좋겠다.
또 하나, 본인의 16년 억척스러웠을 병치레가 어쩌다 보니 이겨낸 성과가 아닌, 간혹 엄마가 곁에서 지켜주었었구나 인지해줬음 싶다.
남친과 첫 키스하는 날, 그 떨림을 간직할 수 있는 신체를 본인과 내가 함께 만들었다고 불쑥 나를 떠올려주진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