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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신 May 24. 2022

낯선 봄

[단편소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다. 마스크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현관 밖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마스크를 써야 한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버스나 지하철을 탈 수 없고,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살 수도 없다. 참새조차도 마스크를 써야 사람으로 인식한다니 어쩌겠는가. 몇 번이나 낭패를 겪고서야 나는 작은 바구니를 현관 거울 앞에 놓았다. 바구니에 세 종류의 마스크를 담아두고 용도에 따라 골라 쓴다. 산책만 할 때는 KF-AD, 동네 가게에 갈 때는 KF-80, 멀리 갈 때는 KF-94, 이런 식이다.

  바구니에서 KF-AD 한 장을 꺼낸 나는 거울을 보며 일련의 작업을 한다. 제일 먼저 고무줄을 귀에 건다. 코와 마스크 사이에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코핀을 누른다. 얼굴에 완전히 밀착되었는지 턱 부분을 살핀다. 완벽한지 다시 한번 확인한다. 마침내 나는 결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는 모습으로 집을 나선다.

  봄기운이 완연하게 내려앉은 산책로에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 있다. 수줍음을 던져버린 듯 알몸의 진달래가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고 벚나무는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는 중이다. 뒤숭숭한 인간 세상과 상관없이 봄날은 여전히 아름답기만 하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지구를 점령한 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났다.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으니 내 고충은 고통이라 할 수도 없을 테지만 문제는 바이러스에 휘둘리는 내 삶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데 있었다.

  2020년 봄 나는 열아홉 명의 손님을 모시고 남미 대륙을 여행 중이었다. 서울을 떠난 지 26일째 되던 날 아침이었다. 외출 준비를 막 끝냈을 때 침대 옆에 있는 전화기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수화기 속에서 들리는 호텔 매니저의 목소리는 퉁명스럽기 짝이 없었다.

  “너희는 외출 금지야. 방 안에서 머물러야 해. 식사도 물론 방 에서 해야겠지. 룸서비스 이용료가 추가될 거야.”

  그녀는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유감이라거나 형식적으로 건네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명령조로 말했다. 우수아이아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행 비행기를 탈 때까지 아르헨티나 정부는 관광객과 관련된 어떤 조치도 내리지 않았다. 고급 와인을 마시며 안심 스테이크를 먹거나, 탱고 공연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겠다는 기대로 한껏 들떠 있는 손님들에게 뭐라고 한단 말인가.

  “뭔 말을 하는 거야? 왜 갑자기 감금하는 건데?”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고운 법이다. 내 말에도 가시가 돋쳐 있었다.

  “뉴스 봐. 조금 전에 대통령이 위험 국가에 칠레를 포함시켰어. 너희들 칠레에서 왔잖아. 나도 어쩔 수 없어. 지침을 따라야 해.”

  허둥지둥 프런트로 뛰어 내려가서 말도 안 된다며 항의했지만, 매니저는 굳은 표정으로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걱정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안타깝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이 호텔에 한두 번 온 게 아닌데 어찌 이리 인정머리가 없을까. 서운하고 괘씸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며 뒷골이 당겼다.

  아웃바운드 여행사에서 투어 길잡이로 일한 지 20년이 넘었다. 남미 대륙을 오간 지도 벌써 십여 년이다. 그간 별의별 일이 다 있었으나 이렇게 난감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 어쩌지? 일단 일행의 의견부터 묻기로 했다.

  -긴급한 사태가 생겼으니 지금 당장 제 방으로 오세요.

  메시지를 단톡방에 올리고 방문을 열어 두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의 얼굴엔 불안과 의구심이 가득했다. 손님들은 중국에서 사스나 메르스 같은 호흡기 감염병이 발생했다는 사실과 새로운 병이 우한 폐렴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매니저의 말을 가감 없이 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빨리 빠져나가야 할 거 같아요. 잘못하면 시골에 끌려가서 격리될 확률이 높아요.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어요.”

  “관광은 어찌 되는 건데요?”

  “향후 일정은 모두 취소해야죠. 관광이 문제가 아니예요. 여기서 코로나 걸리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동안 보셨잖아요. 의료 시스템이 우리나라 같지 않다는 거.”

  “너무 무서워요. 구경이고 뭐고 무조건 빨리 집에 가고 싶어요.”

  어머니를 모시고 온 삼십 대 초반의 여자가 말했다.

