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누구에게나 잊히지 않는 어느 날이 있다.
내가 2021년 11월 18일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혔을 때, 11월18일은 아직 오지 않은 날에 머물러 있었다. 11월18일은 내일이었고, 나는 내 예감이 틀리기를 바랐다. 내일은 수능시험일이라 줄여서 부르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이다. 기상청은 최고기온이 15℃까지 올라서 수능 추위는 없겠다고 예보했다. 내일 아들이 수능시험을 본다. 기온이 높아 오후에는 졸릴지도 모른다. 나는 하나씩 벗을 수 있도록 아들의 옷을 챙긴다. 집에서 시험장까지 가는 최단 거리 도로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우회 도로를 검색한다. 지난 2년간 코로나19 때문에 재택 수업과 등교 수업이 반복되었다. 확진자로 병상에서 시험을 치러야 하는 수험생이 최소 66명, 별도시험장을 배정 받아야 하는 격리자가 12명. 아들은 확진자도 아니고 격리자도 아니지만, 지나치게 예민한 아들의 대장 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한다. 정서적 긴장이나 스트레스로 인해 장관의 운동 및 분비에 장애를 일으키는 과민성 대장증후군은 배가 살살 아프다가 품고 있던 모든 것을 쏟아내야 멈춘다. 시험 중에 이 증상이 생기면 시험을 포기해야 한다.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수험장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들은 학창 시절 내내 포도즙과 커피만 마시며 시험을 쳤다. 머리가 휙휙 잘 돌아가게 하려면 뇌에 포도당을 쉼 없이 공급해야 한다. 쌀이나 밀 같은 식품의 구성성분인 탄수화물은 잘게 쪼개서 당 분자가 하나인 단당으로 만들어야 우리 몸이 흡수할 수 있다. 포도에 있는 당이 단당이라서 우리는 당 분자가 하나인 당을 포도당이라고 통칭하게 되었다. 우리 집에는 설탕을 넣지 않고 끓인 포도즙이 가정상비약처럼 비치되어 있다. 나는 계피를 넣고 끓인 바나나 차를 아들에게 내민다. 바나나 차는 숙면을 돕는다. 아들이 내일은 커피를 연하게 내려 달라고 당부한다. 아들을 침대에 눕히고 잘 자라고 말한다. 조심조심 밖으로 나온 나는 거실에 있는 아들의 배낭을 살핀다. 필기도구는 잘 들어 있는지, 포도즙 파우치는 넉넉한지, 여분의 마스크가 있는지 등등. 오늘만이라도 남편이 일찍 들어오기를 바랐다. 아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싶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애타게 기다려 보지만 남편은 오지 않는다. 벽시계의 시침과 분침의 간격이 점점 좁아진다. 두 바늘은 조만간 12에서 만날 것이다. 전등의 조도를 낮추고 침실로 들어간다. 고요하다. 적막강산이 따로 없다. 희미하게 들리는 발소리. 벽이 가로막고 있어도 남편의 움직임이 훤히 보인다. 그는 곧장 서재로 간다. 26년 전 수능시험일 전날. 나는 남편의 쪽지를 받았다. 쪽지에는 내일 영화 보러 가자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는 수험장 뒷문으로 가서 남편을 만났다. 엄마가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과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영화관에 가서 상영시간이 임박한 영화를 보았다. 제목이 ‘레옹’이라서 프랑스 영화인가 했고, 포스터에 건장한 남자와 어린 소녀가 있어서 로맨스 영화인가 했다. 그런데 로맨스 영화도 아니고, 느와르도 아니고, 액션도 아닌, 조금은 난해한 영화였다. 화분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건장한 킬러와 가냘픈 다리를 가진 12살 소녀가 주인공이었다. 건물 옥상에 엎드려 소총의 가늠쇠에 눈을 댄 소녀의 앳된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소녀가 마피아에게 인질로 잡힌다. 킬러는 살인청부업자에게 맡겨 놓은 돈을 찾으라고 하며 소녀만 탈출시킨다. 살인청부업자는 소녀에게 돈을 다 써 버려서 줄 게 없다고 말한다. 소녀는 킬러의 화초를 학교 마당에 묻으며 “우리 이제는 안전할 거야.”라고 속삭인다. 그날 나는 킬러의 돈을 다 써 버린 살인청부업자에게 몹시 화가 났었다. 펄펄 뛰며 화를 내는 나에게 남편은 그게 영화의 주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영화 하나 보는데 주제는 뭔 주제. 나는 킬러의 화초를 소녀가 묻는 장면에서 눈물이 났다는 남편을 찌질하다고 흉봄으로써 복수했다. 찌질한 감상주의자라고 흉을 보면서도 나는 남편을 사랑했다. 청혼한 사람도 나였다. 이런저런 생각이 쉴 새 없이 떠오른다. 입 안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요동친다. 내가 맞이했던 수능일 전날보다 더 떨린다. 나의 아들, 남편과 붕어빵인 사랑스러운 내 아들. 이제 곧 청년이 되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그리고 아버지가 될 내 아들이 시험을 친다. 잠들지 못하고 누워 있으려니 피돌기가 멈춘 듯 팔다리가 저리다. 오늘은 어제가 되고 내일은 오늘이 된다. 어제는 벌써 지나갔고 오늘은 이미 왔다. 나는 그만 일어나기로 한다. 세수하고 화장대 앞에 앉는다. 스킨을 바르고 두드리고, 세럼을 바르고 두드린다. 로션, 영양크림, 자외선 차단제, 화운데이션을 순서대로 바르고 두드린다. 