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사회적 거리 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됩니다.”
앵커의 말을 듣는 순간 순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도권 주민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집 안에 머물러 주시기 바라며 모임과 약속은 취소하고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가시라는 안내문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밀려오는 두려움을 잠재우려 애쓰며 전문가라는 사람의 해설을 듣고 있는데 현관 밖이 소란스러웠다. 문 좀 열어보라는 남자 목소리와 쿵쾅거리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낙원빌라의 현관문은 가로세로 2m도 안 되는 좁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남향인 501호는 순영의 집이고 북향인 502호는 귀례의 집이다. 요즈음 현관문에는 엿보는 구멍이 없다.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집안에서 방문자의 얼굴을 볼 수 있지만, 벨을 누르지 않으면 카메라가 작동되지 않는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엿보는 구멍이 훨씬 쓸모 있다.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도 순영은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현관문에 귀만 갖다 댔다.
순영은 귀례가 집 안에 있다는 걸 안다. 두어 시간 전쯤 도어락의 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비닐봉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귀례는 동네 식당에서 김밥을 말고 주방일을 돕다가 저녁나절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순영은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그 시간을 피해서 드나든다. 지은 죄도 없는데 내가 왜 이러지? 혹시 대인기피증인가? 실소하면서도 좌우간 귀례와 마주치기 싫은 것이다.
지금 502호 현관에서 일어나는 일이 몇 년 전에는 순영의 집 문 앞에서 일어났었다. 그때 순영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퇴근해서 집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귀례가 고함을 지르며 문을 두드렸다. 사람의 뇌에는 병원체나 혈액 속에 있는 위험 물질로부터 뇌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혈액-뇌 장벽’이 있다고 들었다. 순영은 사람의 마음이나 정신에도 혈액-뇌 장벽처럼 단단한 보호막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악에 받친 귀례의 목소리를 들을 때 특히 그랬다. 귀할 귀貴자와 예절을 의미하는 례禮를 이름으로 쓰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부모는 딸이 귀하게 대접받기를 바랐던 것 같다. 아니면 예의를 잘 지키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거나….
30분이 지나도 소란은 멈추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일까? 귀례집 문 앞에서 소란을 피울 만큼 용감한 사람은 빌라 안에는 없다. 이 집 저 집 들쑤시고 다니는 사람은 언제나 귀례였다. 막무가내일 뿐 아니라 집요하기까지 한 그녀를 상대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낙원빌라에 심각하고 중차대한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귀례의 첫인상이 순박하다고 느꼈던 건 남다르게 생긴 눈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눈은 아래쪽이 직선에 가까운 아몬드 모양이다. 그런데 귀례의 눈은 앵그리 버드에 나오는 레드의 눈처럼 위가 직선이고 아래가 동그랬다. 레드의 눈은 굵은 일자 눈썹에 눈이 딱 붙어 있어서 그렇다지만 귀례의 눈은 눈썹에 붙어 있지도 않으면서 위쪽이 직선이어서 마치 반으로 잘린 박 같았다. 흰자위가 많이 드러난 데다 눈동자가 살짝 가운데로 모여 있어서 일면 어벙하고 속없어 보였다.
순영이 빌라 안의 누구와도 교유하지 않은 지 2년이 되어 간다. 선의가 끝없는 괴롭힘으로 돌아왔을 때 몇 번이나 이사하려고 했다. 이 동네 저 동네 다리가 아프게 돌아다녔지만 낙원빌라 501호보다 햇빛이 잘 드는 집이 없었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들어서 있는 집들은 한낮에도 창백하고 차가운 응달에 잠겨 있었다. 순영은 낙원빌라 501호와 처음 만났을 때 받았던 감동을 아직 잊지 못한다.