  “빨리 탈출하는 게 좋겠습니다.”

  은퇴한 교장 선생님이 중후한 목소리로 동의를 표했다.

  “갇히기 싫어요.”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요?”

  너도나도 한마디씩 했지만, 여행을 계속하자거나 남은 경비를 환불해 주는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만장일치로 이 상황에서 탈출하기로 했다. 남은 일정은 이구아수 폭포와 리우 카니발 단 두 개였다. 우리는 이틀 뒤에 국경도시인 푸에르토 이구아수로 가서 버스로 국경을 넘을 예정이었다. 비행기 표도 가지고 있었다. 이구아수 폭포는 이미 폐쇄되었으나 브라질은 아직 출입국 통제를 하지 않고 있었다. 아르헨티나만 벗어나면 무슨 방도가 생길 것 같았다. 항공사에 전화해서 푸에르토 이구아수로 가는 항공편을 내일로 변경했다. 그리고 매니저에게 내일 아침 체크아웃 하겠다고 통보했다.

  26일 전 우리 일행은 인천 공항을 출발해 LA를 거쳐 페루에 도착했다. 잉카의 궁전이었던 마추픽추와 세상에서 제일 큰 거울인 볼리비아의 우유니 호수를 탐방하고 칠레로 갔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트레킹을 마치고 아르헨티나로 간 이유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페리토 모레노 빙하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빙하에서 떼어낸 얼음조각에 위스키를 부어서 마실 때까지만 해도 코로나19는 우한 폐렴이라 불렸고, 여행 금지령을 내린 남미 국가도 없었다.

  땅끝마을이라 불리는 우수아이아에 도착했을 때도 나는 뉴스부터 챙겨 보았다. 중국 방문자와 중국인은 격리 대상이었지만, 대한민국 관광객이 격리될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안개 속에서 유람선을 타고 비글해협으로 갔다. 펭귄과 바다사자와 가마우지 무리를 보고 항구로 돌아올 때쯤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킹크랩과 볶음밥을 맛있게 먹고 커피도 마셨다. 그리고 아무런 근심 없이 부에노스아이레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는 이틀 동안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둘러보고 이구아수 폭포를 보러 갈 예정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는다더니 시내 관광을 나가려는 찰나 억류 통보를 받았다. 칠레에서 온 사람은 국내에 머무르지 말라는 지침을 우수아이아에 있을 때 내렸더라면. 그랬다면 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오지 않고 바로 브라질로 넘어갔을 텐데….     

  다음 날 아침 나는 택시 다섯 대를 불렀다.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짐을 챙겨 로비로 내려갔다. 캐리어와 사람들이 뒤섞인 로비는 내 마음만큼이나 어수선했다. 빨리 공항으로 가야 하는데 프런트 직원이 퇴실 수속을 해 주지 않았다. 외무부 허가가 나야 되네, 의료 허가가 있어야 되네, 하면서 계속 잡아 두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며 택시 기사들이 불평을 쏟아냈다. 나는 웃돈을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그들을 달랬다.

  마음 같아서는 매니저의 멱살을 잡아서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싶었다. 매부리코에 주걱턱이라 마귀할멈을 연상시키는 여자였다. 난생처음 삿대질까지 해 가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높고 앙칼진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서슬 퍼런 내 태도에 놀랐는지 매니저가 체크아웃해 주라고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권위적이고 불친절한 매니저에 비하면 택시 기사들은 착했다. 어깨를 한 번 으쓱했을 뿐 군말 없이 차를 몰았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사실을 아니까 알아서 전속력으로 달렸다.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시간 안에 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사람들을 이끌고 셀프체크인 키오스크 앞으로 갔다. 호텔에서 스마트폰으로 좌석을 받아 두었기 때문에 각자 자신의 캐리어에 붙일 수화물표를 출력해서 탑승 수속 카운터로 가면 되었다.

  짐을 실으려는 사람들이 카운터 앞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한국인 단체가 마침 수속 중이었다.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단체가 무사히 비행기를 타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그 팀은 인원이 많아서 두 편의 항공기에 탑승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어림잡아 마흔 명은 되어 보였다. 이미 짐을 실은 절반의 사람들이 한쪽 옆에 모여 있었다. 내가 다가갔을 때 갑자기 수속이 중지되었다. 칠레에서 온 사람들에게 이동 금지령이 내렸다며 이미 들어간 짐을 공항 직원들이 도로 꺼냈다. 짐이 다시 나오는 걸 본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자기 캐리어를 찾아 들었다. 지켜보는 내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을 했다.

