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10%만 빛나면 나머지는 어디로 가는가?
야구장 담장 앞에 세 사람이 있다.
모두에게 똑같은 크기의 상자를 주면 키 큰 사람만 경기를 볼 수 있다. 하지만 필요한 만큼 상자를 나누어주면 모두 경기를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 평등과 공평의 차이다. 우리는 흔히 '모두에게 똑같이'를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똑같이 나눈다고 해서 모두에게 공정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평균보다 높고 어떤 이는 평균보다 낮다. 모두를 같은 잣대에 세우면 다수는 여전히 담장 너머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정의는 공평, 곧 필요한 만큼 나누는 데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정의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진짜 정의는 어디에 있을까?
얼마 전 들었던 최재천 교수님의 강연에서 그 해답의 한 조각을 만났다. 책에는 담지 못했던 말이라 했는데 내게 오래 남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사실은 정규분포의 가운데에 있는데…
왜 우리는 늘 키 큰 사람에게 약자를 챙기라고만 할까요?
중간에 있는 다수가 조금 더 양심적일 수는 없을까요?"
그 말이 마음속에 오래 머물렀다. 사회에서 중간은 왜 늘 침묵하는가. 왜 다수의 자리에서 더 양심적일 수는 없는가.
10대 시절, 성적표에서 5등급은 흔히 '쓸모없다'는 말과 연결된다. 2025학년도 기준 수험생은 약 46만 명. 서울 소재 대학 전체 입학 정원은 약 4만 5천 명이다. 그 가운데 스카이에서 건동홍까지 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학을 합쳐도 4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숫자로 환산하면 전체의 고작 10% 남짓. 모두가 미치도록 노력하고 코피 터지도록 달려도 그 노력이 모두에게 보상되지 않는다. 단 10%만이 원하는 대학의 문턱을 넘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90%는 실패자인가?
포뮬러 원(F1) 경주를 떠올려 보자. 늘 챔피언이 되는 건 메르세데스, 레드불, 페라리 같은 초거대 팀이다. 이들은 한 시즌에 수천억 원을 쏟아붓는다. 반면 중위권 팀들은 그만한 자금도 장비도 부족하다. 그런데도 그 치열한 무대에서 꾸준히 중간을 지킨다. 꾸준히 중간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평범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극한의 경쟁 속에서 자기 자리와 속도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F1에서 중위권을 지키는 게 놀라운 성과이듯 성적표의 5등급도 결코 하찮지 않다. 그것은 이미 치열한 경쟁을 통과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학창 시절 우리는 그 꾸준한 5등급을 성적으로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친구의 이야기를 하자. 스물아홉 살, 그의 통장에 매달 찍히는 금액은 230만 원. 그는 늘 자책한다. "왜 나는 이것밖에 안 되나." 그러나 2023년 통계청 자료에 비추면 그 또래의 월 중위소득은 세후로 따지면 정확히 그쯤이다. 그는 지극히 평균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사회가 그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잠깐, 중위소득은 평균소득과 다르다. 평균소득은 모든 사람의 소득을 다 더한 뒤 사람 수로 나눈 값이다. 그런데 몇몇 사람이 아주 큰돈을 벌면 평균이 확 끌어올려진다. 예를 들어 반에서 29명은 1천 원씩 갖고 있는데 단 한 명이 100만 원을 갖고 있다면 평균은 3만 원이 넘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이 1천 원밖에 안 가진다. 즉 평균소득은 한두 명의 큰 숫자에 쉽게 끌려가는 편향된 데이터다.
반대로 중위소득은 사람들을 소득 순서대로 세웠을 때 딱 가운데에 있는 사람의 소득이다. 마치 반 아이들을 키 순서대로 세워 가운데 친구를 고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중위소득은 우리 삶의 현실을 더 정확히 비춘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3년 30대 초반의 월 중위소득은 323만 원. 세후로는 약 270만 원이다. "월 300은 벌어야 한다."라는 말이 흔히 오가지만 실제로는 그 경계에 닿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언제 가능할까?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세후 320~340만 원 수준이다. 대한민국에서 월 300을 버는 삶은 40대 중반 이후의 이야기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 그 경계에 도달하지 못한 청춘들에게 끝없는 자책을 요구한다.
나는 수학교사다. 입시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가로막혀 매일 수능 문제를 풀어주지만 이것만큼은 꼭 가르치고 싶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정확히 보는 눈. 양심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수학은 그 눈을 길러주는 도구다. 평균과 중앙값을 배우며 데이터는 언제든 편향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정규분포를 배우며 다수가 모여 있는 가운데가 결코 하찮지 않음을 알게 한다. 5등급은 실패가 아니다. 사회를 떠받치는 자리다. 세후 월급 230만 원은 보잘것없는 금액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이들이 그토록 살아가고 싶은 평범한 하루다.
실제 평균적인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상위 10%의 삶이 평균인 것처럼 꾸미는 사회가 문제다. 정규분포의 두터운 몸통처럼 사회와 삶을 지탱하는 힘은 언제나 그 다수에게서 나온다. 사회의 공기도, 학교의 분위기도 결국 중간에 선 다수의 힘에 달려 있지 않은가.
학생들이 5등급이란 숫자에 갇히지 않기를. 그리고 언젠가 그 5등급이란 경계를 넘어 스스로의 양심으로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