계단식으로 지어진 탓에 낙원빌라는 위로 갈수록 집이 작아졌다. 순영이 집을 보러 갔을 때 열 채의 집 중 301호만 팔린 상태였 다. 돈이 없다고 하자 건축주가 502호를 보여주었다. 베란다가 넓어서 시원한 느낌이 들긴 했으나 집 안에 들어찬 빛이 서늘한 무 채색이었다. 순영은 고개를 저었다. 건축주가 맞은편에 있는 501 호 문을 열었다. 현관까지 들이치는 따뜻한 빛에 단번에 매혹된 순영은 햇빛 값을 천만 원으로 치기로 했다. 502호보다 반 평 정 도 면적이 좁았으나 집값은 같았기 때문이다.
“작아도 남향집을 해야지.”
건축주가 말했다.
사리에 맞는 조언이라 여겨져 신뢰가 갔고 그 자리에서 계약했다. 대출받아서 샀기 때문에 원금과 이자를 갚느라 힘들었지만 501호는 순영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현관까지 들어오는 햇빛 덕분에 아무리 추운 겨울날에도 낮에는 보일러를 켤 필요가 없었고, 한여름에는 세 방향으로 난 창문에서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전기 수도 가스비에 공용 요금과 청소비까지 합해도 오륙만 원이면 충분했다.
낙원 빌라로 이사한 지 2년이 다 되어 가던 어느 일요일에 귀례가 순영의 집 문을 두드렸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칼국수와 김치가 담긴 쟁반을 들고 서 있는 귀례를 보자 순영은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마주 보고 살면서도 제대로 인사 한번 하지 못했다.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차마 내색하지 못하고 마주 앉아서 먹었다. 다 먹고 나서야 귀례가 입을 열었다. 낙원빌라를 위해 작은 일 하나를 해 달라며 옥상에 있는 화단이 문제라는 걸 아는지 물었다. 화단이 문제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하나 싶었다.
“건축주가 방수공사 하지 않으려고 편법으로 화단을 만든 거예요. 벽돌 몇 장 놓고 합판을 깐 다음 화단을 꾸민 거라고요.”
“그게 어때서요?”
“합판이 썩으면 화단이 무너지겠죠. 방수공사를 하지 않았으니 비가 샐 거예요. 302호 권사님이 그러는데 하자보수를 위해 건축주가 예치해 둔 돈이 있대요. 하자보수보증금이라는 건데 2년이 지나면 못 받는대요. 그 돈을 받아야 해요.”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런 돈이 있다면 받아내는 게 맞다. 순영은 자신이 모르는 일을 아는 귀례가 똑똑해 보였다.
“보증보험회사에서 돈을 받으려면 주민들이 인감증명서를 첨부해서 과반수가 서명한 서류를 내야 하는데 501호가 좀 해 주면
안 될까요?”
“내가요? 왜요? 나는 그런 거 알지도 못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순영은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를 치우거나, 쌓인 눈을 쓸거나, 주차장의 꽁초를
줍는 일을 아래층에 사는 팔십 넘은 할아버지가 하고 있었다. 도장 받고 서류 제출하는 일 정도는 해야 할 거 같았다. 502호 집주인인 그녀의 이름은 황귀례였다. 그녀가 제일 먼저 도장을 찍고 인감증명서를 떼 주었다. 순영은 밤마다 집집을 돌아다니며 취지를 설명하고 도장과 인감증명서를 받아서 일주일 뒤에 보증보험 회사에 제출했다. 순영은 편의상 자신이 주민 대표가 되었다. 예치된 보증금 삼천만 원 중에서 지급 기간이 경과한 오백만 원과 골조에 대한 천만 원을 제외하고 천오백만 원을 받을 수 있는데 지급하기 전에 보험회사에서 실사를 나온다고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이 순조로웠고 어떤 불길한 조짐도 없었다. 이웃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뿌듯하기까지 했다.
순영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고 있을 때 귀례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가기 싫다니까. 이거 놔, 놓으라니까.”
더는 참지 못하고 순영은 현관문을 조금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하얀색 방호복으로 온몸을 감싼 사람들이 귀례와 남편과 아들을 데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깜짝 놀라 황급히 문을 닫았다. 잠시 뒤에 순영의 집 벨이 딩동 하고 울었다. 마스크를 쓴 총무였다. 순영도 마스크부터 찾아 쓰고 문을 열었다.
