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한 주제 / 욕먹을 각오를 마치고 쓰는 지론
개봉 전부터 블랙워싱 논란이 일었던 인어공주 실사판 영화가 지난 5월 말 개봉했다.
30년 전(정확히는 29년 전), 하얀 피부에 붉은 머리칼을 한 에리얼을 보며 자란 이들은 검은 피부에 드레드 헤어의 인어를 반기지 않는 눈치고 웬만해선 디즈니를 옹호하는 열성 팬들 역시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개봉 이후, 우려는 현실이 됐다. 주인공 캐스팅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의 완성도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더니 급기야 제작사를 향하던 비난의 목소리가 해당 배우를 직격하기 시작했다. 영화에 출연한 남자 배우 중 한 명이 과거 동성애 포르노 영화에 출연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비난 여론은 갈수록 커졌다. 일본에선 주인공 역인 할리 베일리를 삭제한 포스터가 배포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블랙워싱, 과도한 PC주의로 인한 원작 훼손 논란이 제기된 건 인어공주가 처음은 아니다.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한 마블 인피니티 사가가 2019년 [어벤져스 : 엔드게임]과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으로 마무리되고 영웅들의 세대교체가 이뤄질 즈음부터 우려 섞인 목소리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시리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이언맨의 역할을 아이언 하트라 불리는 흑인 여성으로 대체하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PC주의'라는 비난에 직면한 것이다.
영화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아이언하트와 소니픽쳐스의 흑인 스파이더맨을 못마땅하게 보는 시선이 생겨났고, 그런 이들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매도하는 목소리도 덩달아 터져 나와 갈등이 시작됐다.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든다.
왜 그(백인)들은 블랙워싱을 계속하는가.
혹은, 왜 그(흑인)들은 백인문화에 편입되려 하는가.
미국은 51개의 자치권을 가진 state(주州)가 모여 구성된 연방국이다. state를 행정구역의 단위인 주로 번역하지만, 영단어 state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다
즉 미연방합중국은 51개 나라가 결성한,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더불어 사는 공동체라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만큼 문화 또한 다양해야겠지만, 실상 미국은 여전히 백인 문화가 주를 이룬다. 힙합과 재즈, 일부 스포츠종목에서 흑인 문화가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고 있고 그에 따른 시장 역시 발달했지만,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하는 분야에선 독립성을 갖추지 못한 듯 보인다.
백설공주와 피터맨, 그리고 인어공주와 같은, 소위 백인 문화로 일컬어지는 동화를 비롯한 영웅 서사에 흑인의 자리는 없거나 매우 좁았고, 그렇기에 흑인이 미국이라는 거대 공동체 안에서 소외감을 느끼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소외감을 해결하기 위해 본래 백인으로 설정된 캐릭터의 피부색을 바꾸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백인들이 앞장서 흑인들을 옹호하는 작금의 블랙워싱과 과도한 PC주의는 백인 우월주의가 기저에 깔린 가스라이팅의 일종으로 보인다.
백인은 자신들의 문화. 즉, 과거 흑인을 노예로 부리던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발전한 문화를 현재까지 향유하면서 그 일부를 염색하는 것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한다고 자위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문화 한 귀퉁이를 떼어내 적선하는 모양으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흑인 문화권조차 이런 블랙워싱과 PC주의를 반기는 분위기인데, 완벽하진 않지만 적어도 표면에 드러난 인종차별주의가 철폐 수순에 들어선 지금, 저마다의 특색을 기반으로 한 문화를 만들고 발전시켜야 할 적기(適期)이자 요기(要期)에 그간 오랫동안 대립관계에 있던 문화권이 제안하는 자투리에 만족하는 행태는 심히 우려스럽다.
흑인 문화권이 지금과 같은 태도. 즉, 스스로의 문화를 등한시한 채 주류 문화에 의존하려는 태도를 고집한다면, 흑인문화는 결국 백인문화에 편입될 것이고, 그 기간이 길어지면 필연적으로 정신적 말살을 맞이할 것이다.
2008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열풍이 전 세계를 휩쓸기 시작했을 때 한국인들 역시 캡틴아메리카와 아이언맨, 스파이더맨에 열광했다. 하지만 그 어떤 한국인도 한국인이 2대 캡틴아메리카가 되길 바라지 않았다. 카이스트에 재학 중인 천재 대학생이 아이언맨 슈트의 주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고,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맨이 대학로 자취방에 살며 테헤란로의 빌딩 숲을누비길 원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열렬히 콘텐츠를 소비할지언정 주체의식 혹은 주인의식이라 할 것을 잃지 않은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건 주체성을 띤 민족이 품고 있는 자존심이자 고유한 유산이 완고하게 중심을 잡아주는 덕분이요 인피니티 사가의 주인공 못지않은 한국의 영웅들과 요괴들이 도술을 부리며 저마다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덕이다.
이쯤에서 난 다시 그들에게 묻고 싶다.
왜 인어공주가 되려 하는가?
왜 알량한 피부색에 연연하여 주인의식을 버리려 하는가?
왜 같은 국기 아래에서 공동체를 구성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문화에 편입되려 하는가?
자신들만의 서사를 창작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기에 2023년은 모자란 때인가?
반성해야 할 쪽이 비단 어느 한쪽이라 단정할 수 있는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