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은 나쁘다.
비건을 지향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 괜히 불편하게 하지 말아야지 하던게, 공장식 축산 산업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자꾸만 한 두마디씩 식탁 위에서 나오게 된다.
"달걀만이라도 빼고 먹음 안될까..?"
"맛있어? 그거 결국 동물 시체인데.. 버섯만 먹어도 맛있다?"
"남의 가슴살을 왜먹냐..."
"남의 젖을 왜먹냐..."
...
..
.
결국 지난 명절 때 나의 비건 강요 1인 시위를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적당히, 적당히! 너가 하려는걸 존중해, 근데 강요는 하면 안되지!!!"
일단은 입을 다물었지만, 속으로는 다시 굳게 다짐한다. 언젠가는 명절날 조상님께 채식 밥상으로만 대접하는 날을 만들고말테다. 조상님, 용서하세요. 하지만 이미 돌아가신 조상님들 때문에 다른 동물을 죽일 수는 없잖아요.
내 생각은 그렇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상이 있고 다양한 신념이 있다. 이런 것들은 도구가 될 수 있다. 잘 쓰면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나쁘게 쓰이면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민주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종교와 이념은 때로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역사 속에서 무수한 피를 흘리게 해왔다. 이런 것들에는 옳고 그름이 없으니까.
옳고 그름이 존재하는 문제도 있다. 난 비거니즘이 가치관이나 신념과 같은 일종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나 도구보다는 옳고 그름이 딱 떨어지는 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육식은 나쁘다. 육식은 윤리적이지 않다. 육식은 비도덕적이다. 야생에서 약육강식에 논리에 따라 동물들은 서로를 잡아먹고 사냥하는데 이 자연스러운 일이 대체 왜 나쁘냐고? 왜냐하면 우리 식탁에 오르는 고기 중 단 1g도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생산되지 않았으니까.
'동물학대를 하면 안 된다'라는 주장에 대해 가치관이나 신념의 차이라고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태어나자 마자 죽인다거나(산란계에서 가치가 없는 수평아리는 태어나자마자 분별되어 죽임을 맞이한다), 마취없이 불알이(동물복지 규정조차 이 관행을 금지하지 않는다)나 엉덩이 가죽을 도려낸다거나(양털을 깎기 전에 항문 주위에 배설물 등을 묻게 하지 않기 위해 엉덩이 주변 가죽을 도려내는 관행을 '뮬싱'이라고 한다), 평생 임신과 출산만을 반복하며 몸 하나 뒤집을 수 없는 공간에서 살다가 원래 수명의 반의 반도 살지 못하고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일. 이런 것들이 과연 가치관에 따라 생각을 달리해볼 수 있는 문제일까?
너무나 명백하다. 지금 우리의 관계는 틀렸다. 우리는 이렇게 많은 고기를 식탁에 올릴 필요가 없다. '육식'은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의 육식은 틀렸다. 나쁘다. 윤리적이지 않고 비도덕적이다.
조금 더 나아가, 공장형 축산업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행복하고 완벽한 환경에서 길러진 동물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자신을 고기로 먹으라며 내어줄 생명은 없다. '가축'이라는 존재는 결국 인간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낸 착취관계이지 않던가? 그리고 우리가 언제 그들에게 완벽한 삶, 아니 최소한의 존엄성이라도 유지될만한 삶을 보장해준 적이 있었던가? 닭가슴살 한 쪽이 이 천원에, 통닭 한 마리가 구 천 구 백원에, 삼겹살 1인분이 만 이천원이 되려면, 그 생명을 기르기 위해 얼만큼의 비용을 들었을지 상상해본 적이 있던가?
설사, 완벽하게 동물의 본능에 충실한 환경은 만들어주었다 해도 죽음의 순간 모든 동물은 고통을 느낀다. 이 사실에는 변화가 없다. 개도 고양이도, 소도 돼지도, 광어도 병어도, 문어도 낙지도, 모두 고통을 느낀다. (여기서 식물의 고통을 얘기할 사람은 식물을 먹는다는 것과 동물을 먹는다는 것의 근본적 차이에 대한 글이 무수히 많이 존재하므로 내가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며 시간될 때 직접 찾아보시길!)