  마침내 우리 차례가 되었다.

  “저 사람들 보이죠? 당신들도 못 탑니다.”

  새침하게 생긴 여직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왜 갑자기 못 나가게 하는 건데요? 태워 주세요.”

  “다음 사람이 수속해야 하니 비켜서세요.”

  나는 물러나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실랑이하고 있는데 한국 대사관에서 사람들이 왔다. 한국인 영사와 현지인 직원 두 사람이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나는 어제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해 두었다.

  “이 비행기 반드시 타야 합니다. 체크인해서 좌석도 이미 받았고, 푸에르토 이구아수 공항에 국경을 넘기 위한 차량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버스 타고 바로 브라질로 넘어갈 겁니다. 꼭 타게 해 주세요.”

  나는 영사에게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마르띤이라는 현지인 직원이 카운터 직원에게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소귀에 경 읽기였다. 어디선가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카운터 쪽으로 몰려오더니 카메라를 들이대고 나와 손님들을 찍기 시작했다. 마이크를 든 사람이 ‘대통령이 명령을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출국하려고 하는 몰상식한 아시안’ 어쩌고 하며 우리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멘트를 날렸다. 뭐야? 허락도 없이 우리를 촬영하는 거야?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는 내게 앵커가 마이크를 들이대며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따위 멘트를 하고 내게 인터뷰를 요청해? 너무 뻔뻔하지 않은가? 인터뷰는커녕 한바탕 욕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코로나19 사태가 아무리 엄중하다고 하더라도 관광객이 본국으로 돌아갈 여지는 남겨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나는 인터뷰를 단칼에 거절했다.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 앉혔다. 비행기를 타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 활활 타오르기 전에 무조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야 했다.

  영사와 마르띤이 외무부의 허가를 받아냈다. 이제 보건부 장관만 승낙하면 출국할 수 있다. 제복을 입은 남자가 오더니 우리에게 한 줄로 서라고 말했다. 군인인지 보건소 직원인지 공항 검역소 직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감염병 때문에 못 나가게 한다면서 체온계 하나로 모든 사람의 체온을 쟀다. 다행히 열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푸에르토 이구아수행 비행기 표를 보여 달라기에 키오스크에서 출력한, 좌석번호까지 찍혀있는 수화물표를 보여 주었다. 푸에르토 이구아수 공항에서 우리를 태우고 브라질로 넘어갈 차량 계약서도 제시했다.

  체온도 재고, 서류도 보여 주고,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었지만 허가가 나지 않았다. 속수무책이란 말이 이래서 생겼나?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호텔에서 나왔는데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속이 든든해야 무슨 일이든 할 배짱도 생긴다. 초췌한 얼굴로 불안에 떨고 있는 일행의 허기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공항 내 카페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로 배를 채웠다.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는 와중에도 내 머릿속 컴퓨터는 쉬지 않고 돌아갔다. 대사관 직원들이 있을 때 반드시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만리타국에서 기약 없이 연금될 판이었다.

  대사관이 움직이니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아르헨티나 국적기만 아니라면 비행기를 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비행기 표를 새로 사고, 푸에르토 이구아수에 잡아 놓은 호텔비도 날리게 생겼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브라질에만 가면 방법이 생길 거 같았다.

  “비행기 표 새로 사야 해요. 무조건 돈 더 내세요. 지금 못 나가면 2주일, 어쩌면 더 오래 갇힐지도 몰라요.”

  나는 사람들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지금 당장 돈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수십만 원을 더 내라는 말에 망설이는 사람이 꽤 되었다.

  “말이 이 주일이지 한 달 혹은 두 달 갇힐지도 모르고, 만일 여기서 코로나 걸리면 그 자리에서 죽어요.”

  으름장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랬다. 여기서 진찰 한 번 받으려면 보통 한 달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 병원이 많이 없기 때문이다.

  “속절없이 죽으면 병원에서 보디백에 넣은 다음 바로 소각장으로 보낸대요. 감염병 환자이기 때문에. 돈 조금 더 내는 게 나아요.”