“집에 있으면서 왜 빨리 문을 안 열어?”
총무가 짜증을 냈다.
“무슨 일이죠?”
순영은 그녀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든 맡기려는 속셈이라면 단칼에 거절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두 번 다시 낙원빌라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502호 말이야. 확진자 밀접 접촉자래. 검사 안 받는다고 우겨서 강제로 데려간 거야. 확진 판정 나면 우리도 모두 검사받아야 한대. 주민들 연락처 알려 달래서 휴대폰 번호 적어주었어.”
지금은 그녀가 낙원 빌라 회장까지 겸하고 있었다.
“알았으니 문 닫아도 되죠?”
총무가 날 선 눈빛으로 순영을 보았다.
귀례든 총무든 정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총무는 귀례와 순영 사이를 오가며 하루는 귀례 편을 들고 하루는 순영 편을 들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더니만….
보험회사에 서류를 제출한 지 열흘쯤 지나 건축주가 순영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는 다짜고짜 보험회사에 제출한 서류를 되돌려
받으라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재미없을 거라며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이미 제출한 서류를 어찌 돌려받는단 말인가. 재미없을 거라는 건 또 무슨 의미인지? 다짜고짜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그동안 건축주에게 보냈던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건축주가 다녀간 다음 날 귀례가 찾아와서 자기 인감증명서를 돌려 달라고 말했다. 이미 보험회사에 들어가 있어서 돌려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고 설명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귀례는 302호, 202호 102호 것까지 모두 내놓으라며 윽박질렀다. 그날 이후 그녀는 순영이 퇴근하는 즉시 현관 앞에서 악을 썼다. 귀가 시간을 달리해도 소용이 없었다. 핏발 선 귀례의 눈과 마주칠 때면 순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순박하다고 여겼던 눈이 섬뜩하다는 말 외에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할 정도로 무섭게 변해 있었다. 귀례가 현관문을 발로 걷어차며 행패를 부려도 나와 보는 주민이 없어서 서운했고, 배신감을 느꼈으며 화가 났다.
토요일 오후였다. 계단을 내려가다 보니 302호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작업복을 입은 남자들이 현관 안쪽 벽에는 타일을 붙이고, 거실 한 면에는 사람 키보다 큰 거울을 붙이는 중이었다. 건축주와 302호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 여자가 귀례를 조종하 나? 문득 든 생각이었다. 302호 여자가 만두나 도넛이 담긴 쟁반을 들고 귀례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 그녀 가 권사님으로 불리고 현관문에 십자가가 붙어 있는 거로 미루어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모양이었다. 귀례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가 궁금했는데 건축주, 302호 여자, 귀례로 이어지는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한 연결고리가 생성되었다. 거울과 타일을 네 집에 모두 붙여준다고 해도 천오백만 원과 바꿀만한 가치가 있나? 네 세대가 반대해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었다. 과반수만 찬성하면 되기 때문이다. 변수는 402호에 사는 총무였다. 총무는 이쪽저쪽을 오락가락하며 저울질을 계속했다.
순영은 당장이라도 발을 빼고 싶었으나 꼭대기 층에 사는 이상 옥상 방수공사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우둔함에 정복당한 채 건축주 손바닥 위에서 노는 여자들 얼굴 보기도 싫고 밀려오는 좌절감과 무력감을 떨치기도 힘들었지만, 총무마저 돌아서면 큰일이다 싶었다. 총무의 비위를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과일이나 빵을 사다 주기도 하고 그녀가 부업으로 하는 손뜨개 스웨터도 사 주었다.
보험회사 실사를 받기 전날까지 순영은 하루도 빼지 않고 사이렌 소리처럼 날카로운 귀례의 목소리를 들었다. 견디다 못한 순영이 112에 두 번이나 신고했지만 출동한 경관은 주민들끼리 잘 해결하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갔다. 실사 당일 건축주는 동정심이라도 유발하려는 심산인지 팔꿈치와 무릎이 해진 옷에 농부들이 애용하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순영은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건축사를 안내했다. 옥상의 화단을 둘러본 건축사가 순영의 손을 들어주었다.
