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고1 딸의 고집으로 아이를 자퇴시키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유달리 나와 친밀했던 딸이 처음 남자친구가 생기고 많이 다툰 후, 소원해진 관계 속에 보낸 유학이라 불안장애가 왔다.
그 큰 땅덩이에서 길을 잃진 않을까.
안 그래도 신장이 안 좋은 아이가 미국식 음식을 먹으면 건강에 해롭지 않을까.
수업은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엄마표 영어를 시킨 나로선 더 걱정된 부분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불안이었다.
딸의 아끼고 사랑하던 드럼과 기타들, 전자피아노 등을 딸이 돌아올 때까지 먼지 한 톨 없는 모습으로 있길 바라며 광목천으로 감싸면서, 내 딸이 자신의 것이 없는 곳에서 잘할 수 있을지 불안에 휩싸인 눈물이 줄줄 흘렀다.
하지만 이렇게 걱정하는 나와 다르게 정말 기뻐하는 일인이 있었으니, 늘 누나보다 뒷전이었던 네 살 터울의 남자동생, 사내아이보다는 말괄량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애교가 가득한 아들이었다.
"외동아들이 된 것 같아, "
"누나가 없으니까 좋아, "
이 말들과 동시에 우리 집은 6학년 남자아이들의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둘을 키우던 엄마가 하나를 키우게 된 헛헛함과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친구들이 놀러 오면 미친 듯이 큰 손으로 간식을 해대고 자고 가라고 꼬드기곤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우선 남자아이들이 들어오면 고린내와 땀냄새가 안개처럼 집안을 자욱하게 감싼다.
가방을 제각각 던져놓고, 핸드폰 게임을 하거나, 티브이로 유튜브를 틀어 모두가 거북목 자세가 된다.
유튜브에서 간혹 "씨발", "존나"같은 표현들이 튀어나온다. 아들도 덩달아 웃으며 따라한다.
난 간식을 차리며 가만히 있는다.
아들이 슬며시 눈치를 보며 말한다.
"우리 욕 안 나오는 거 보자, "
우르르 친구들도
"그래 어머니도 계신데, 역사 유튜브 보자, "
금세 태세 전환이다.
첫째 딸아이 6학년 때, 놀러 온 친구들과의 동영상 시청에서 "씨발"이 들렸었다.
난 친구들 모두 모아놓고 훈계를 하고, 친구들이 돌아간 후에도 욕을 쓸 수는 있다. 하지만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어찌 부모가 들리는 곳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느냐고 한참을 설교했던 기억이 났다.
욕을 하는 친구들과는 놀지 말라는 말은 덤이었다.
거기에 엄마표 공부를 시키며 하루하루 계획을 세워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우리 집이 사춘기 초입 남자아이들의 아지트가 됐을 무렵,
유학 간 딸아이와 톡으로만 이야기하다 처음으로 통화를 하게 됐다.
"일주일에 한 번만 연락했으면 좋겠어요. 난 스스로 할 수 있어."
엄마 없이 잘할 수 있다는 아이의 말에 난 행복하지 않았다. 내 무한한 관심에서 벗어나고 싶은 성인이 목전인 아이의 외침으로 들렸다.
그럼 난 두 아이의 엄마인데 무엇을 달리 키웠는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난 딸에게 목수였던 것 같다.
내가 어떤 재료를 선택해야 하는지, 내가 만들고자 하는 것의 결과물에 주의를 기울였다.
항상 연필 하나를 귀에 꽂고 마음먹었던 설계에 맞지 않으면 눈금을 다시 긋고, 지웠다, 그렸다를 반복했다.
이 작품이 완성되면, 완벽하게 다른 것들과 어우러지며 튼튼한 가구가 될 것인지를 가늠했다.
정확성만을 내 육아의 동지로 삼았다.
난 아들에겐 정원사인 것 같다.
식물들이 잘 자라도록 보호하고, 시기적절할 때 물과 자양분을 제공한다. 땀이 흥건히 나는 힘든 노동은 기본이다. 기진맥진할 정도로 수없이 땅을 후비고 비료를 뿌린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태풍과, 기후변화들이 있음을 알고 좌절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난 지금도 9500KM가 떨어진, 낮과 밤이 바뀐 곳에 있는 딸의 위치를 조회한다. 밤 잠을 설치기 일쑤다.
3M 앞에 있는 아들에겐 밥 주고, 책 사주고, 간식 주고, 숙제검사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들은 혼자 숙제를 해 가고 매우 잘함을 받아온다.
딸에게도 정원사가 되어줄걸.. 후회해 보지만, 난 오늘도 유학 보낸 딸의 미래를 연필하나 귀에 끼고 재료의 인풋, 아웃풋의 개념을 들이밀고 자로 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