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이었나. 엄마가 암 선고를 받고, 10일 동안 병원에서 간병을 하다가 동생의 교대로 회사를 처음 출근했던 날이었다. 1월 1일에 엄마의 병을 알았으니 새해 들어 첫 출근이었다. 오랜만에 사무실에 앉아 밀린 업무들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목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역류성 식도염이 다시 도진 걸까. 병원에서 제대로 못 먹다가 자기 전 배고픔에 뭘 먹었던 게 화근이었을까. 침을 삼킬 때마다 목이 답답하고 아프지만 밀린 일이 많아서 간신히 참아냈다. 주말에는 병원을 한 번 가봐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일을 마치고 퇴근 버스에 올랐다. 그날 밤에는 동생이 대신 엄마 옆에 있어주겠다고 집에 가서 편히 쉬라고 연락이 왔다. 그래도 엄마 얼굴은 보고 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병원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한 5분쯤 버스에 있었을까. 갑자기 숨이 턱 막히더니 머리가 핑그르르 돌면서 어지러웠다. 이렇게 있다가는 진짜 숨을 못 쉬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의지할 것이라고는 버스 기둥뿐이었다. 당장 버스에서 내려버리고 싶었는데, 2~3 정거장만 더 가면 엄마가 있는 병원에 도착하니 참아보자는 마음으로 버텼다.
버스에서 내려 병원 앞을 서성이다가 병실을 가려던 그때,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엘리베이터에 지금 올라서면 진짜 죽을 것 같았으니까.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서둘러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에 들어서자마자 의사에게 역류성 식도염인 것 같다고 약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의사가 듣고는 몇 가지 검사를 하더니 역류성 식도염이 아니라고 했다. 증상이 어떠냐고 묻길래, 침을 삼키면 목에 뭔가 걸려있는 것 같고 속이 답답하고 숨을 못 쉴 것 같다고 말하자 '혹시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냐?'라고 물었다. 엄마의 상황을 이야기하니 의사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공황장애 초기 증상인 것 같아요. 일단 약을 좀 드릴 테니 드셔 보시고,
1시간 내로 괜찮아지면 내일이라도 정신과를 꼭 방문해 보세요"
공황장애. 생전 내가 살면서 경험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나와는 관계없는 병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아픔이 나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 병이라는 두려움이 나를 옭아매는 것 같다고 했다. 자세한 내용은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라고.
다음 날, 출근을 핑계로 회사에 나와 오전 내내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병원에 상담을 예약했다.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무서운 감정과 혼자 짊어져야 하는 짐들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면서 눈물을 한 바가지 흘렸더니 그것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아, 이래서 다들 정신과 상담을 하는 거구나'하고 생각했다.
약 15분 정도의 상담 후 의사는 나에게 "어머니 병은 솔직히 앞으로가 더 힘들어질 거예요. 그래서 지금 약으로 버티셔야 해요."라며 약을 권유했다. 약을 먹고 싶지 않다고, 그러다가 약에 의존하게 되면 엄마가 진짜 힘들 때 제가 무너질까 봐 무섭다고 하니 그럼 약을 서서히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하자고 했다. 그렇게 내 인생 첫 정신과 약물 치료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약을 먹고 너무 졸리고, 정신이 몽롱해서 힘들었다. 그래서 의사에게 이야기해 안정제를 빼고 약을 먹었다. 그래도 졸린 건 계속됐지만 마음의 안정은 찾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새벽에 내가 잠에 취해서 엄마 혼자 응급실에 가는 소리도 듣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아침에 내가 출근해야 되니까 혹시라도 깰까 봐 살살 다녀왔다고 하지만 우리 집이 100평이 되는 것도 아니고 현관문 소리를 못 들을 정도로 잠이 드는 것이 말이 안 된다. 더군다나 내가 유일한 보호자인데.
나는 매주 상담 때마다 약을 줄이는 방법을 물었고, 돌아오는 답은 늘 똑같았다. "앞으로 더 힘들어질 테니 지금은 약으로 버티세요." 잠에 취해서 엄마가 진짜 아플 때 못 일어날까 봐 무섭다고 하니 오히려 "불안증이 심해져서 그럴 수 있으니 약의 용량을 늘려보는 게 어떨까요?"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나를 안심시켜줘야 하는 의사인데, 왜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신과 치료의 일부분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였다. 허나, 집에서는 엄마 몰래 약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없던 불안증도 생길 판이었다. 그래서 의사가 권유하는 대로 약을 먹지 않고, 임의대로 3번 먹을 약을 2번만 먹고, 2번 먹을 약을 1번만 먹으며 용량을 줄여나갔다. 물론 내 상태를 봐가면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해외 출장 준비로 매일 야근을 하던 시기에 일이 터졌다. 오전에 행사가 있어서 준비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시뻘건 피가 다리 밑으로 쏟아지는 것이다. 하혈을 한 것이다. 엄마는 하얗게 질렸고, 나는 너무 당황해서 엄마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생리대를 2겹 정도 차고 산부인과를 가보니 약물 부작용이라고 했다. 내가 지금 먹고 있는 정신과 약이 산부인과에서는 부정출혈을 유발하고 자궁에 부작용을 일으키는 약물로 학계 보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 다니고 있는 정신과에 가서 이 점을 이야기하고 같은 성분의 다른 약으로 바꿔보라고 했다.