2주일 후 순영의 통장으로 천오백만 원이 입금되었다. 공사업체를 선정한 순영은 옥상의 항아리를 치우라는 공지를 게시판에 붙였다. 화단을 철거하던 날 귀례가 인부들을 막아섰다. 눈을 부릅뜨고 계단 입구에 서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인부들이 옥상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익살스럽기도 하고 순진해 보이기도 했던 바가지 모양 눈이 사납고 귀접스럽게 바뀌어 있었다. 순영은 112에 또 신고했다.
“아가씨는 공사 방해로 이 아줌마를 고소하고, 아줌마는 법원에 공사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세요.”
안면이 익은 중년의 경관이 말했다. 순영은 한달음에 경찰서로 달려가서 고소장을 제출했다. 화단을 철거하는데 하루, 방수 작업을 하는데 삼 일이 소요되었다. 우레탄 작업을 마친 옥상의 초록색 바닥이 풀밭처럼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문제는 보기 좋고 안전한 옥상을 가진 대가가 상상 이상으로 크다는 데 있었다. 경찰서를 들락거리며 조사받는 일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리적 압박감을 주었다. 순영과 귀례가 함께 조사를 받는 날이었다. 조사 중에 형사가 전화를 받았다. 순영은 수화기 밖으로 간간이 새 나오는 목소리의 주인이 건축주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통화를 끝낸 형사가 갑자기 순영을 피고소인 다루듯 했다. 귀례에게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으면서 순영에게는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형사가 범죄 용의자 대하듯 순영을 다그치는 동안 귀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잠을 잤다.
순영은 단단한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참고인 조사를 받으러 경찰서로 가는 주민들 표정도 한결같이 주눅들고 겁먹은 모습이었다. 며칠 뒤에 형사가 순영과 귀례를 다시 불렀다. 형사는 순영에게 고소를 취하할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순영은 귀례가 사과하면 취하하겠다고 대답했지만 귀례는 거부했다. 순영을 대하는 형사의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최대한 공정하게 처리할 거고, 향후 조사는 검찰청에서 받게 될 거라고 말했다. 302호 여자가 더 자주 귀례의 집을 들락거렸다. 낙원빌라 일에 끼어든 이후 순영은 월차와 연차를 모두 이 일에 썼다. 사건이 검찰로 넘어갔으니 남은 휴가로 충분할지 걱정되었다.
순영은 검찰청의 긴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경찰서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화해하실 생각이 없나요?”
수사관이 물었다.
“저 사람이 사과하면 없었던 일로 할게요.”
정말이지 순영은 당장이라도 고소를 취하하고 싶었다.
“끝까지 갈 거예요, 사과하기 싫어요. 싫다구요”
귀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안쪽에 앉아 있던 검사의 주의를 받고서도 귀례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조사실에서 나온 귀례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끝까지 해보자고 했다며 누군가에게 전화했다. 순영은 302호 여자일 거라고 짐작만 했다. 검사가 구약식 처분을 내렸을 때 이제 다 끝났구나 싶어서 순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법정으로 나오라는 출석요구서가 날아왔다.
“벌금을 감경해 달라고 했으면 그렇게 해 주었을 텐데 끝까지 재판해 달라고 요구했으니 혐의가 드러나면 엄벌에 처하겠습니다.”
판사가 귀례에게 말했다. 귀례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계속 억지소리만 늘어놓았다. 양편으로 갈린 주민들
도 차례대로 법정에 섰다. 재판이 끝나기 전 302호는 급매로 집을 팔고 낙원빌라를 떠났다. 귀례는 벌금 이백만 원 형을 받았다.
