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재윤 Oct 12. 2024

교실 속 이기주의자들의 연대

S의 또박또박한 쪽지의 글씨가 그토록 뭉클했던 이유는

  흑백 요리사. 이 예능이 넷플릭스에 최근 신작으로 나왔을 때 인상을 찌푸렸다. 또 경쟁이구나. 랩 실력이 별로면 사람을 불구덩이 속에 처박았으며 솔로면 지옥에 떨어트리고 커플이면 천국에 보내는 것에 성이 안 찬 모양이다. 볼 마음은 없지만 주변에 온통 흑백요리사 이야기뿐이라 소위 "문찐(문화찐따)"이 되기 싫어 아득바득 보고 난 후에 경쟁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의외로 눈물이 글썽였던 장면이 두 번이나 있었고 그중 하나는 내 기억이 맞다면 7화의 첫 장면이다. 자존심과 개성이 강한 유명 요리사들을 흑과 백으로 나뉘어 팀전 경쟁을 펼치는데 100인의 심사위원의 평가에서 무명의 요리사들만 모아둔 흑수저팀이 요리계의 거장들만 모아둔 백수저팀을 꺾고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그때 철가방 요리사(가명) 중식을 요리하는 분의 소감을 가져왔다.

  여경래 사부님(여경래 셰프는 중식 업계에서 우상과도 같은 존재다.)과의 1대 1 대결에서 이겼을 때는 눈물이 안 났었는데 지금은 말이 잘 나오지 않네요. 모여서 힘을 합쳤는데 결과가 이렇게 좋아서 눈물이 나오는 거 같아요.


   위 말은 곧 "께 협력하여 얻었을 때의 기쁨이 경쟁을 통해 얻은 성취감보다 더 보람되다."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저 한 사람의 개인견해일 뿐이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과연 그럴까? 듀크대학교에서 진화인류학, 심리학, 신경과학과 교수를 맡고 있는 브라이언 헤어 교수는 그의 저서 <다정한 것들이 살아남는다>에서 "적자생존을 통한 경쟁방식은 틀렸고 진화의 생존자는 다름 아닌 친화력을 바탕으로 한 다정한 자."라고 말하며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세상을 바꿔온 인류의 진화과정에 대해 서술한다. 그의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을 그대로 가져왔다.

  호모 사피엔스를 번성하게 한 것은 바로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인 친화력이다. 우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누군가와 하나의 공동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함께 일할 수 있다. 처음 동물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경쟁적 속성에만 집중한 나머지 의사소통 능력이나 친화력이 동물뿐 아니라 우리의 인지 발달에도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상대를 조종하는 기술, 속이는 기술의 향상이 동물계의 진화적 적응력을 설명해 주는 근거라고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발견한 것은 똑똑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타인의 의도나 욕망, 감정 등 인간에 대한 이해와 기억력, 전략능력이 아무리 고도로 발달하더라도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과 결합하지 않으면 혁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다정한 것들이 살아남는다> "살아남고 진화하기 위해서"에서 발췌.

 