천천히 오래오래 두드린다. 콤팩트로 얼굴 전체를 두드린다. 의식을 치르듯 정성들여 두드린다. 굵은 붓에 블러셔를 묻혀서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선을 따라서 스치듯 가볍게 문지른 다음 귀에서 입술까지 사선을 긋는다. 아이라이너로 눈 아래위에 선을 그린다. 속눈썹이 길고 풍성하게 보이도록 마스카라를 꼼꼼하게 바른다.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는 것으로 화장을 마무리한다. 평소에는 늘 화장할 시간이 부족했다. 정성껏 두드리기는커녕 마스크 핑계를 대며 맨얼굴로 뛰어나가기도 했다. 긴 시간 정성들여 화장했으나 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다. 소리 없이 들어와 잠든 남편을 위해 아침상을 차린다. 오븐에서 꺼낸 통밀빵을 접시에 담는다. 버터와 리코타 치즈와 샐러드도 예쁜 그릇에 담는다. 오렌지는 손으로 집어 먹기 좋도록 가운데 부분의 껍질을 남기고 썬다. 커피는 남편이 내릴 것이다. 나는 아들을 위해 연하게 커피를 내린다. 보온병에 커피를 담는다. 아들의 배낭에 보온병을 넣고 다시 한번 점검한다. 모든 게 제 자리에 잘 있다. 시간이 고무줄처럼 늘어나기라도 했는지 아침이 쉬이 오지 않는다. 내일 아침도 오늘 아침과 같을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심상하게 일상을 영위하게 될까. TV를 켜고 뉴스 방송에 채널을 맞춘다. 버스 앞 유리창에 고사장 이름이 붙어 있으니 잘 보라거나, 열이 나면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하라는 등의 안내가 나오고, 대선 후보들에 관한 소식이 뒤를 잇는다. 오늘이 빨리 지나가면 좋겠다는 마음과 영원히 오늘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두 마음이 충돌한다. 아들이 거실로 나온다. 잘 잤어? 뭐 그런대로. 아들은 늘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대로’, ‘그렇지 뭐’, ‘그냥’, 나는 안도한다. 심상한 대답은 좋다 혹은 잘했다는 신호다. 불안이 조금 누그러진다. 남편은 왜 아직 나오지 않는 걸까. 시험 잘 보라는 아빠의 말을 듣지 못하면 아들이 서운하지 않을까. 간절하게, 애타게, 미치도록 남편이 빨리 나오기를 고대한다. 서재에 들어가 볼까? 마음 같아서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나는 홀로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시동을 걸고 앉아서 엔진이 공회전하는 소리를 듣는다. 엔진을 예열하기 위함이다. 그래야 엔진의 성능이 좋아진다고 말해 준 사람은 남편이었다.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에 그와의 추억이 서려 있다. 가속 페달에 발을 얹고 출발한다. 현관 앞에서 아들이 손을 흔든다. 젊은 날의 남편이 보도 위에 서 있는 것 같다. 시간이 거꾸로 흐른 건 아닌지 착각할 정도로 아들은 남편을 닮았다. 나는 왜 하얀색 점퍼를 꺼내 놓았을까. 하얀색은 남편이 가장 선호하는 색이다. 아들을 조수석에 태우고 시험장으로 간다. 수능시험일에는 수험생을 태운 차량도 시험장 전방 200m까지만 갈 수 있다. 아들은 200m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려 달라고 한다. 나는 선선히 동의한다. 가까이 가자고 해도 아들은 거절할 게 뻔하다. 아들은 튀는 걸 싫어한다. 튀는 게 싫어서 전교 1등도 하지 않는다. 언제나 전교 2등만 한다. 그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어느 날 아들의 담임선생님이 내게 전한 말이었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자기도 그렇다며 아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보라고 했다.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전교 1등과 전교 2등이 무슨 차이가 있으랴. 나는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진짜 튀기 싫어서 그러는 건지도 모르지 않는가. 어렸을 때는 초록색이나 빨간색 같은 옷을 좋아했다. 네 살 때였나? 여자는 치마도 입고 바지도 입는데 남자는 왜 바지만 입어야 하느냐며 따지기도 했다. 나는 신혼여행 때 입었던 연두색 원피스를 뜯어서 아들의 원피스를 만들었다. 머리에 핀을 꽂고 치마를 입은 채 분무기로 물을 뿌리는 아들의 사진이 있다. 그랬던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우중충한 색깔의 옷을 선호했다. 옷에 대한 선호도가 바뀐 것처럼 타인의 시선을 받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 않을까. 일등만 하면 교만해질지도 모르니 잘된 일이라며 나 자신을 달랬다. 위안을 위한 핑계가 신념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아들의 속마음을 캐려 들지 않았다. 아들은 가끔 1등을 하기도 했으나 평균은 2등이었다. 내가 정말 아들을 이해한 것일까? 이해와 오해의 차이는 모음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 간극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고개를 수그리고 걸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아들에게 시험 잘 보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아들은 말이 없는 편이지만 나는 아니다. 