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 상황 안정됐지만 여전히 안심 못해
2021년 즈음 전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 우려가 시작되던 때에 전 세계 투자자들은 제롬 파월의 선택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돈을 풀던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어떤 통화 정책을 보일지 촉각을 세운 것이죠.
외신들을 비롯해 많은 언론들은 이런 파월 의장을 두고 ‘폴 볼커의 길을 가길 원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볼커 의장이라 하면, 1980년대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이름을 알렸던 ‘거구의 연준 지킴이’었습니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연방기준금리를 20% 가까이 올렸고(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힘든...) 많은 이들의 지적과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의 회고록을 굳이 열어보지 않더라도, 미국 각처의 노동자, 농민 등이 ‘경기 살려내라’고 그가 있는 곳까지 올라왔다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혹시 몰라 품 속에 권총을 들고 다녔다는 얘기마저 들렸습니다. 이런 볼커 의장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볼커룰’이라는 국경없는 자본 규제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놓으면서 주목을 한 번 더 받았습니다.
볼커 전 의장이 지금껏 회자되는 이유는 간명합니다. 과단성 있는 금리 정책으로 인플레이션 불길을 잡았고, 1970년대 내내 미국 경제를 괴롭혔던 스태그플레이션(경기불황 + 물가상승)까지 잠재웠던 데 있습니다. 골이 깊은 만큼 산도 높다고 할까요, 그의 고금리 정책은 인플레이션의 불길을 잡았고, 이는 이후 저금리 시대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마침 1980년대 중반 플라자 합의로 인한 저달러, 산유국 간의 경쟁으로 인한 저유가가 겹치며 ‘3저 호황’이 도래하게 됩니다. 1980년대 한국이 고도 성장을 이어가며 경공업중심 국가에서 반도체·중화학공업 국가로 성장할 수 있게 된 배경이 됩니다. 1988년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식민지 경험이 있는 유일한 선진국 등 한국이 그간 이룬 성과에 있어 ‘3저 호황’의 힘은 컸다고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들은 파월 의장이 ‘볼커의 유산’을 물려받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단성 있는 금리 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을 잡고 후에 경기 호황을 이끌어 달라는 희망이겠죠.그리고 연준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로 기록되길 원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파월 의장은 2022년 3월 금리 인상을 시작해, 같은 해 6월부터는 ‘자이언트스텝’(0.75%포인트 인상)을 연거푸 단행하며 인플레이션 잡기에 나섰습니다. 덕분에 9%를 넘으며 10%에 육박하던 미국 내 인플레이션도 최근 3%대로 안정세를 찾았습니다.
다만 인플레이션 조짐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고금리 정책 동안에도 미국내 고용 경기는 ‘뜨겁다’ 할 정도였고, 뉴욕 등 대도시 물가는 ‘살인적’이었습니다. 지난 9월 UN 총회 때 저도 겪었는데, 햄버거 하나 가격에 ‘뜨악~’할 정도였습니다. 패스트푸드점이 아닌 일반적인 레스토랑에서 종업원 팁까지 부담하며 밥을 먹는다면, 꽤 많은 돈을 각오해야할 정도였습니다.
어찌됐거나 파월의 인플레이션 파이팅(fighting)도 막바지에 이르렀고 지난해 말부터 금리 인하 정책을 계속해서 펼쳐오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미 채권금리도 하향 안정화 추세를 보였습니다.
이런 볼커 전 의장과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 아서 번스 전 의장입니다. 번스 전 의장은 1970년대를 관통했던 스태그플레이션과 맞섰다가 ‘처절한 한계’를 맛보고 나온 의장입니다. 연준 내에서는 그를 조롱의 대상으로까지 보고 있다고 합니다. 후세 연준 사람들과 경제전문가들에게는 ‘본받지 말아야 할 연준 의장 표본’이라고까지 합니다. ‘무능력’하다고나 할까요.
사실 그도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그의 두번째 후임 의장인 볼커 의장도 회고록에서 그를 깎아내리지는 않았습니다. 같은 연준 의장으로서 정치권의 압박을 받는 인간적 고뇌를 직간접적으로 서술했습니다. 바로 정치권으로부터 받는 압력이었는데요, (사실상) 인사권자인 대통령으로부터 ‘금리인하’ 압력을 수도 없이 받았다고 합니다.
