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안부를 묻지 않는 시간이 익숙해지는 게 두렵습니다.
늘 집에 없고, 바빠 통화 못 하는 남편이 익숙하지만 간혹 남편의 번호가 전화 화면에 뜨면 반갑습니다.
“오빠~”
다 늙어 없는 애교 섞인 돌고래 목소리를 두 글자에 담아보지만.
남편은
“늦어. 일이 많다, 돈 버는 게 힘드네. 아. 맞다. 나 담주애 열흘 출장이고…
몰랐어? 말 한 줄 알았는데.. 아 미안. 미안. 그 담주는 트레킹 잡혀있어. 화났어? 다 밥 벌이하려 애쓴다 생각해 줘. 암튼 기다리지 말고 자라고..”
오늘 사춘기 육아도 할 말이 많았는데, 몰랐던 새 일정에 뭐라 답할지 숨 고르느라 늦어진 내 대답에
“미안. 말한 줄 알았네. 돈 버느라 정신없었어. 암튼 잘 자요.”
‘뚜뚜뚜’입니다.
딸은 우울해서 좀 걸으러 나왔다 말하는데 누구를 만나는지, 왜 우울한지 물을 수 없습니다. 육하원칙으로 나열되는 지나친 내 관심이 독이 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진즉 놀러 나간 아들은 게임 때문인지 자꾸 전화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뭐 일 년의 반 이상은 집에 못 들어오는, 우스갯소리로 “우리 남편은 국적이 비행기야.”라 말하며 아줌마들 대화에서 남편과의 데이트 얘기를 요리조리 피했었던 정도라.. 남편과의 대화부재는 18년이 넘은 이야기라 치부해 보려 애썼습니다. 애썼던 시간도 이젠 다 추억 속 이야기입니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 이틀 머문 뒤, 또 삼 주 이런 식의 남편의 일정이 계속될 때면 희한하게, 남편이 공항에 도착해 한국 땅에 있다는 문자만 받아도 안정감이 느껴져 숨쉬기 편해지곤 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내가 부르면 올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안도감말입니다.
카톡으로
“오빠~”하면
시차 없이
“ㅇㅇ”이란
답이 찍히는 것에 대한 무한한 안정감이요.
그냥 뭐.. 이건 당연한 일과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재에도 안정감을 찾으려던 나에게 아이들의 사춘기라는 새로운 일과가 닥쳤습니다.
1-2년간 친구들만 찾으려 하거나, 엄마와의 대화가 거북한 아이들의 부재에 익숙해지려 노력하는 시간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녁시간이 늦었는데,
“넌 밥 먹었니? 하는 말에
”엄마는 밥 먹었어? 하는 말이 사무치게 (‘사무친다.’ 란 말은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표현된 것처럼 “너의 가슴속에 맺히고 싶다. “는 뜻 아니겠습니까.)
아이들이 가슴에 맺혔던 만큼 안부인사가 그립습니다.
남편한테 하소연해 볼까 잠깐 통화목록을 열어보지만, 버튼을 누르기 전,
“나 혼자 버는 돈, 애 아픈 병원비로 쓰잖아. 내가 노니?”란 애가 많이 아팠던 오래전, 감정이 격해져 싸웠을 때 들었던 말이 떠오릅니다.
버튼을 누르기 전, 화면을 닫은 건, 두 중년남녀 감정의 쓰나미를 예측해 미리 예방을 한 행동이니 나를 칭찬하고 싶습니다.
예전부터 제 육아 글을 읽으신 분들은 알겠지만, 저희 부부는 강요하는 공부를 시키지 않는다는 부분에선 최고의 파트너이자, 책이나 여행을 통해 세상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면에선, 부모란 우위에서 싸웠던 고지전 끝에 패배를 맛보고 이제야 화합을 위해 한 방향을 향해 선 동지가 맞습니다.
근데, 저 늙는 가 봅니다. 잠 못 들다 겨우 든 잠에서 옷을 다 적시는 땀에서 깨어나, 이불을 박찹니다.
2-3초도 안 되어 사시나무 떨 듯 오한에 떨다가 6월이 다 되는 요즘에도 전기매트를 틉니다. 내 몸의 변화에 놀라 얕은 비명을 지르는 밤이 지속됩니다.
호르몬 약을 먹고, 불면에 와인이나, 수면제를 먹고도 새벽은 괴롭습니다. 잠 안 오는 새벽, 불현듯 심한 내 녹내장이 떠오르면, 안압에 좋지 않은 눈물이 하염없습니다.
하지만 더 괴로운 건,
잠을 자지 못했어도. 잠결에 짜증이 담긴 대답이 돌아올 걸 알지만 “잘 잤어?” 토닥이며 묻는 아침과,
이유를 모르겠는 ‘쾅!’ 닫힌 문에 자꾸 고개가 떨궈지는 저녁,
그리고 다시 불면에 식은땀으로 깨어날 새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