  긴가민가하면서도 전원이 돈을 냈다. 시차가 열두 시간이다 보니 한국은 한밤중이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현지 여행사에 전화해서 브라질의 상파울루로 가는 외국 국적사 항공권을 사 달라고 부탁했다. 리우행이 아니라 상파울루행 표를 사 달라고 한 이유는 상파울루 공항이 더 커서 취항한 항공사가 많기 때문이었다.

  “델타항공만 좌석이 있는데 한 장이 모자라, 그래도 살까?”

  여행사 직원이 물었다. 우리 일행은 나까지 포함하면 모두 스무 명이다. 제비를 뽑자, 급한 사람 먼저 타자, 의견이 분분했다. 다행히 LA에서 합류한 남자 손님이 자기는 바로 미국으로 갈 테니 어느 도시든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사 달라고 말했다. 나는 상파울루행 19장과 LA행 1장을 웃돈까지 얹어주고 샀다. 인터넷으로 사면 저렴하긴 하겠으나 필요한 만큼 좌석을 구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다 같이 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여행사 매니저에게 티켓 값은 한국 대사관 직원인 마르띤에게 맡기겠다고 말하고 마르띤을 바꿔주었다. 몇 시간 동안 공항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뛴 한국 대사관 직원들과 외상으로 표를 끊어주고 상파울루 호텔까지 예약해 준 여행사의 배려가 눈물겹게 고마웠다. 우리 앞에서 탑승이 취소된 한국 팀은 그제야 표를 구하기 시작했다. 추가 비용이 많이 들어가니까 의견 일치를 보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아르헨티나를 탈출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창공으로 날아올랐는데도 여전히 조마조마했다. 설마 비행기를 돌리기야 할까 싶으면서도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불안한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다. 상파울루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갔다. 숙박비는 내가 현금으로 결제했다.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손님들에게 또 돈을 내라고 할 염치도 없었다.

  원래 우리 일정은 아르헨티나 쪽 이구아수 폭포에 가서 이름도 유명한 악마의 목구멍을 보고, 브라질 쪽 이과수 폭포에서 보트를 타고 폭포 밑으로 들어가서 폭포수를 맞은 다음 리우데자네이루로 가서 카니발을 구경하는 거였다. 감염병에 대한 우려 속에서도 리우 카니발은 예정대로 열리고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이구아수 폭포를 못 본 대신 리우 카니발은 꼭 보아야 했다. 우리는 상파울루에서 하룻밤 자고 리우로 갔다. 상파울루-리우 비행기 표는 추가 비용 없이 회사에서 구해 주었다. 해질녘에 리우 공항에 도착했다.

  어둠이 깔리고 있었지만 감염병이 주는 불순한 기운은 어디에도 없었다. 맥주를 마시고, 환호성을 지르고, 키스하는 청춘 남녀가 거리를 메웠다. 손님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맥주를 마시고 삼바드로모에 가서 삼바 퍼레이드를 보면 이구아수 폭포를 보지 못한 아쉬움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 까다롭게 굴거나 짜증을 내지 않고 묵묵히 내 뜻을 따라준 손님들이 고마웠다. 그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설핏 잠이 들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서울 본사에서 온 전화였다. 상파울루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노선이 곧 폐쇄된다는 소식이었다. 리우에서 최대한 빨리 나가야 한다는 거다. 리우데자네이루-상파울루-프랑크푸르트-인천으로 연결되는 표를 이미 가지고 있었지만 모든 탑승 스케줄을 변경해야 했다.

  리우 관광 일정이 취소되었다는 말에 손님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공포가 스며들었다. 숙박비를 또 날려야 했으나 숙박비가 문제가 아니었다. 상파울루에서 더 머물다가 바로 프랑크푸르트로 갈 것을. 하나 마나 한 후회를 하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리우데자네이루-상파울루-프랑크푸르트-인천 항공편을 동시에 조정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코로나19 때문에 전 세계 항공사가 일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나라가 언제 국경을 닫을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일행이 동시에 나가야 하는데 리우에서 상파울루로 가는 표조차 아직 날짜 변경이 되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일행을 동시에 아웃시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표를 구하는 중이라고 했다. 자리가 몇 개 부족하다는 연락이 왔다.