물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식탁에서 고기를 다 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강요'가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떤 방향성을 만드는 데에 큰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나도 비건을 지향하고 있지만 아직도 가끔은 어쩔 수 없이(변명일 뿐이죠) 고기를 먹어야 될 때가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해 고기가 먹고 싶을 때도 있다.
나도 모르게 편한 사람들에게는 '아~ 삼겹살 먹고 싶다', '닭 한 마리 먹고싶다',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런데 입 밖까지는 못 나간다. 왜? 내가 저질러놓은 말과 행동이 있으니까. 그렇게 고기 먹지마라, 잘못됐다, 동물 시체다 해놓고서 어떻게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해버릴 수 있겠는가. 감각은 막을 수 없지만 행동은 막을 수 있다. 먹고 싶다는 느낌이 들 때 말하지 않고 먹지 않으면 된다. 비건은 동물이 불쌍해서 '감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이성'으로 버텨내야 한다.
그렇게 자기검열을 거치면서 나는 조금 덜 어설픈 비건에 가까워진다. 모순없이 완벽한 사람이 되는게 중요하다는 게 아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나 스스로를 막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처음 비건을 지향할 때는 그랬다. 일단 다같이 먹기로 해서 시킨 고기는 내가 먹지 않고 있더라도 만약 남으면 먹어치워버렸다. 계란을 빼달라고 얘기했는데 깜빡하고 넣고 나오면 그것도 먹었다. 희생된 생명이 버려지는게 더 싫으니까. 이제는 같은 경우가 발생했을 때 나는 그것들을 먹지 않고 버린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의 비건을 더 견고하게 유지시킬 수 있기 때문에. 한 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먹어버리기 시작하면 자꾸만 예외가 생겨난다. 또, 내가 그렇게까지 유난스럽게 행동하면 남들의 시선 때문에라도 다음에 더 고기를 먹기가 어려울뿐더라 내가 나한테 떤 그 유난이 민망해서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더 엄격하게 동물성 제품을 제한하게 된다.
결국 어떻게 그 방향성을 강화시키고 유지시킬 수 있냐가 중요한 것이다. 자아검열이나 그 '유난'이, 옳은 방향성에 힘을 보탤 수 있다면 기꺼이 몇 번이고 나는 나를 검열하고 유난을 떨 것이다. 그렇게 여러 사람이 자신의 비거니즘을 드러내고 강요할 때 일종의 사회적 압박이 생겨나게 될 것이고, 우리 사회는 우리가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식탁에 올려온 이 고통의 살점들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남들이 불편해하고 듣기 싫어하는 소리, 계속하면 된다. 계속 말해줘라. 이 계란 한 알, 이 우유 한 컵, 이 고기 한 점, 이 회 한 점이 식탁에 오기까지 얼마나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나에게도, 잊지 말고.
오늘 피하고 싶던 뉴스 기사 하나를 마주쳤다. 화천에서 발생한 아프리카돼지열병 재발 때문에 이천사백육십 오 마리의 돼지가 살처분되었다. 2465마리, 숫자로 마주해서는 절대 실감나지 않는 숫자. 이천사백육십오 마리. 놀랄 것 없다. 평상시에는 우리의 입속으로 가던 극히 일부의 생명이 땅으로 간 것 뿐이니까.
2020년 9월, 한 달동안 한국에서 도살된 동물은 약 1억마리. 야생에서는 아무도 이런 식으로 육식을 하지 않는다. 맛있다는 이유로 고기를 먹기 위해 산 채로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고 평생(그래봤자 너무나 짧지만)을 제대로 움직일 수 조차 없는 공간에서 사육하고 도살장으로 줄을 지은 트럭 수 십 대 안에 고통스럽게 죽어갈 생명을 싣어 나르지 않는다. 고기를 먹는 일은 자연스럽지 않다. 육식은 나쁘다.
나는 오늘도 당신에게 고기를 먹지 말라고 강요할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다시 한 번 더.
Go Vegan!
@imjinaaa
@wildsisters.offic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