무엇이 나를 침묵하게 했을까. 그런데 나는 어디로 가지? 팬데믹이 수능시험날의 풍경도 바꿔 놓았다. 이제 부모들은 교문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릴 수 없다. 어젯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명동 성당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11월 16일(화)부터 11월18일(목)까지는 미사 외 대성전을 개방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올림픽 도로를 타고 무심하게 달린다. 자동차의 리듬과 신체 리듬이 맞아떨어지면서 팔딱이던 심장이 차분해진다. 오른쪽에 강이 있다. 성수대교의 교각이 보인다. 오래전 저 다리의 상판이 칼로 무 자르듯 뚝 끊어졌던 적이 있었다. 버스와 승용차와 다리 위를 걷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과거는 잊히고 참극에 대한 기억도 잊혔다. 망각에 잠긴 자동차들이 다리를 건너가고 건너올 뿐. 기억하지 못하면 시간이 사라진다. 시간은 오직 인간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기억이 영속성을 잃으면 과거와 미래가 사라지는 것이다. 과거의 어느 한 시점을 기억하고, 미래의 어느 한 시점을 가정할 수 있는 건 전두엽이 발달한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한다. 지각, 단기 기억, 실행 기억, 계획, 규칙성 등의 사고를 생성하는 전두엽은 이미 발생한 사건의 규칙성을 이용해 충동적으로 행동해도 될 때와 그러면 안 될 때를 알려 준다. 사업이든, 게임이든, 생활이든 세상은 규칙과 우연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이렇게 중요한 전두엽이 제발 좀 쉬게 해 달라고 애원한다. 내 전두엽에는 쉼이 없었다. 집에서건 직장에서건 계획하고 결정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다. 쉬고 싶다는 울림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친다. 나는 전두엽의 몸부림에 공감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모든 판단을 유예하고 싶다.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아들은 시험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갈 테니 데리러 올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아들에게는 영화를 보거나 식도락을 즐기거나 강변을 거닐 여자 친구도 남자 친구도 없는 것일까. 저 멀리 한강철교가 보인다. 이 길이 막다른 길일지라도 나는 멈추고 싶지 않다. 지구는 둥그니까 계속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날 수 있겠지. 그런 동요가 있었다. 아이 때는 나도 온 세상 사람들을 모두 만나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 밀폐된 차 안에 혼자 앉아 있는 게 좋다. 묵직하고 뜨거운 것이 목젖을 타고 올라온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난다. 소리 내어 울고 싶다. 통곡이라도 하고 나면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뜨거운 덩어리가 저절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내게는 소리 내어 울었던 기억이 없다. 엄마가 안 보여도 울지 않는 착한 아이였단다. 유아기 아이들의 정상적인 애착 관계는 엄마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가 나타나면 울음을 그치는 거라고 한다. 나는 왜 울지 않았을까. 엄마는 울지 않는 아이에 대한 의문이 없었을까. 기도해야 하는데…. 아들이 시험을 잘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데…. 몇 개인지 모를 다리를 더 지났다. 불현듯 애기봉이 떠오른다. 나는 허공에 대고 “애기봉 찾아줘.”라고 말한다. 네비게이션이 김포한강로를 타고 가라고 대답한다. 나는 착한 아이처럼 네비게이션 속 여자의 목소리를 따른다. 우회전과 직진과 좌회전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통일전망대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전망대로 올라간다. 1.4㎞만 더 가면 북녘땅이라고 적혀 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마을이 낯익어서 오히려 당혹스럽다. 사람 사는 곳임이 분명한 저 곳. 그러나 갈 수 없는 곳. 강물만 도도히 흐른다. 보이지 않으면 가고 싶다는 욕망도 없을 텐데. 마음은 있어도 가지 못하는 곳이 북녘땅이라면 남편과 나 사이는 정반대다. 한집에 살면서도 마음의 거리는 지구와 달만큼 멀다. 그는 집과 가족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수능시험날 아들에게 격려의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그의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 가 있는 걸까? 