  철가방 요리사가 흘린 눈물은 어쩌면 협력을 통해 얻은 해방감일지도 모른다. 그는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도태되는 적자생존의 상황에 던져졌다. 여기서 누군가를 쓰러트리고 짓밟아야 생존한다. 그는 중식업계에서 최고로 강한 자를 쓰러트렸지만 그것을 통해 얻은 기쁨보다 당장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더 컸을 것이다. 경쟁을 통해 얻은 승리는 무한 경쟁으로부터 영원한 해방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언제, 누가 자신을 쓰러트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그들과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끼리 살아남기 위해 연대한다. (연대란 단어로 표현한 이유는 팀이 패배하면 전원 탈락이라는 공동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죽더라도 나와 운명을 함께하는 공동체가 있으니 탈락은 두렵지만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와 함께한 팀은 끈끈한 결속력으로 대단한 성과를 보여준다. 브라이언 교수님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협력을 갖춘 사람들이 밀도 높게 결집했을 때 뛰어난 기술을 발명한다. 다른 똑똑한 인류가 번성하지 못할 때 호모 사피엔스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협력에 출중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 삶을 비춰본다. 10대 시절 우린 무한경쟁이란 불구덩이 속에 내던져졌다. 우린 "폭염에 복면 쓰고 불구덩이 속에 처박힌 내 기분을 니들이 아냐?"라고 소리친 마미손의 대답에 당연히 "Yes."라고 대답할 수 있다. 어렸을 때 받았던 교육을 떠올려보자. 끝없이 계속되는 경쟁은 누군가와 연대하기보다 어떻게 해야 뒤처지지 않고 승자가 될지 고민하도록 만든다. 경쟁으로부터의 안도감 혹은 해방감 중 어떤 단어가 우리네 삶과 어울리는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이 사실은 친화력을 바탕으로 살아온 호모 사피엔스의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임이 명백하다.


  방과 후 시간, 고2 학생들에게 엽떡을 사주며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바로 옆에서 들은 적이 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가 되면 고3으로 올라가기 전 인문계 대학에 진학할지 아니면 직업반으로 가서 특성화고에서 교육을 받을지 선택하는 순간이 온다. 직업반으로 가는 학생이 많을수록 상대평가의 1등급을 받을 수 있는 인원수가 줄어든다. 그렇기에 상위권 학생들은 직업반으로 가는 학생들이 그리 갑지 않은 모양이다.


  그들은 "OO이가 직업반으로 간다는데 그러면 1등급 인원이 8명에서 7명으로 줄어드는 거 아니야?", "가지 말라고 누가 이야기좀 해봐. 어차피 직업학교는 텃세 심해서 적응 못하고 돌아올 텐데." "3학년 1학기 때 여기 있다가 가면 안 되나?", "아 짜증 나! 안 그래도 누가 전학 가서 1등급 인원이 줄어든 판에 10명이나 나가버리면 어쩌라는 거야." 등등의 대화내용을 듣고 있자니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들에게 있어서 직업반에 가는 학생들은 내 점수를 깔아주는 존재? 아니 어쩌면 "존재"라는 고상한 단어로 표현하기보다 "알바나 쓰자."는 말처럼 하나의 인격체를 물건처럼 모욕하는 행위 었을지도 모른다.

  

  교사로서 그들을 나무랐어야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화보다 슬픔이란 감정이 몰려왔다. 친 세상 탓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을 누군가를 무한 경쟁 속으로 내몬 잘못된 시대 탓이다. 그 세상으로부터 학생들을 지켜주지 못한 어른들의 잘못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을까. 그들을 정죄하기보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품어줄 수는 없을까. 수업시간에 함께 협력하여 모두가 보상을 얻는 활동을 기획하기로 결심했다. 제발 딱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시험을 치를 때마다 매번 안도하는 이들에게 아주 잠시 숨을 돌리는 경험을 해보는 거다. 교실 속 이기주의자들이 연대한다. 이러한 경험이 단 한 번이라도 있다면 앞으로의 삶이 그리 절망적이지만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반에서 수학에 흥미 있어하는 5명의 조장을 모집했다. 조장들에게 조원들을 직접 픽업하는 방법으로 조를 구성했다. 적게는 3명 많게는 5명의 조원이 모였다. 그들에게 미션을 줬다. 진행방식은 다음과 같다.

1. 수학 문제 5문제를 조원들과 함께 해결해 보자.
2. 풀이가 완료되면 조장이 손을 들고 나에게 "다 되었어요!"라고 말한다.
3. 조원들 중 무작위로 한 명에게 질문하여 내게 1대 1 발표를 하도록 할 것이다.
4. 통과하면 조원들은 전체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쿠폰 1장을 받는다. 이는 협력을 통해 얻은 보상이다.
5. 만약 통과하지 못하면 지목받은 조원은 문제를 다시 고민하고 재도전의 기회를 얻는다.
6. 쿠폰은 차후 "대포알 번호 뽑기"를 통해 번호에 해당하는 맛있는 간식을 수령할 수 있다.


