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초래한 변화의 시작
장강명 작가의 『먼저 온 미래』가 식자(識者) 층 사이에서 조용히 화제다. 바둑 분야를 주제로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바꿔 나가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은 최고 바둑 고수가 AI가 되면서 수천 년간 이어져 왔던 ‘룰’ 혹은 ‘관습’ 등이 판이하게 변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 고수들이 믿어왔던 신념이 무너지고 ‘기풍’이 사라졌다고 한다. 아쉬워하는 이도 있고 환영하는 이도 있다. AI 시대 어떻게 적응하는지가 ‘바둑 프로’로서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AI 바둑의 등장은 한중일 중심의 세계 바둑 질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미국과 유럽 등 바둑의 불모지에서도 AI 바둑 스승에게 사사받은 고수가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왜 한중일이 바둑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을까. 이는 ‘왜 유럽은 축구를 아시아 국가들보다 잘하나’라는 의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바로 수천 년간 누적된 인적 자원 시스템 때문이다. 고수가 있고 체계화된 도제 시스템이 있는 곳, 다시 말해 ‘수준 높은 인간 네트워크’가 있는 현장에서 자라는 ‘어린 영재’들이 고수로 자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이른바 ‘정보 격차’와 ‘시스템’, ‘인적 저변’의 차이가 지역 간 격차를 낳는다.
AI는 이런 격차를 크게 줄여버린다. 만약 바둑 고수를 꿈꾸는 유럽의 작은 소년이 있다면, 굳이 한국이나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올 필요가 없다. AI 바둑 고수를 상대로 배우면서 두기만 하면 된다. 특히 AI 바둑 고수는 지치지 않는다. 짜증도 없다. 체력만 되고 열정만 있다면 하루 종일 붙잡고 배울 수 있다.
장강명 작가는 바둑을 통해 인간이 수년, 수백 년에 걸쳐 구축한 시스템과 기득권 카르텔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직유적으로 보여줬다. 바둑 고수의 권위는 상실됐고 업계 최고급 브랜드가 아닌 이상 생계를 걱정할 정도가 됐다.
비단 바둑뿐만이 아니다. 여러 곳곳에서 AI 등장에 따른 격변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를 체감한 게 이번 23~28일 일본·미국 출장이다. 거기서 쏟아지는 기사를 다 처리할 수는 없었지만, 개인 기사 작성량으로는 최대치를 기록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한 줄 ‘속보’가 상당 부분을 차지했지만, 23일 토요일부터 27일 수요일까지 내가 처리한 기사 수는 99개였다. 그 기간 전사적으로 나보다 기사를 많이 처리한 사람은 없었다.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을 갖던 25~26일에 걸쳐서는 40여 개를 처리했다.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들 기사에서 오타나 비문은 예전보다 크게 줄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타와 비문 교정을 AI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사실 기사를 다 쓰고 오타와 비문을 점검하는 시간은 전체 기사 작성 시간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 시간을 아낄 수 있게 되니 생산성은 자연히 올라간다.
그뿐만이 아니다. 현장 기자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워딩이다. 기자회견이나 간담회 때 발언을 빠르게 손으로 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기자회견에는 신참급 ‘워딩맨’과 고참급 ‘기사 작성자’가 짝을 이뤄 가는 경우가 많다. 속보가 중요한 연합뉴스 등 통신사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상당수 기자들이 녹음 후 텍스트화하는 인공지능을 쓴다. 이른바 STT(Speech to Text)로, 국내 기자들은 클로바노트를 많이 사용한다. 이렇게 녹음된 워딩을 챗GPT나 노트북LM 같은 AI 프로그램에 돌리면 바로 요약본을 만들어준다. 각 주제별로 어떤 기사를 써야 할지 손쉽게 고를 수 있다. 필요하다면 쓰기 좋게 멘트를 골라 달라고 할 수도 있다.
현장 기자 업무 중 가장 큰 중노동 가운데 하나가 ‘워딩’을 치는 일이고, 이 워딩을 기반으로 내용을 파악해 기사를 쓰는 건데, AI를 쓰면 이런 ‘노동 과정’을 줄일 수 있다. 조금 더 여유 있는 상태에서 본 기사를 쓸 수 있게 된다.
그뿐일까. 영어로 진행되는 현장 생중계 영상으로도 텍스트 형태의 보고서를 만들 수 있다. 요즘은 유튜브 주소만 입력하면 바로 워딩을 뽑아주고 보고서까지 만들어준다. 영어 실력이 없어도 AI가 화자부터 멘트까지 다 정리해 준다. 실제 이재명 대통령이 조선소를 방문했을 때 영상에 나온 미국 관료 등의 멘트를 기사에 녹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을 보면 ‘당장은 일손을 줄일 수 있어 좋다’라는 반응을 보일 수 있다. 다만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과거라면 2~3명이 하던 일을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당연히 경영진 입장에서는 고용을 줄이고자 한다. 사람 자르기가 쉬운 미국 기업들은 이미 수많은 개발자를 정리해고하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기사의 인사이트 여부를 떠나 양적 기준으로만 보면 신참급 워딩맨, 데스크의 데스킹이 필요 없게 된다. 생성형 AI의 훈련 수준에 따라서는 기사까지 대신 쓸 수 있다.
이 안에서는 지난 수십 년간 축적됐던 언론계 체계에 근본적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AI가 선배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쓰는데 굳이 ‘혼나 가면서’ 일을 배울까. 실제 현장에서는 선배가 데스킹해 준 것과 AI가 데스킹한 것을 비교해 보는 사례가 종종 있다고 한다.
이런 인적 시스템의 붕괴는 더 이상 사람을 뽑지 않게 만든다. 허드렛일을 맡겨가며 굳이 사람 기자를 키울 필요가 없어서다. 종래 연차가 낮은 기자들은 ‘워딩을 치는’ 단순 업무부터 시작해 취재, 기사 작성의 영역으로 확장해 갔다. 그러면서 조직에 적응하고 융화됐다.
PC 시대가 열리면서 기자실 내 원고지가 사라졌고, 초고속 인터넷망이 깔리면서 팩스가 무용해졌다. 각 부스마다 전화기도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역할을 잃었다. 이 변화는 거의 10여 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됐다.
반면 AI가 초래하는 변화는 속도가 빠르다. 불과 1년 사이에 내 일하는 방식에 큰 변화가 일었다. 이를 많은 이들이 깨달을 때가 되면 더 큰 변화와 파급이 있지않을까 싶다.
AI 시대는 또 어떤 변화를 초래할까. 무엇이 사라질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