  제비뽑기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마는 일단 제비를 뽑아서 순서를 정하기로 했다. 제비를 뽑고 순서를 정하고 생난리를 치는 와중에 다행스럽게도 표를 모두 구했으니 떠날 준비를 하라는 연락이 왔다. 문제는 나였다. 나는 원래 손님들보다 며칠 늦게 아웃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내 표만 날짜 변경이 안 된다고 했다. 리우에서 다음 비행기가 나올 때까지 대기하라고 했다. 내가 어찌 되건 말건 손님들을 내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공항에 가서 수속을 도왔다. 일행이 상파울루에서 무사히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를 탔다는 카톡을 받았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손님들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아시아나 항공을 타고 인천으로 가면 된다. 아시아나는 우리나라 국적기니 탑승하는 데 문제는 없을 터였다.

  호텔 방에 혼자 누워 곰곰 생각해 보니 이대로 리우에 있으면 안 될 거 같았다. 일행이 떠날 때 나도 짐 싸 들고 공항에 가서 “내 자리도 내 줘.” 하고 떼를 썼어야 했다. 그러지 않은 게 비로소 후회되었다. 그때는 손님들 문제에 골몰해 나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온 세계가 동시에 문을 닫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이전에는 이런 사태가 없었으니까. 풍문으로도 듣지 못했으니까. 처음이니까.

  다음 날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공항으로 갔다. 일정을 변경해 주는 카운터 앞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항공사끼리 공유하는 시스템으로 자리를 잡아주는데, 이틀 후에 출발하는 네덜란드 국적의 케이엘엠 항공편으로 암스테르담 거쳐서 파리 거쳐서 대한항공을 타고 인천으로 가는 표로 변경해 주었다. 아, 다행이다. 나도 이제 집에 갈 수 있겠구나 싶었다.

  출발하는 날 아침 일찍 공항에 갔다. 무슨 일이 또 생길지 모르니까 무조건 빨리 갔다. 그런데 케이엘엠 항공에서 수속을 안 해 주었다. 오늘 새벽 0시부터 유럽연합 내 국가 간 이동이 금지되었다고 했다. 암스테르담에서 파리로 가는 비행기 편이 아예 없었다. 암스테르담에서 바로 한국으로 가면 간단한데 방법이 없다고 했다.

  아, 나는 어떡하냐고. 어떻게 집에 가느냐고!

  나오느니 한숨이었다. 라탐 항공에 가서 표를 또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에 바꿔준 표는 런던에서 북경을 거쳐서 인천으로 가는 표였다.

  “진짜 나 집에 갈 수 있는 거 맞지?”

  몇 번을 물어본 다음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다음 날 아침 히스로 공항에 도착한 나는 바로 환승 통로로 달려갔다. 에어차이나 항공을 타면 되는데 카운터에서 내 예약이 안 보인다고 말했다.

  “안 보인다니? 라탐에서 분명히 예약을 해 줬는데….”

  “라탐 항공 카운터에 가서 확인해 보세요. 그 방법밖에 없어요.”

  나는 부랴부랴 짐을 찾아서 수화물 보관소에 맡겼다. 히스로 공항은 터미널이 다섯 개나 되는 큰 공항이다. 하필이면 라탐 항공과 케이엘엠 항공의 터미널이 달랐다. 어떤 백인 여자가 라탐 항공이 있는 터미널 3이 폐쇄되었다고 말했다. 어찌해야 하나? 물으니 런던 시내에 있는 라탐 항공 사무소로 가라고 했다.

  말도 안 돼! 어째 이런 일이? 그러나 낙담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터미널 3에 가 보기로 했다. 폐쇄되긴 개뿔 열려 있었다. 자리를 받긴 받았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수화물 보관소에서 짐을 찾아서 미친 듯이 달려갔건만 게이트가 이미 클로즈 된 뒤였다.

  “이미 늦었어요. 당신은 비행기 못 타요.”

  “아까 타기로 했던 바로 그 비행기인데, 이리저리해서 겨우 왔는데, 왜 안 태워 주느냐고요.”

  “게이트가 이미 클로즈 되었고 카운터 직원들이 다 철수해 버려서 탑승이 불가능하다니까요.”

  사이보그처럼 표정 없는 얼굴의 앵글로색슨족 여자가 사무적 으로 말했다. 아무리 사정해도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온몸의 맥이 다 풀렸다. 하는 수 없이 다시 터미널 3에 있는 라탐 항공으로 갔다. 이번에도 중국 경유 편을 주려고 했다. 나는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한국으로 곧장 가는 비행기 표를 달라고 떼를 썼다.