마침내 사건이 종결되었으나 순영은 한 줄기 작고 시원한 만족조차 얻지 못했다. 일 년 가까이 시달리느라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권사님으로 불리는 302호 여자와 건축주 사이에 타일 몇 장과 거울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뭔가가 더 있을 거 같았다. 가장 궁금한 사람은 귀례였다. 그녀는 무엇을 받기로 하고 그토록 집요하게 순영을 괴롭혔을까? 벌금 이백만 원보다 더 큰 것을 받기로 했던 걸까? 벌금형을 받은 이후 귀례는 만오천 원에 불과한 공용 전기세와 수도세, 건물 청소비를 내지 않았다. 총무가 순영을 찾아왔다.
“귀례가 관리비를 안 내는 건 순영 씨한테 감정이 상해서 그런 거니까 순영 씨가 받아 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순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이가 없었다. 총무가 건축주 편에 서지 않은 덕분에 보증금을 받아내고 귀례가 벌금형을 받도록 했지만, 순영은 총무가 더 꼴 보기 싫었다. 하루도 빼지 않고 귀례에게 시달리며 경찰서와 검찰청과 법원을 들락거리는 생활을 1년 가까이 했다. 지칠 대로 지친 순영은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번 일로 오만 정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덧정없는 일을 계속 겪다 보니 사람이라면 진저리가 났다. 몇 달이 지나서야 안정을 되찾은 순영은 집에서 홈페이지와 쇼핑몰을 만들어주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귀례네 가족이 끌려간 다음 날 순영은 선별진료소로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어제 총무에게 듣긴 했지만, 막상 전화를 받고 보니겁이 더럭 났다. 마스크에 라텍스 장갑까지 끼고 현관을 나섰을 때 방역작업을 위해 계단을 올라오던 사람들과 마주쳤다. 흰옷으로 전신을 감싼 사람들은 빌라 앞 도로에도 있었다. 건물 안을 소독할 때보다 거리를 소독하는 모습이 더 실제적으로 다가왔다. 큰일이 나긴 났구나, 싶었다.
버스 세 정류장 거리에 있는 보건소까지 걸어가서 검사를 받았다. 자가격리 수칙을 되새기며 돌아오는 길이 유난히 멀었다. 혹시 양성이면? 생각만 해도 뒷덜미가 서늘했다. 2주 동안 생필품과 식품을 배달해 준다지만 제철 과일까지 보내 주지는 않을 테지. 순영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복숭아, 포도, 멜론을 주문했다. 집콕은 문제 아니나 과일을 먹지 못하는 나날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낙원빌라에 추가 확진자는 없었고 502호는 빈집이 되었다. 순영은 문이란 문은 모두 열었다. 그동안 현관에 설치한 미닫이형 방충망을 한 번도 써 보지 못했다. 네 방향의 문이 모두 열리자 베란다에서 들어온 바람이 동쪽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과 만나 집 안을 한 바퀴 휘돈 다음 현관으로 빠져나갔다. 어둠이 내려앉아도 순영은 불을 켜지 않았다. 고즈넉한 공간에 가만히 누웠다. 밤바람이 불어왔다. 선선한 밤공기에 디퓨저 향이 녹아들었다. 섬세하게 구분된 향들이 제각각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무겁지 않은 백합 향에 상큼한 레몬 향과 달콤한 자몽 향이 차례대로 후각을 자극했다. 바람결에 실린 향들은 다가왔다가 멀어지고 멀어졌다가 다시 다가왔다. 몽롱한 기분에 젖어 가만히 누워 있었다.
불현듯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가 언제까지 통용될지 의구심이 일었다. 코로나 시대 이후의 사람들도 이 명제를 믿을까? 국민들에게 인기 짱인 방역대책본부장이 정례 브리핑에서 코로나19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흩어지는 거라며 제발 모이지 말고 흩어져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에 협력과 연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면 흩어지라는 말에는 분리와 단절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흩어져야 산다는 새로운 가치가 함께 모여서 힘을 합하라는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있었다.
칩거 증후군에 걸린 방콕족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선언하는 거 같았다. 기피 대상 일호가 사람이고 두려워해야 할 존재도 사람이었다. 사람의 적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코로나바이러스가 매일매일 각인시키고 있었다.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방호복으로 감싸고, 장갑과 마스크를 끼고, 안면 보호대까지 착용한 의료진과 경찰관의 복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바이러스 보유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판명될 때까지 순영도 귀례도 더는 선량한 시민이 아니었다.