   고등학교 교실엔 수포자가 참 많다. 인수분해를 할 줄 모르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분수의 통분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학생도 있다. 그런 학생에겐 50분 동안 한 문제만이라도 해결해 보자고 제안했다. 하기 싫다고 그만둘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옆 친구에게 "지수법칙이 뭐지?, 인수분해는 어떻게 하는 거니?"라고 묻는 모습을 봤다.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만 하면 모두가 맛있는 간식을 먹을 수 있다는 확신과 더불어 아주 작은 확률이지만 엽떡 혹은 치킨을 먹을 수 있다는 기덕분일 것이다.

 

    S라는 학생이 있다. 수학 수업 시간에 내내 졸던 학생이지만 조별 활동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한 문제를 풀기 위해 40분 동안 고민하며 풀이 방법을 고민했다. 교과서 38페이지 중단원 마무리 1번 문제. 수학을 공부한 학생이라면 10초 남짓 아무리 길어봤자 30초 만에 풀어버릴 수 있는 간단한 문제에 불과하다. 그러나 S에겐 모두의 기대가 걸린 엄청난 과제였을 것이다. 삐뚤빼뚤한 숫자를 써가며 천천히 풀이를 익히는 S의 노력이 참 기특했다. 그 노력에 기꺼이 보답해주고 싶어 S의 이름을 불렀다. "S가 대표로 발표해 볼까?" S는 살짝 떠는 목소리지만 차분히 자신의 풀이과정을 설명했다. 조원들의 환호와 박수소리가 터져 나온다. S가 글썽거린다. 난 S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S야. S가 열심히 노력해 준 덕분에 조원들 모두가 함께 간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어. 너로 인해 모두에게 기쁨이 돼줬어. 정말 고맙다.


    사람은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할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 사소하더라도 나를 통해 세상이 조금 나아졌다고 느낄 때 혹은 누군가에게 자신이 필요로 한다고 여겨질 때 말이다. S는 감격스러운지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떡해(눈물을 글썽거리며) 나 살면서 이런 경험 처음 해봐." 집에 와서 S가 했던 말을 곱씹어봤다. 지금까지 학교 생활을 해오며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 경험이 처음이었다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상황이 안타까우면서 화가 나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든다. S의 입장이 되어 학교 생활을 묵묵히 되짚어 봤다. 수업시간에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1교시에 깜빡 잠들었다면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일어나는 일은 일상이 돼버린 지 오래다. 어차피 내가 교실에서 사라져 버려도 누군지 모를 거란 허탈감과 무기력함이 공존하는 상태. 살아남기 위한 경쟁에서 도태되어 스스로 쓸모없어졌다고 자신을 탓했을 것이다. 그런 이에게 필요한 건 다름 아닌 연대였다.




   조별활동이 끝난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미분계수에 대한 개념을 설명할 때 S는 다시 꾸벅 졸기 시작했다. 입시 경쟁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S의 삶 전체를 바꾸기란 힘든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교실 속 이기주의자들에게 받은 연대는 작지만 앞으로 살아가는데 버팀목이 될 거라 믿는다. 그날 S는 늘 적막했던 교실 속에서 잠깐의 해방감을 누렸으리라. 수업이 끝날 때 즈음 S에게 쪽지를 받았다. "선생님 매번 수업시간에 자꾸 졸아서 죄송해요. ㅠㅠ" S의 정갈하고 또박또박한 글씨가 적힌 쪽지가 그토록 뭉클했던 이유는 앞으로 S가 보여줄 삶의 모습이 그리 허탈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행복한 기대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개구리 선생님의 슬기로운 교직생활 #0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