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월의 폭탄이 내게 준 깨달음
연말정산 폭탄을 맞고 아직 온전한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곧마흔의 소비에 대한 단상
2021년은 몸도 마음도, 정신력까지 힘들었던 시기다. 특히 소속감에 목매는 내게 소속이 불안정하다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었다. 의도치 않게 3번의 이직을 했고, 4번째 명함을 받아들였을 때의 절망감은 가히 입 밖에 꺼낼 수 없을 정도였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넘겼지만 매일 자존감이 무너져 내렸다. 겨우 멘털을 붙잡아 지금의 회사로 흘러 들어왔다. 그렇게 연말이 잘 마무리되는 듯싶었다.
그런데 올해 1월, 생각지도 못한 진짜 지옥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지만 당연히 환급을 받으리라 믿었던 연말정산이 폭탄이 되어 돌아왔다. 결정세액 7,343,176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숫자였다. 몇 번을 다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담당팀과 상담을 했지만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그저 예상하는 것으로는 이미 퇴사를 하면서 세금을 미리 돌려받았기 때문에 그 금액을 그대로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 받은 기억이 없는데요ㅠㅠ) 연봉이 많아서도 결코 아니다. 난 그저 평범한 소시민일 뿐.
그제야 내가 퇴직금을 받을 때 퇴직금 명세서를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곳 모두 퇴사할 때 별도의 문서를 전달받은 바가 없다. 심지어 첫 번째 퇴사에서는 퇴직금이 제대로 정산이 되지 않아서 추가 비용을 받는데 급급했고, 두 번째는 권고사직으로 인해 위로금을 받으면서 별도의 서류를 챙기지 않았다. 세 번째 퇴사는 한 달 만에 그만두었기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10년이 넘는 커리어 생활에서 몇 번의 퇴사로 충분히 단련이 됐다고 생각했건만 결과는 헛똑똑이였다.
심지어 나의 올해 소비는 예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근무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기간에 소비한 비용은 연말정산에서 정산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즉, 그때 내가 쓴 돈들은 말 그대로 '소비' 그 자체로 끝난 것이다. 생각해보니 연말정산은 '귀속 연말정산'... 급여소득에서 원천징수한 세액의 과부족을 연말에 정산하는 일을 의미하는.... 따라서 내가 직장을 다니지 않았던 3-4개월의 소비에 대해서는 1원도 공제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이직은 많이 했지만 회사를 오랜 시간 동안 쉬어본 적은 없어 전혀 생각도 못한 부분이다.
아! 주택담보 대출의 이자도 연말정산 공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단, 15년 이상 예치를 한 경우에만 공제가 가능하고 연말에 각 은행 사이트에서 별도의 신청 서류 없이 다운로드하여서 제출하면 됩니다. 이건 각자 챙겨야 하는 서류이니 꼭!! 공제를 받으세요........ 는 모르고 한 번도 못 받았던 1인.....
*자세한 것은 관련 사이트를 참조
결국 이 모든 무지렁이들이 쌓여 13월의 월급을 기대했던 2월에 연말정산 폭탄을 맞아 월급을 그대로 토해내야 했다. 한 번에 지출할 수는 없기에 3개월 분납을 신청했지만 월급은 반토막이 되어 버렸고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 올렸던 카드값은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게 명세서를 들이 밀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돈 때문에 전전긍긍했던 내가 안쓰러워 직장에 들어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나와 가족들에게 돈 쓰는 것을 아깝지 않게 여겼다. 자연스레 늘어나는 연봉만큼 소비 씀씀이도 증가했다. 혼자 살면서 더욱 헤퍼진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시작은 흘러 돈을 모으기는커녕 카드값만 증폭시켜 오기를 어언 10년이 지났다. 이제 쓸 만큼 써서 더 이상 쓸 것도 없다고 판단해 남은 10년은 열심히 돈을 모아서 노후를 준비하자는 생각으로 2개월 전부터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데 이런 변수가 생길 줄이야. 본의 아니게 제대로 긴축재정이 시작됐다.
다행히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니 삶의 방식이 보다 선명해졌다. 무엇보다 갑작스럽게 큰돈이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니 융통할 현금이 부족할 때의 비참함이 뼈저리게 느껴지면서 앞으로 10년 동안의 나의 경제생활에서의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게 무언지 확실히 알게 됐다.
이제 "장바구니에 물건이 담겨 있는 게 너무 싫다"는 이유로 필요 여부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결제부터 했던 나는 사라지고 필요한 물건만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결제 직전 삼고초려한다. "있으면 쓰게 되어 있어"하며 일단 사고 필요 없으면 나눔을 하던 나도 사라졌다. 함께 식사를 할 때 서로 얼마 내는지 계산하고 신경 쓰는 게 싫어서 "그냥 오늘은 내가 낼게"하며 카드부터 들이대던 나는 당당하게 1/N을 외친다.
사실 나의 경제관념에 대한 잔소리는 수도 없이 들어왔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오히려 얄밉도록 돈을 쓰지 않는 친구가 어느 날 집을 사고, 혹은 할부 없이 차를 사는 것을 보면서 '의리 없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돈이 많은 것을 아는데 소비에 인색한 것에도 '있는 놈이 더 한다' 여긴 적도 있다. 마음속으로 지은 나의 어리석음을 반성하는 바다.
아무튼 이번 2021년 연말정산 이벤트는 한낱 웃어넘길 에피소드일 수 있지만 나에겐 다가올 마흔 살을 앞두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된 경험이다. 현실은 그 어떤 것보다 공포스럽다는 것을 알게 된. 과시와 욕망을 채우기 위한 소비는 내게 없다. 2021년의 연말정산은 내게 소비를 다시 정의하게 했으니 적어도 내일의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10년 뒤 노후 준비를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