바이러스 때문에 세상이 혼란에 빠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바이러스 덕분에 순영은 처음으로 불안이나 공포 없이 한밤중에도 현관문을 열어둘 수 있게 되었다. 앞집이 빈집이 되었기 때문에, 확진자가 나온 낙원빌라에 오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누군가 곁에 있기를 바랐고 외톨이라 슬펐던 적도 있었다.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 타인의 비위를 맞추었고 하기 싫은 일도 억지로 했다. 그런데 지금은 만나야 할 사람도 만나러 오는 사람도 없어서 자유로웠다. 군중 속에 섞이지 못한다는 사실에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 소외감에 몸을 떨지 않아도 되었다.
기대한 적 없었던 한줄기 따뜻한 만족감이 순영의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지금처럼 차분하고 부드러운 환희를 느꼈던 적이 없었다. 은밀하면서도 포근한 희열이 지나간 상처와 공허를 달래주었다. 순영은 느닷없이 다가온 이 평화로운 감정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다. 꿈이라도 좋고 환상이라도 좋았다. 고요하고 아늑한 이 안온함 속에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열린 문을 통해 드나드는 바람조차 정겨웠다. 순영은 두 팔을 활짝 벌려 바람을 맞아들였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평화를 깼다. 누군가 5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센서 등에 들어온 불빛이 방충망을 지나 순영의 발치에 닿았다. 도어락 번호를 누르는 삐삐삐삐 소리에 순영이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502호 문이 닫혔다. 뒷모습이 영락없는 귀례였다. 병원에 있거나 생활 치료시설에 있어야 할 그녀가 집으로 돌아오다니. 재검사에서 음성 판정이 나왔나? 진짜 귀례였나? 잘못 본 건 아닌가? 모든 게 불확실했다. 불안과는 다른 위기감이 엄습했다. 현관문부터 닫았다. 창문도 모두 닫았다. 귀례의 언니나 동생은 아니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불안을 애써 잠재우고 침대에 누웠다.
밤새 어지러운 꿈에 시달린 탓인지 순영은 뒷골이 띵한 상태로 잠에서 깼다. 습관적으로 TV를 켜고 온종일 뉴스만 내보내는 방송에 채널을 맞추었다. 한 여자가 병원에서 나와서 길을 건너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코로나 환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아침에 인지했는데 여자는 어젯밤 9시쯤 을지로의 커피숍 CCTV에 찍힌 후 종적이 묘연하다고 했다. 화면 속 인물은 분명 귀례였다. 어젯밤 순영이 본 장면은 꿈이 아니었다. 헛것을 보지도 않았고 환상에 사로잡힌 것도 아니었다. 순영은 신고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지금이라도 신고할까? 그런데 귀례가 집에 있기는 할까? 어떻게 확인하지? 귀례와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순영은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겹쳐 들리더니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502호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남자와 여자가 문 열라고 소리를 질렀다. 연장 부딪히는 소리가 나나 싶었는데 귀청을 찢을듯한 귀례의 목소리가 순영의 방까지 들려왔다.
“안 간다고, 나를 왜 끌고 가려는 건데? 가짜로 양성 만든다고 권사님이 말씀하셨단 말이야. 내 몸에 손대기만 해 봐. 아아아악, 아아아악.”
아아악거리는 저 소리. 귀곡성처럼 소름 끼치는 저 소리. 저 소리를 또 듣게 될 줄이야. 순영은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이 분노를 폭발시키며 부르는 아아아아 소리보다 더 높고 더 날카롭다. 핏발 선 바가지 모양의 눈을 부릅뜨고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를 지르던 귀례의 모습이 떠올라 머리끝이 쭈뼛 섰다.