번스 전 의장 재직 당시 미국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과 겹칩니다. 번스 의장 또한 1970년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서는 고금리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이를 실천했습니다. ‘조금만 더 고금리 정책을 유지하면 될텐데’라는 생각이 들 때 즈음이면 어김없이 정치권의 압박이 들어왔습니다. ‘금리를 낮춰라.’
닉슨 전 대통령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행정부 수반들은 금리인상 정책보다는 금리 인하 정책을 더 선호합니다. 금리가 내려가는 동안에 통화 확장이 되고 자산시장 가격이 올라가기 때문이죠. 특히 증시 지표가 좋아지면, 본인 정권의 성과로 포장하기 좋습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정권들이 저금리 정책을 선호하는 이유입니다.
번스 전 의장도 버티다가 결국 굴복했고 금리를 내립니다. 어정쩡하게 정책을 이어갔고, 경기도 호황도 아니고 불황도 아닌 상태에서 물가 정책도 일관성을 갖지 못했습니다. 1970년대 여러가지 정치적 상황(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 점거,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에 경제적 상황(1, 2차 오일쇼크)이 겹치면서 경기는 내려앉고 물가는 오르게 됩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의 도래였습니다.
반면교사라고 할까요, 작금의 상황을 보면 1970년대말 혹은 1980년대 초가 겹쳐 보입니다.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금리 인하를 요구하면서 대놓고 연준 의장을 저격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9일 APEC 연설에서 파월 의장을 저격했습니다. 그가 연임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언했는데요, 그가 있는 동안 경제 상황과 정책에 대한 비판도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민주당 정부를 꼬집은 것이죠.)
아마도 후임 연준 의장은 금리 정책에 있어 보다 더 트럼프 친화적일 것 같습니다. 주식을 중심으로 한 시장 참여자들은 환영할 것이라고 봅니다. 허나 걱정이 되는 것은 여전히 물가 상승 압력이 상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금리곡선을 보면 2~5년 중기채 금리는 많이 낮아져 있지만, 장기 인플레이션 우려의 정도를 뜻하는 장기 금리는 그렇게 많이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특히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인플레이션에 대한 걱정이 좀더 커진 것 같습니다. 연준이 기준금리를 낮춰도, 장기채권 투자자들은 물가 상승에 따른 금리 프리미엄을 요구하는 것 같아서입니다. 연준의 정책 효과라고 할까요, 이것도 좀 1년 사이 둔감해진 것 같습니다.
연준 정책에 대해 시장 참여자들이 다소 불신을 하고 있다는 해석도 어느정도 가능합니다. (어쨌든 인플레이션 우려가 여전히 반영되어 있다라는 얘기)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인상 정책은, 결국 소비자 부담 전가로 이어집니다. 추가 관세 부과는 필히 제품 가격 인상으로 이어집니다. 경제학 교과서를 보면 ‘관세 등의 조세가 가격 상승을 이끌고, 이는 시장 위축을 초래한다’라는 게 잘 나와 있죠.
여기에 연준 금리 인하에 따른 달러 약세는, 미국내 수입되는 제품의 가격을 올리는 효과를 냅니다.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더 많은 달러를 주고 물건을 사와야 하기 때문이죠. 관세와 달러약세까지 맞물리게 되면 지금보다 더 크게 미국 물가는 올라갈 수 있습니다.
쉽게 정리를 하자면 트럼프 정부의 정책(금리 인하, 관세 인상)은 미국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게 되고, 아직 완전한 안정세라고 볼 수 없는 미국 물가를 충분히 자극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저임금으로 일하던 외국인 노동자까지 줄게 되고 외부적 충격까지 더해진다면...
작금의 트럼프 행정부의 경제 정책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감히 예측하기 어렵지만, 경제학 교과서에 나온 것과는 방향이 크게 달라 보입니다. 이런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한국 경제는 또 어떻게 준비를 해야할지, 면밀하게 살펴봐야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