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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Aug 01. 2021

낙하가 추락이 되지 않게

악뮤 [낙하]의 가사만을

악뮤 [낙하] 가사

말했잖아 언젠가 이런 날이 온다면 난 널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죄다 낭떠러지야, 봐.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아플지도 모르지만
내 손을 잡으면 하늘을 나는 정도 그 이상도 느낄 수 있을 거야
눈 딱 감고 낙하-하- 믿어 날 눈 딱 감고 낙하
눈 딱 감고 낙하-하- 믿어 날 눈 딱 감고 낙하

초토화된 곳이든 뜨거운 불구덩이든 말했잖아 언젠가 그러 날에 나는 널 떠나지 않겠다고
죄다 낭떠러지야, 봐.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아플지도 모르지만
내 눈을 본다면 밤하늘의 별이 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셋 하면 뛰어 낙하-하- 핫 둘 셋 숨 딱 참고 낙하
셋 하면 뛰어 낙하-하- 핫 둘 셋 숨 딱 참고 낙하

Ooh show how we love  보여주자 웃을 준비를 끝낸 그들에게 아무것도 우리를 망가뜨리지 못해
눈 딱 감고 낙하-하- 믿어 날 눈 딱 감고 낙하
셋 하면 뛰어 낙하-하- 핫 둘 셋 숨 딱 참고 낙하



    우리의 삶은 어떤 상실과 우울로 구성되어 있다.

신자유주의는 우리가 언제나 위기에 노출된 존재로써, 그리고 신체로써 스스로를 그리고 타인을 조직하기를 주문한다. 우리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항시적인 위기 속에 위치한다. 그리고 그 출구없음의 상태에서 우리는 살아가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조차도 신자유주의는 알맞게 골라준다. 즉, 우리가 욕망해야 하는 것은 어떤 방법이든지 출구를 모색해내고자 하는 것(그것이 자기파괴이든, 사회변혁이든)이 아니라, 오히려 출구없음을 통제할 수 없는 변인으로 오로지 받아들이고, 그것을 준칙으로 나와 타인을 구성해야만 한다는 ‘진리’이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와 타인에게 노력할 것을, 버텨내기를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존재하는 대학교라는 공동체에서 노동자가 과도한 업무로 사망에 이르러도, 그것은  살인적인 노동강도라는―코로나 판데믹과 같은 실질적인 위기 요인이 초래한 위기이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위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 위기라는 한계를 거부하거나(노동조합의 항의), 그 한계를 상쇄해낼 만큼의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한다(노동과 관계없는 영어 시험으로 모욕을 주어도 여기선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노력을 보여주었어야 할 것일 뿐이다). 여기에 더해서 자신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노력하고 있다고, 인정해달라며 폭력적으로 울어댄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통제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진짜 출구를 찾지 못할까? 그에 대한 대답이 어떠하든지 간에,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투쟁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당연한 것을 전유하고, 전치하고, 거부하면서 균열을 이어나간다. 이 노래는 어떨까? 언뜻 보기에는 자기파괴적인 내용으로 들리는 이 노래는 분명 사회의 변혁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 이 노래는 체념적인 것일 뿐인가. 악뮤는 무엇을 전하고 싶었을까.


    노래의 첫 구절은 이렇다. “말했잖아 언젠가 이런 날이 온다면 난 널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이 문장에서 “너”는 “이런 날”에 당도해있다. “이런 날”은 “초토화된 곳”이거나 “뜨거운 불구덩이”와 비교된다. 거기서 주체는 살아갈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죄다 낭떠러지야 봐”라고. 위기와 출구없음의 상태를 직시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너”에게 말을 걸고 있는 “내”가 존재한다. 어떻게 보면 이런 “내”가 출구없음의 상태를 직시할 것을 요청하는 주체이다. ‘나’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아플지도 모르지만”이라고, 자신도 확신하지 못함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나는 널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고,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 손을 잡으면 하늘을 나는 정도 그 이상도 느낄 수 있을 거야”, “내 눈을 본다면 밤하늘의 별이 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야”라고 속삭인다. 그리고 손을 마주 잡고, 눈을 마주친 채로 “낙하”하자고 권유한다.


    여기서 “내”가 “너”와 같은 상태인지는 알 수 없다. 같은 상황이든 아니든 ‘나’는 “너”와 함께 뛰어내릴 준비가 되어있다. “Show how we love”. 사랑이다. 나를 사로잡는 사랑과 함께 낙하한다. 여기서 낙하는 출구없음에 내몰린 추락이, 죽음이 아니다. 오히려 출구없음에 대한 부정이다. “아무것도 우리를 망가뜨리지 못”한다. 출구없음을 받아들일 것을, 그것에 사로잡힐 기회를 낙하를 통해서 박탈해낸다. “내 손을 잡으면 하늘을 나는 정도 그 이상을 느낄 수 있을 거야”, “내 눈을 본다면 밤하늘의 별이 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추락의 끝은 오히려 초월이라는 역설이다. 이런 역설은 ‘나’와 “너”를 그리고 우리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웃을 준비를 끝낸 그들에게” 제시된다.


    그들은 ‘나’와 “너”의 낙하를 어떻게 볼지 모르겠다. 그러나 비웃을 준비를 끝낸 그들에게 사랑의 방법을 보여주어서 작은 당황이라도 남겼으면 좋겠다. 출구없음에 대한 저항으로, 그리고 이런 날이 오더라도 손을 놓을 수 없고, 눈을 맞출 수밖에 없는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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