가짜로 양성을 만들다니? 권사님이 그랬다고? 302호 여자? 그녀와 귀례가 여전히 만나고 있으며 함께 태극기 집회에 나간다는 사실을 순영도 알고 있었다. 빌라 앞 미용실에서 들은 얘기였다. 그런데 권사님이 가짜로 양성으로 만든다고 했다니. 302호 여자가 요즘 매일 방송을 타는 그 교회 신도였나? 그렇다면 광복절 집회에도 틀림없이 갔겠지. 그럴 개연성은 충분했다. 귀례가 마스크도 쓰지 않고 소리를 내지른다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순영은 살균 소독제를 분무기에 담아 사방에 뿌리고 비누로 손을 몇 번이나 씻었다.
귀례가 체포되어 병원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온종일 뉴스에 나왔다. 덕분에 낙원빌라도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녀를 데려가기 위해 경찰관과 소방대원과 보건소 직원이 모두 출동했다. 소방대원이 현관문을 땄고, 구청에서는 빌라는 물론이고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역까지 소독약을 뿌렸다. 귀례가 또다시 탈출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제발 얌전히 치료를 받아야 할 텐데.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파스칼의 말이 틀린 것일까. 지난 시간 귀례는 어떤 생각을 했으며,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앞으로는 또 어떤 생각을 할까?
천만 원을 더 주고 햇빛을 산 건 옳은 선택 같았다. 햇빛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낙원빌라 주민들이 증명하고 있었다. 남향집에 사는 사람과 북향집에 사는 사람의 성향이 확연히 달랐다. 마음에 드는 집을 샀을 테니 빛에 관한 취향이 애초부터 달랐을 거다. 남향집보다 지분이 조금 더 많다고는 하나 북향집에서는 마주 서 있는 건물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햇빛은 물론이고 나뭇잎 하나 눈에 담지 못한다. 남향집에서는 집 안 구석구석까지 들어오는 햇볕을 쬐고, 푸르러졌다가 붉게 물들어가는 나뭇잎을 보고 까치나 박새의 지저귐을 들을 수 있다.
개인 병원이나 건강식품 업체 홈페이지를 만들어주다 보니 순영의 건강 상식이 제법 늘었다. 우울증이 계속되면 슬프거나 기분이 나쁜데 그치지 않고 판단력 혼란이나 주의력 결핍을 유발한다는 주장이 일리가 있어 보였다. ‘세로토닌은 행복감과 활력을 주는 호르몬이다. 눈을 통과한 햇빛이 뇌의 송과선에 신호를 주어야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만든다. 우울하지 않으려면 햇빛 아래서 운동해야 한다.’ 등등.
귀례는 식당 주방에서도 집에서도 햇빛과 마주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빌라 입구에 과속방지턱이나 가로등 설치를 요구하는 민원을 구청에 내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가족 수에 따라 공용 요금을 부과하지 않아서 관리비를 못 내겠다고 우겼다. 하자보수보증금을 받아내자고 제일 먼저 서명하고서도 인감증명서를 도로 내놓으라며 순영을 협박했고, 경찰과 검찰과 법원의 화해 제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302호 여자가 벌금을 내주지도 않았을 텐데 함께 집회에 갔고 확진자가 되었다. 그녀의 판단 근거는 무엇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혼란스러웠다.
낙원빌라는 부동산을 끼지 않고 건축주가 직접 분양했다. 골목 한가운데 걸려 있는 현수막을 보고 순영이 빌라 안으로 들어갔을
때 건축주는 예수 믿고 부자 되었다며 연신 자랑했다. 근처에 여러 채의 빌라를 지었는데 방주빌라, 낙원빌라, 에덴빌라 같은, 성
경에 나오는 이름을 붙였다면서 주님을 찬양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 분양이 끝나면 주차장 입구 확장 공사를 해 주겠
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막상 집을 다 팔고 나자 약속은 깨지라고 있는 거라나 뭐라나 하면서 모르쇠로 일관했다. 입주민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자동차 문짝이나 범퍼를 긁었다. 지난여름에 태풍이 몰고 온 집중 호우로 빌라 뒤편 담장이 무너졌다. 흩어진 벽돌 아 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건축 폐기물이었다. 집을 지을 때 나온 쓰레기를 묻어둔 모양이었다. 그때도 건축주는 배 째라며 뻔뻔하 게 굴었다. 옥상 공사하고 남아 있는 오백만 원으로 부족해서 세대별로 삼십만 원씩 더 걷어서 건축 폐기물을 버리고 담을 다시 쌓았다. 귀례는 물론 돈을 내지 않았다.