  라탐(LATAM) 항공 그룹은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에 본사가 있는 지주 항공사다. 칠레 항공사인 ‘란 항공’과 브라질 항공사인 ‘탐 항공’이 2010년 8월 합병해 남미 최대 항공사가 되었다. 남미 대륙을 총괄하는 항공사지만 아직 중국에 사무소를 내지 않았다. 중국에 가서 문제가 생기면 해결할 방법이 없다. 내 성화에 못 이 긴 직원이 대한항공으로 바꿔주었다. 5일 후에 출발하는 표였다. 하루라도 빨리 타기 위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공항 근처 호텔에 투숙한 나는 좌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눈이 빠지게 스마트폰만 들여다보았다. 사흘째 되던 날 ‘대한항공 특별편 편성’이라는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출발일은 내일이었다. 나는 바로 공항으로 달려갔다. 대한항공 카운터에서 “손님 표는 날짜 변경이 불가능합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이지 눈앞이 캄캄했다. 희망에 부풀었던 가슴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날짜 변경은 오직 라탐 항공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라탐 항공 카운트로 달려가서 표를 바꾼 다음 호텔에 가서 잤다. 다음 날 아침 체크아웃하면서 프런트 직원에게 말했다.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비행기 타고 집에 간 거고, 비행기를 못타면 다시 돌아올 거야.”

  그날 나는 호텔에 돌아가지 않았다. 미리 지불한 숙박비는 아직 1박이 더 남아 있었다.

  비행기 날개에 그려진 태극 문양을 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멨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안녕하세요.”라는 여승무원의 인사말이 천상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같았다. 순간 뜨거운 덩어리가 목젖을 타고 올라왔다. 치밀어 오르는 서러움을 꿀꺽 삼키며 캐리어를 선반에 올리고 의자에 앉아서 안전띠를 맸다. 등받이에 기대자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내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수도 없이 비행기 표를 바꿨던 일이 먼 옛날의 일 같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서 우왕좌왕했던 일, 짐을 찾고, 다시 맡기고, 다시 찾아서 비행기에 오르고….

  몹시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 닫힌 눈꺼풀 아래서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전대미문의 큰일이 났다는 깨달음이 비로소 왔다. 온 나라가 하루아침에 국경을 닫다니. 지난 20여 년간 수많은 공항을 드나들었다. 영어와 스페인어도 웬만큼 구사한다. 그런데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내 방에 몸을 눕히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다.

  아기 울음소리가 상념을 깼다.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소리의 진원을 찾았다. 일가족으로 보이는 네 명이 오른쪽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 대여섯 살 먹어 보이는 계집아이, 두 살 정도 되는 남자아이가 일행이었다. 남자아이가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울어서 얼굴이 빨개지기도 했겠지만 열에 들뜬 모습이었다. 스튜어디스들이 아기의 체온을 재고, 해열제를 먹이고, 물수건을 가져다주느라 부산하게 움직였다. 혹시 코로나19? 내게 전염되면 어쩌지? 이래저래 불안했다. 이제 겨우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는데, 따뜻한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서 며칠이고 잠들고 싶은데, 이상한 병에 걸리기 싫은데….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착륙하자마자 서둘러 내렸다. 3일 이내에 선별검사소에 가서 바이러스 검사를 받으라는 지시 외에 다른 규제 사항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씻고 잠이 들었다. 간간이 물을 마시고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았을 뿐 밥도 먹지 않고 잠만 잤다. 정신을 차려 보니 하루 반이 훌쩍 지나 있었다. 냉장고 안에 있는 건 생수와 마른 누룽지뿐이었다. 냄비에 누룽지와 물을 넣고 중간 불로 끓였다. 구수한 냄새를 맡는 거만으로도 행복했다. 마침내,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구나. 나는 무사하구나. 누룽지 한 그릇이 주는 행복이 더없이 컸다. 삶은 누룽지는 김치나 다른 반찬 없이도 술술 잘 넘어갔다. 그리고 또 잤다. 다음날에는 분식집에서 라면을 사 먹었다. 탄력 있게 씹히는 면발과 얼큰하면서도 감칠맛 넘치는 국물 맛이 일품이었다. 라면은 역시 한국 라면이 최고야.