모래톱에서 새 몇 마리가 날아오른다. 내게도 날개가 있으면 좋겠다. 창공으로 날아오르고 싶다. 그의 갈망도 이런 것일까? 나도 남편처럼 하늘에서 뛰어내려 볼까. 스카이다이빙. 남편이 새롭게 시작한 취미생활이다. 그는 테니스를 치다가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오토바이를 탔다. 우리 집 차고에는 할리데이비슨이 두 대나 있다. 나는 단 한 번도 남편의 취미생활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었다. 돈을 벌고, 집을 사고, 사무실을 넓히고, 직원들을 더 뽑고, 건물을 사고 땅을 사느라 바빴다. 남편이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남편이 생활비를 보탤 이유는 없었다. 돈은 내가 넘치도록 벌고 있으니까. 남편이 자신의 월급을 취미생활에 쏟아붓도록 해 줄 수 있는 나의 능력에 만족했다. 그가 새로운 취미를 발굴하고, 아이처럼 들떠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몰입해서 기술을 익히고, 어느 순간 경지에 이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기대가 가득한 반짝이는 눈, 득의에 찬 미소, 명랑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모험담 같은 것들이 좋았다. 큰 키에 근육질의 균형 잡힌 몸을 가진 그는 어떤 옷을 입건 어떤 동작을 하건 시각적으로 멋있었다. 하느님이 빛과 어둠을 가르고, 땅과 바다를 나누고, 동식물을 만들고, 남자와 여자를 만들고…. 그때마다 스스로 만족하신 것처럼 나도 스스로 만족했다. 멋진 남편과 남편을 닮은 아들과 내가 이룬 것들과 앞으로 이루게 될 많은 것들에 만족했다. 남편이 스카이다이빙을 하겠다고 했을 때 부부싸움이란 걸 처음 했다. 매번 목숨을 걸어야 하는 행위라서 반대했고, 생명 보험도 들어주지 않는 위험한 취미라서 반대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남편의 취미생활에 동참하려고 노력했다. 테니스를 쳤고, 스쿠버다이빙을 했고, 스키를 탔다. 이 정도는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천 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스카이다이빙은 함께 할 수 없었다. 아들이 하도록 하지도 않을 거다. 남편은 새 오토바이를 사면서 타던 오토바이를 처분하지 않았다. 아들과 함께 달리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아들이 대학생이 되면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일주를 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남편의 꿈을 지지했다. 쌍둥이처럼 꼭 닮은 부자가 멋지게 차려입고 해변을 달리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그러나 그는 수능일 전날은 물론이고 수능일에도 아들과 대면하지 않았다. 변화는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왔다. 하늘에서 뛰어내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말수가 조금씩 줄어들더니 사색에 잠길 때가 많아졌다. 그는 더 이상 장황하게 모험담을 펼쳐 놓지도 않았고 큰 소리로 웃지도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깊어가는 그의 눈이 수도자를 닮아 간다고 느꼈다. 깊어가는 그의 눈빛에서 내가 감지한 건 불온不溫이었다. 온기 없는 투명한 눈과 마주하는 일이 몹시 힘들었다. 그가 스카이다이빙을 하러 해외로 나갈 때면 혹시 여자와 함께 가는 건 아닐까 의심하고는 했다. 차라리 애인이 생겼다고 하는 편이 마음 편할 거 같았다.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불안보다 외도가 대응하기 쉽다. 살다 보면 아내 아닌 다른 이성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일탈이라면 못 본 척 해 줄 수도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머리를 굴렸다. 아들에게 좋은 아빠 노릇만 해 준다면, 가정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나를 다그쳤다. 남편은 스펙도 좋고, 돈도 잘 쓰고, 취미생활도 다양하고, 잘 생겼다. 누구나 사랑에 빠질 법한 남자다. 매력 넘치는 남자가 내 남편이라서 행복했다. 그런데 아무리 세심하게 관찰해도 여자가 생기면 나타날 법한 변화가 남편에게는 없었다. 낯선 향기를 풍기지도 않았고 이전보다 외모에 더 신경 쓰지도 않았으며 휴대폰을 자주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변화는 내면에서 일어난 것 같았다. 수도자를 닮아 간다는 느낌이 확신으로 바뀔 무렵 남편이 가족에게서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너에게서’가 아니라 ‘가족에게서’라고. 가 족 에 게 서.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나뿐만 아니라 아들 곁에서도 떠나고 싶다니. 아내인 내게서 떠나고 싶다고 했다면, 그랬다면 이해라는 걸 해 볼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족으로부터 떠나고 싶다고 했다. 왜? 도대체 왜?