격리 생활을 하는 동안 순영은 인생의 여정에서 맞닥뜨리는 곤란이 자신이 가진 속성에 기인하는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일었다. 짐작만 하지 말고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물어야 한다.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고 대응해야 한다. 순영은 302호와 귀례 집에 건축주 가 타일과 거울을 붙여 주는 광경을 목격하고서도 침묵했다. 302호 여자에게 귀례를 사주하는 이유가 뭔지 따져 묻지도 못했다. 현관문에 붙어 있는 십자가와 권사라는 직함을 믿었고, 온유한 자가 복을 받는다는 성경 구절을 믿었고, 무엇보다 온유한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을 곱씹을수록 지혜라고는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온종일 뉴스에 등장하는 귀례를 보고 있자니 순영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귀례와 302호 여자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던가. 나는 왜 번번이 타인의 의도에 휘말리는가. 뒤통수를 맞고, 우울해지고, 종래에는 견딜 수 없는 자기혐오에 빠져드는가. 도대체 왜?
502호가 다시 빈집이 되었지만, 순영은 차마 현관문을 열지 못했다.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초초 미세한 틈만 있어도 흘러드는 편견과 혐오가 코로나바이러스 보다 더 빨리 더 넓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순영이 자신을 가두었던 건 물리적 벽이었지만 그 너머에 더 많은 유무형의 완고한 벽이 있었다. 순영은 순영대로, 귀례는 귀례대로, 총무는 총무 대로, 건축주는 건축주대로, 각자 자신의 벽에 갇힌 셈이었다. 스스로 만든 벽에 갇혀 사는 게 참된 삶이란 말인가. 인간의 적이 인간이라는, 외면하고 싶었던 명제가 진실이었든가. 햇빛만으론 안될 거 같았다. 현관문을 닫는다고 해결될 문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망연히 서 있던 순영은 포장용 테이프를 몽땅 꺼냈다.
TV에서는 패널들이 바이러스의 발현과 대처 방안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낮 동안 동굴 천장에 매달려 있던 박쥐는 땅거미가 지기 시작 해야 먹이를 찾으러 나온다. 빛이 아니라 어둠을 선택한 사람들 을 따라 야행성 박쥐가 바이러스와 함께 우리에게 왔는지도 모른다.
이제 인간은 처음 보는 사람과 악수하고, 친구나 동료와 어깨동무하고, 정다운 사람과 뺨을 비비거나 입을 맞추는 행위를 다
시는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모든 개인은 서로 다른 모양의 칼날을 가슴에 품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찔리니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지 마라.
병들지 않으려면 단단한 벽을 쌓아라.
오염에 물들지 않으려면 흩어져라.
서로 뒤섞인 말들이 어지럽게 집안을 떠돌았다. 패널들의 구호를 실행하듯 순영은 테이프를 집어 들었다. 미친 듯 틈을 막고 있을 때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미세한 입자로 이루어진 마음이 파동으로 변하면 시공간을 초월해 이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수백 수만의 벽을 세우는 것도 마음이고, 벽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고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것도 마음입니다.
순간 순영은 손을 멈추었다.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소통은 생명의 숨입니다….”
패널 중 한 명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환청 같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이 순간 순영이 틀어막고 있는 틈새들이 소통의 통로라는 사실만은 분명한 듯했다. 불순한 혐오와 괴팍한 편견이 바이러스와 함께 틈새를 비집고 스며든다 해도 그 틈이야말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숨통일 터였다.
음악이 흐르고 광고가 지나갔다.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를 2주간 연장한다는 앵커의 기계적인 말이 햇빛 가득한 집안을 채웠다. 포장용 테이프를 손에 든 순영은 물체가 된 듯 움직일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