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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 Jun 15. 2024

인생의 무게는 3대 250kg

모든 것은 내 나름


지난해 봄과 여름은 나에게 유독 추운 계절이었다.

살랑 부는 봄바람과 뜨거워진 여름빛에 설렘은커녕 괴로움만이 넘실댔다.

봄바람에 살이 아렸고, 찌든 태양은 숨 막히게 옥좨왔다.

나를 괴롭히던 공황장애가 다시 또 찾아온 건지,

무한 안갯속을 헤매는 생각의 꼬리들이 내면 깊숙이 못 박혀 비롯된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확실한 건 그때의 나는 지쳐있었고, 매일 눈뜨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길고 긴 밤 동안 무기력했고, 아침에 안방 창가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말이 소음이었다.


근육에는 나이가 없다


모든 것은 우연이었다. 어찌 흘러왔는지 알지 못한 채 접한 기사 하나.

80세가 넘은 선생님 한 분이 은퇴 후 20년이 넘게 운동에 헌신한 결과와 그 속에서의 깨달음에 대한 인터뷰였다.

어떻게 그 순간에 그 기사를 발견하게 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줄 한 줄 글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왈칵 눈물을 쏟아낸 것만큼은 선명하다.

특히 ‘근육에는 나이가 없다’는 선생님의 명언에서 뭔지 모를 울림이 전해졌다.

마음의 혼란을 틈타 찾아왔던 속절없는 방황이 나의 뼈와 살을 파고들어 괴롭히던 나날,

운 좋게 마주한 글이 마치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듯 ’나도 그랬어‘라고 위로의 이야기를 던지는 것만 같았다.

아주 미세한 파동으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불안한 시간에도 반드시 끝이 있다고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지만, 문득 나도 쇠를 들어보고 싶어졌다.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니 그럼 나도 선생님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건 아닐까, 싶다. 그러고 싶었을지 모른다.

분명한 건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 속에 정답이, 혹은 새로운 방향이 존재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지난 세월 동안 운동을 참 다양하게도 많이, 여러 번 시도했지만 일명 ‘쇠질‘이라 불리는 류의 것을 취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단 이 운동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있었다.

몸의 근육들이 잔뜩 커져 혹시 지금 내 몸에 머무는 살들이 울퉁불퉁 될 거라는 두려움(그게 쉽지 않은 건 나중에 알게 됐다),

고인 물들이 즐기는 그들만의 놀이, 또는 과시하기 위한 과시.

그 비슷한 것들로 점철돼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는 절대 그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었고, 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렸더랬다.


하지만 이런 편협하고 어리석은 생각은 운동을 시작하고 열흘 만에 사라졌다.

의외로 난 쇠를 드는 근육 운동이 너무 잘 맞았고, 또 잘했다.

새 회원 유치와 장기적 관점에서의 영업이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트레이너도 내 재능에 감탄하고 연신 칭찬을 쏟아냈다.

항상 새로운 것들을 배우면서도 뭔가 오랫동안 유지되거나 정착하는 경우는 잘 없었는데, 왠지 10년 뒤에도 난 계속 쇠질을 할 것 같았다.


지금 내 고민은 내가 들고 있는 원판 무게보다 가벼웠구나
보잘것없는 생각으로 나를 짓눌렀구나


그렇게 운동 1.5개월 만에 나는 헬스인들의 또 다른 목표 중 하나인 파워리프트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데드리프트가 뭔지 벤치프레스가 뭔지 몰라서 어리둥절의 연속이었다.

그저 트레이너의 가이드에 따라서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하고. 그렇게 이끌려 갔다.

이후 운동의 합이 맞아가고 있다고 여긴 순간부터 헬스장 가는 시간만큼은 뇌를 쉬게 했다.

예전에 한 프로그램에서 김연아 선수에게 “운동할 때 무슨 생각을 하느냐?”라고 물었었는데,

“운동을 할 때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라고 답하는 걸 본 기억이 있다.

힘들 때마다 김연아 선수에 빙의돼 그 답변과 같은 마음으로 임했다.


빈 봉을 들기도 벅찼던 시간을 지나 점차 원판이 무거워지다 보니 이상하게 더욱 선명한 무언가가 맴돌았다.

내가 운동을 하고 있는 그때만큼은 생각? 그것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쌓여가는 무쇠들 앞에서 내 머릿속 잡념들이 깃털처럼 여겨졌다. 어쩌면 내가 지금 하는 노력들이 뇌를 비우는 연습인 것은 아닐까.

복잡한 고민과 무거운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도 견뎌야 할 무게 이상을 들어 올려보면 꼬리를 물던 생각들이 말끔하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래,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단순해져 보자.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얼굴에 핏기가 없을 정도로 동태인간 상태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거울 속에 비치는 내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두 달이나 지났을까? 트레이너가 테스트를 해보자며 3대 측정을 했다.

첫 테스트에서 나는 3대 190kg를 기록했고, 이후 250kg 달성을 위한 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뚜렷한 목표가 생기고, 달성하려는 의지가 생기니 PT가 없는 날에도 알아서 개인 운동을 나가 주 5-6회 출석 도장을 찍었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새로운 운동법을 발견하게 되면, 주저 없이 트레이너에게 묻고 직접 해봤다. 오롯이 3대 리프팅의 역량을 높이는데 집중했다.

그렇게 세 번째 측정을 하는 날 3대 230kg를 달성했다.


아직도 잊지 못한다.

데드리프트 측정할 때, 늘 100kg 언저리에서 지긋지긋하게 움직이지 않던 바벨이 내 의지로 번쩍 올라왔을 때의 손 맛.

얼굴은 일그러지고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오직 나의 엉덩이와 허벅지, 근육에만 몰입한 결과를 마주하게 된 짜릿함.


비록 목표했던 250kg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나는 이 날 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오늘 무게를 들 때 교차했던 무수한 감정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감내해야 했던 수많은 감정 중에서 유일하게 측정이 가능한 것이라는 걸. 고로, 230kg의 무게를 차곡차곡 견뎌낸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무거웠던 마음의 기록임을 말이다.


그래, 어쩌면 내 인생의 어려움은 별거 아닐 수 있겠네.
몇 달 동안 이 무게를 들어 올리기 위해 처절했지만 괴로운 건 아니었으니까,
뭐든 고생한 만큼 나에게 보람과 행복 이상의 보상이 반드시 돌아올 거야.


해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 그리고 해봤기 때문에 알게 된 것.

이것만으로 운동에 매진했던 지난 9개월의 여정은 매우 가치가 있었다.

그간 들였던 시간, 노력, 인내가 제대로 빛을 발했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시도해보지도 못하고 주저하며 머뭇거리던 찰나에, 쓸데없이 머리로만 답을 내리고는 뒤늦게 후회한 적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만약 내가 헬스장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그리고 근력 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헬스장은 내가 갈 수 없는 곳이고 내 재능은 전혀 몰랐을 테다.


이제 난 답을 안다.

내 인생의 모든 건 내 나름이고, 앞으로 내가 견뎌내야 할 무게는 헬스장에만 존재한다는 걸.

그것만 기억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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