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남편은 아들이 수능 시험만 치르면 떠나겠다고 통보했다. 오늘이 그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떨치기 어렵다. 나는 다만 오늘이 아니기를 빌 뿐이다. 묵주를 꺼낸다. 부자가 나란히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전국 일주를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남편이 가족 곁을 떠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저 멀리 모래밭에 새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다. 다정해 보인다. 우리 가족에게도 저런 순간이 있었다. 지난봄 친구와 함께 남쪽에 있는 산사에 갔다. 친구는 매년 스님에게 와서 신수를 보는데 스님이 주의를 주는 사안은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불현듯 남편에 관해서 묻고 싶었다. 남편의 생년월일을 받아든 스님의 첫마디는 “이 처사님은 가족에게서 떠나고 싶어 하네.”였다. “자신이 살기 위해 떠나려는 것이네, 그러니 보내 주시게.” 하고는 말문을 닫으셨다. 선문답이 따로 없었다. 나와 스님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친구가 날씨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었다. 나는 상세하게 캐묻고 싶었으나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그래서 침묵했다. 자기가 살기 위해 가족을 떠나려 한다는 그 말.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나의 무엇이 남편을 살지 못하게 하며, 아들의 무엇이 아버지를 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나와 아들 곁을 떠나도록 조종하는 게 그의 생존본능이라니. 동의하기 어렵다. 날아오른 새들이 힘차게 날개짓을 하며 북쪽으로 날아간다. 나는 시간이 길게 늘어나거나 멈추기를 바란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수능시험을 보는 아이들은 고사장에 갇힐 테고 나도 이 자리에 붙박이겠지만 상관없다. 남편은 자유를 원한다고 했다.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자유낙하 할 때처럼 완전히 가벼워지고 싶다고 말했다. 일정한 높이에서 정지한 물체가 중력重力의 작용만으로 떨어지는 운동이 자유낙하自由落下다. 자유낙하 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게가 제로라고 느끼지만 실제로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게 또는 중량重量은 지구가 지구상의 물체에 가하는 중력의 정도인데 이공계 석사인 남편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남편은 자신의 무게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의 가벼움을 원한다고 했다. 가벼워지기 위해, 완전히 자유로워지기 위해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아내와 아들이 싫어서도 아니고 다른 여인을 사랑해서도 아니라면 도대체 왜? 그는 왜 0.0001g의 무게조차 버거워하는가. 내가 문제인가? 나는 떠나고자 하는 남편조차 사랑한다. 늘 그래왔듯 이유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의 그를 사랑한다. 내 삶은 그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철저히 구속됨으로써 행복했고 영원히 구속되기를 바랐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선택의 방향이 정해졌을 뿐이다. 갈 수 없는 마을을 앞에 두고 처음으로 자유에 대해 생각한다. 영화 속 킬러는 소녀에게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절대 네가 다시 혼자가 되는 일은 없을 거야. 사랑해.’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죽고 소녀만 남았다. 킬러는 언제 자유로웠을까? 화초를 겨드랑이에 끼고 다닐 때? 아니면 소녀를 사랑한 이후? 남편이 꿈꾸는 자유의 의미를 몰라서 혼란스럽다. 아들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집을 나가지는 않겠지. 휴대폰이 울린다. 받지 않는다. 또 울린다. 받지 않는다. 딩동. 메시지 함을 연다. 엄마, 아빠가 집을 나갔어. 내게 편지를 써 두고. 어쩐지 집에 빨리 오고 싶었어. 내 책상 위에 편지가 있었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떠나는 건 아니래.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 느낌이야. 수면에서 반사되는 칼날 같은 빛살들. 빛살 사이로 남편의 모습이 아롱진다. 나는 두렵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차를 버려두고 비탈을 내려간다. 넘을 자유가 없는 강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나는 다만 저 강을 건너고 싶다.
(아라문학 2022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