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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톰양 May 16. 2017

역시나.오늘도.반짝

햇살이 좋아서 일요일이 좋았다.

매일이 특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매일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매일 즐거운 사람을 만나고,

매일매일 신나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매일이 그럴 수 없음을 알고 있고. 특히나 지난 일요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부스스 일어나 생각해보니 오늘은 일요일.

그냥 일요일이 아니고. 아무 일도 없는 일요일이다.

어제까지 피곤했고. 그래서 무작정 쉬기로 한. 그런 일요일이다.

그래도 뭔가 그저 그런 하루가 싫어

우남 씨에게 술을 먹자고 할까.

산책을 갈까.

서울 구경을 가자고 조를까.

오만가지 생각이 지나갔을 무렵, 거실에 드는 햇살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햇살을 바라만 보아도 왠지 마음이 따스해진. 그 순간이 마음에 들어. 마음을 바꿨다.

그래. 오늘은 아무 일도 없는 일요일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 감사하는 하루가 되어버리자.


그렇게 맘을 먹고 한참 햇살이 좋은 걸 보고 아차 싶어 세탁기로 향했다.

햇살에는 빨리지. 비록 하늘을 찌르는 미세먼지 수치에 바람은 포기해야 하지만.

그래, 햇살이 어디야. 평소에 햇살을 보지 못하는 날도 많은데라며

빨래를 가득 넣고 세탁기의 시작 버튼을 눌렀다.

햇살 향음 가득 머금을 빨래를 생각하니 괜스레 콧노래가 나왔다. 오늘은 시작이 좋은 걸?



얼마 전 여행에서 거북이를 보고 나서 여행 내내 거북이 흥분 모드로 지낸 적이 있다.

물속에서 수영하는 것도, 햇살에 누워있는 것도, 엉금엉금 기어가는 것도 너무 귀여워서 발을 동동 굴렀다.

당시 맘에 드는 것들은 다 거북이었다. 거북이 인형, 거북이 캔들, 거북이 마그넷 등등

그중에 나름의 기준으로 몇 가지 녀석들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햇살 좋은 일요일. 거북이 인형은 안방 문에 턱하니 매달리게 되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커피 맛이 탄 콩 맛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아니면 커피를 마시면 어른이 되어버릴 거 같은 공상 때문인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우남 씨의 앤틱한 핸드드립 세트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전략해버렸다. 모양새가 그럴싸하게 생겨 나름 커피보다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제격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사온 원두를 넣고 물을 따르는 순간 내가 잘못 생각했음을 알았다. 은은한 커피향이 주방에 퍼지는 순간, 핸드드립 세트에 미안했으며, 그 녀석이 이제까지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보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쯧쯧. 나의 가치를 모르고 이렇게 인테리어 소품으로 쓰다니.



커피를 따르고 나온 찌꺼기를 햇살에 말려 은은한 향을 간직해야지 싶었다.

그러기에 너무나 적당한 일요일의 햇살이었다.





한참 뒹글거리고 나니 어김없이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그래그래, 너에게도 시간이 된 거구나. 배를 달래며 냉장고로 향했다. 장을 보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냉장고가 풍성해서 좋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좋았던 건 엄마가 보내준 한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엄마가 음식을 바리바리 택배로 부칠 때마다 결국은 쓰레기가 된다며 화를 내곤 했는데. 오늘만큼은 엄마의 한치가 이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한치와 볶아 먹을 야채를 나열하고 나니 주방 창문으로 빼꼼 햇살이 비치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햇살이 잘 드는 곳이라는 것에 새삼 감사하고 신이 났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액션 영화도 코미디 영화도 좋지만 나는 애니메이션이 좋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지금의 나를 깨우치게 해주는 애니메이션의 한마디를 좋아한다. 모아나를 보면서도 그러했다.


나는 모투누이의 모아나. 당신 마우이는 나와 같이 테피티의 심장을 제 자리에 되돌려 놔야 해


그래 이것이 끝이었고 사실인 것이다.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내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렵지 않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애니메이션이다. 일요일이 어느 시간쯤 바다를 향해 떠날 거라는 모아나의 노래가 들려왔다.




별 다른 일이 없는 일요일이다. 빨래를 널고, 거북이 인형을 매달고, 집 밥을 해 먹고, 바다를 생각하고

어릴 적 일기에 쓸만한 소재가 없어 징징거렸던 하루와 별다를 게 없는 하루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하루의 끝자락에 생각해보니 햇살이 좋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그런 하루였다.


굳이 무얼 하지 않아도 되고, 굳이 무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가벼운 하루. 시간이 조금 지나 그때 내가 무엇을 했지 생각하면. 다른 건 희미해져도 햇살 하나는 좋았다고 어렴풋이 생각날 그런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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