  열도 나지 않고 기침도 하지 않았지만 3일째 되는 날 선별진료소에 가서 코로나바이러스 검사를 받았다. 양성이었다. 나는 구급차에 실려 코로나 전담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증상이 없다고 하니 의사가 X-Ray를 찍어보자고 했다.

  “예전에 결핵 앓은 적 있어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사가 물었다.

  “아니, 없는데요.”

  결핵을 앓은 적이 있는 사람처럼 폐가 부옇게 나왔다고 했다. 머리끝이 쭈뼛 설 만큼 무서운 말이었다. X-Ray를 믿을 수 없어서 CT를 찍겠다고 했다. 바이러스에 공격당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열도 나지 않고 기침도 나오지 않고, 근육통이나 다른 통증도 없고, 설사하거나 소화가 안 되지도 않았다. 숨 쉬는 것만 조

 금 힘들었다. 무증상 감염자. 증상은 없지만, 바이러스 검출량이 많아서 슈퍼 전파자가 될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나는 산소 호흡기를 달고 3주일이나 입원했다.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거리 두기가 시행되었고, 국가 간 이동도 금지되었다. 사망자가 많아서 냉동 컨테이너에 시신을 보관한다는 나라도 생겼다. 이전에 살던 세상과는 확연히 다른 낯선 세계였다.     

  일 년 전에는 집에 가는 거 외에 다른 소원이 없었다. 집에 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다.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워서 이겼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실업이라는 새로운 터널이었다. 회사는 이미 문을 닫았다. 프리랜서였던 나는 국가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지 못했다. 전 국민에게 주는 공적 지원금 20만 원과 서울 시민 모두에게 주는 재난지원금 30만 원이 전부였다.

  새로이 맞닥뜨린 터널의 입구는 넓고 넓었다. 수많은 사람이 나와 함께 터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 곁에서 걷는 사람이 많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 손을 잡는 사람도 없었고 나도 다른 사람의 손을 잡지 않았다. 혼자 가야 하는 길이었다. 블랙홀처럼 캄캄한 이 터널이 얼마나 긴지, 얼마만큼 나아가야 빛과 조우할 수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내 힘으로는 헤어날 수 없는 암울하고 광대한 터널이었다. 언제쯤 다시 길잡이가 되어 손님들을 모시고 이 나라 저 나라를 여행하게 될까. 숨 쉬는 게 예전 같지 않으니 고산지대가 많은 남미 대륙에는 못 갈지도 모른다.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워서 이겼을 때 몹시 기뻤다. 우울감에 빠질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상이 멈추고 집 안에 갇혀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점점 우울해졌고 수면 장애를 겪었다. 의사는 내 병을 코로나 블루라고 부르며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처방했다. 산책하고 책을 읽으며 버텨 보려고 했지만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나고 화가 치밀었다. 이번에는 의사가 코로나 레드라고 했다. 그는 항불안제를 추가로 처방했다. 저축했던 돈을 다 써 버린 지금 나는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다. 구원의 빛이 어디에서 도 보이지 않아서 암담하기만 하다. 이런 나에게 의사는 코로나 블랙에 갇혔다고 말하며 공격성과 충동성을 줄여주는 약물을 추가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갇힌 긴긴 터널의 끝이 어디쯤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이마를 스치는 바람을 타고 싱그러운 솔 향기가 밀려온다. 평화롭고 안온한 봄날 오후다. 마스크 때문에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지 못한다 생각하니 짜증이 솟구쳐 오른다. 길에서 벗어나 언덕으로 올라간다. 나는 왜 이런 신세가 되었을까? 전문직이나 정규직이 되지 못한 내 탓일까? 어떤 상황에서도 굳건히 보호받는 그들이 부럽다 못해 울화가 치민다. 소담스럽게 피어 있는 진달래도 밉다. 꽃잎을 마구 쥐어뜯는다. 어느새 중년 여인이 된 나는 알바 시장에서조차 설 자리가 없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 의기소침해진다.

  양지쪽 산책로의 벚꽃은 이미 활짝 피었다. 벚나무 아래를 걷는 내 발걸음이 헛헛하다. 고개를 든다. 만개한 꽃잎 사이로 파란 하늘이 점점이 보인다.

  봄날은 그렇게 홀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속절없이 아름다운 이 봄날이 내게는 오히려 낯설기만 했다.  

(문학저널. 202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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