엄마 몰래 정신과 약을 먹는 것도, 정신과 약이 부작용을 일으킨 것도, 갑자기 하혈을 한 것도... 어느 것 하나 당황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혼란의 연속이었지만 그런 혼란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반드시 해결해야만 했으니까.
8번? 9번째 상담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정신과를 다시 찾았다. 2주 뒤에 해외 출장을 가야 하기 때문에 비행기에서 먹을 수 있는 안정제를 받고, 산부인과 진료 내용을 이야기해 약을 바꾸면서 용량을 줄일 심산으로 병원에 갔다. 병실에 들어서니 그날따라 의사가 정신없어 보였다. 하지만 별일 아니라고 생각해 자리에 앉아 준비했던 이야기들을 꺼냈다.
나 "제가 며칠 전에 갑자기 하혈을 해서 산부인과를 갔는데, 거기서 000이라는 약이 부정출혈이나 자궁에 영향을 미친다는 학계 보고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산부인과에서 같은 성분에 다른 약으로 바꿔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하던데. 혹시 가능할까요?"
의사 "대체 어느 병원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뭐 알고 그러는 거예요?"
순간 당황스러웠다. 내가 못할 말을 한 거는 아니라고 생각했고. 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도 아닌 듯한데. 이 의사는 나에게 왜 화를 낼까? 혹시 내가 잘못 전달을 했나? 다시 한번 정중하게 설명을 했다.
나 "아, 그 약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그런 학계 보고가 있다고 하는데... 제가 어쨌든 하혈을 했잖아요. 이 상황에서 계속 그 약을 먹는 게 산부인과에서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의사는 말했다.
의사 "그니까 산부인과에서 뭘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고요?"
뭐가 잘못된 걸까.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 "그냥 약을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난번 약이 아직 남아있으니 출장 때는 그걸 가져갈게요. 그리고 다다음주에 저 비행기 타고 유럽을 가야 하는데 그때 비행기에서 먹을 안정제라도 받을 수 있을까요?"
의사 "아니 앞으로 어머니 더 안 좋아지실 거라니까요? 약을 지금 줄이면 어떡하시려고요?"
나 "그러니까. 엄마가 더 안 좋아질 수 있는데 계속 약이 이렇게 이상반응 보이고 부작용이 생기면 엄마는 누가 케어 하나요? 제가 버텨야 하는데요. 그러니까 약을 줄여서라도 스스로 버틸 수 있도록 해야죠."
의사 "지금 본인 감정 제어도 못하시면서 약을 줄이신다고요?"
듣다 보니 화가 치솟았다. 엄마의 안위를 마음대로 제단해 버리는 것도 화가 났고, 환자가 부작용을 겪었는데 나 몰라라 하는 것도 화가 났다. 또 약을 줄이고 싶다는 얘기를 몇 회에 걸쳐서 하는데도 용량 늘리기만 이야기하던 의사의 태도에도 화가 났다. 무엇보다 처음에 내가 병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은 태도로 맞이하는 모습이 생각나면서 순간 언성을 높였다.
나 "지금 제대로 상담을 하고 계시는 거 맞나요? 부작용이 있다는데도 아무 조치도 없고, 약을 줄이겠다는데도 늘리라고만 하고. 이게 무슨 상담입니까?"
그러자 의사는 나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의사 "이제 보니 환자 분은 분노조절장애도 있으시네요. 공황장애, 우울증에 분노조절까지 있으시면서 약을 줄이시겠다고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여기에 갖다 바친 상담비와 약값이 너무 아까웠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그대로 병실을 뛰쳐나왔다.
그날 밤, 메일이 한 통 날아왔다. 그 의사였다. 내용인즉슨, 산부인과 의사의 말이 무책임하게 느껴져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도착하기 전 오후 진료가 시작됐을 때 병원 전산망의 문제로 업무가 밀리다 보니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의사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나 때문에 화가 났다는 내용이다. 산부인과 의사보다는 본인이 더 무책임해 보이고, 의사가 환자를 신뢰하지 않는 게 더 문제라고 생각되지만 아마도 본인은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답장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볼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굳이 답장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지금까지 약을 먹지 않고 있다. 중간에 잠깐 힘들어서 찾았던 병원에서도 상황을 듣더니 약보다는 안정제를 들고 다니면서 힘들 때 한 알씩 먹으라고 권유했다. 그때 받은 안정제는 여전히 내 가방의 필수품이지만, 먹는 일은 거의 없다. 엄마의 장례식이 끝났 후에도 나는 약을 먹지 않았다.
어쩌면 그 의사도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니겠지. 이유가 있었을 거야. 몇 번을 되뇌고 되뇌었다. 하지만 내 속 마음을 처음으로 털어놓고 또 위로가 될 것이라 기대했던 사람에게 받은 배신감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때 이후로 상담 관련 책을 정말 많이 읽었던 것 같다. 나에게 왜 그랬는지 알고 싶어서.
답은... 모르겠다. 왜 그랬을까. 직접 이유를 들었지만, 당신의 직업을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