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해방일지: 아내 134일째
11월 4일(금) 초겨울의 공기
어제 오랜만에 영화를 봤다. 양자경 주연의 <Everygthing everywhere all at once>이다. 남편은 나보다 하루 먼저 봤다. 하루 먼저 이 영화의 세계를 접한 남편은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것 같았다. 영화 보자마자 애들 생각이 난다고 하고, 자꾸 나에게 잘해주었다.
난 이 영화가 멜로 영화인 줄 알았다. 왠지 그럴 것 같은 제목이라서. 난 멜로를 좋아하니까 영화를 보고 싶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남편과 아이들 생각이 났다.
다중화된 세상에서 다양한 내가 있다면 내 인생의 순간순간마다 선택의 기로에 따라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내가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나의 인생은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인생일까? 이런 생각을 나만 해본 적이 아니라는 것이 신기했다. 두 가지의 생각들이 맴돌았다.
공교롭게도 최근 나는 이 세계와 나, 내가 아닌 세계로 분리하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은 무한하지만 내가 느끼는 나의 세계는 한정돼 있다. 아무리 이 세계에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자유로움이 존재해도 나의 세계는 워킹맘, 애 둘 육아, 남편, 쫓기는 하루로 국한된다. 내 삶이 끝나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유한하게 지속되겠지만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사후세계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 없는 편)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세계의 내가 아니어도 중첩된 다른 세계들에서 각각의 인생을 살고 있는 내가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 이 영화가 탄생된 것이므로. 그렇다면 왠지 조금 위로가 된다. 어딘가에서 내가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이뤄내지 못한 것들을 이뤄낸 내가 존재한다면 그 가설 만으로도 약간의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내 인생의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텐데 과연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물음이다. 보통 이런 생각은 '현생'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하게 된다. 내가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직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 대학교를 가지 않았더라면, 내가 중학교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더라면 등이다. 그렇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다시 시간을 돌린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어바웃 타임>에서 주인공이 아이가 태어난 뒤 시간을 되돌리지 못하는 것처럼 나 역시 그러했다. 나에게 찾아온 첫째와 둘째. 이 아이들이 없는 (있더라도 다른 아이일) 세계로 돌아갈 자신은 없기에 나에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있더라도 그 시간은 둘째를 임신한 작년 가을 정도까지밖에 되돌릴 수 없다.
결국 지금 세계의 내가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설사 지금의 내가 worst 나에 가깝더라도 나는 있는 힘껏 살아내야 한다. 다정함의 힘을 믿고 말이다.
이 영화는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표현보다, 이야기가 굴러간다는 표현이 더 걸맞은 영화다. 그 정신없음에도 내 집중력을 모두 모아 나는 에블린이 딸 조이를 대하는 모든 장면, 그 설정에 공감이 됐다. 모든 엄마들이 내 자식 안에 들어있는 '조부 투바키'와 대결하곤 하니까.
나를 저릿하게 만든 이 대사들도.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우리 모두 다정해야 한다는 거야.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 우리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를 때 말이야"
"그 모든 거절과 그 모든 실망이 당신을 여기로 이끌었어, 이 순간으로"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난 너와 여기 있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