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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픈 비건 Jul 11. 2021

프리랜서에서 자영업자로

부제: 둘 다 너무 빡세잖아

지난 겨울, 회사 가는 것보다는 프리랜서가 나을꺼야로 시작한 졸업 직후의 프리랜서 직행 삶은 아주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고난스럽지도 않았다. 불규칙한 수입과 일정을 고려해서 계획을 짜는 능력만 조금 더 있었더라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수입과 좋은 워라밸을 가지며 계속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프리랜서 삶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 건 '열심히 해서 남준다'라는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부터였다. 이것저것 얕게 건드리며 디자인과를 졸업한 나는 나쁘게 말하면 "잘 하는게 하나도 없어요"지만 좋게 말하면 "딱히 못하는게 없어요"이기도 한 능력을 어필했다. 다양한 창업가들이 쏟아지는 시장에는 한 가지 분야의 전문가보다는 로고도 만들 수 있고, 사진이나 영상도 조금 다룰 수 있고, 기획도 할 수 있고.. 등등 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고 다행히 내 능력은 그런 틈새 시장에서 잘 먹혔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해주고나면 항상 내가 0부터 100까지 다해주고 나서 자식을 빼앗기는 기분이였다. 이름도 내가 지어줘, 슬로건도 만들어줘, 로고도 만들어줘, 홈페이지 만들어, 상품 패키지도 만들어줘, 상세페이지도 만들어줘... 


그렇다면 남의 일을 해주지말고 내 일을 하자, 로 마음이 돌아선 나는 조금씩 퍼스널 브랜딩을 시작해갔다. 평소 환경문제나 동물권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기존에 디지털 창고 정도로만 사용하던 인스타그램에 몇 가지 키워드를 정해 비거니즘, 제로웨이스트, 채식식단 등 정보를 공유했고 생각보다 정말 빠른 시일 내에 많은 팔로워를 확보하고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었다.


어라? 생각보다 잘 되는데? 

그러던 도중에 취미로 만들던 비건 요거트와 버터, 치즈 종류 등을 플리마켓에서 판매하는 우연한 기회가 생겼고 그 일을 계기로 꽤나 잘나가던 망원의 제로웨이스트샵에서 팝업 마켓을 오픈,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지원해본 강동구청 공방거리 공간 지원사업에 덜컥! 합격하게 되었다.


오 주여! 내 나이 아직 서른살이 채 되지 못했는데 벌써 사장님이 될 기회를 주다니. 제 인생을 술술 잘 풀리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는 올해 1월부터 한 공간의 주인이 되었고 파격적인 50% 월세 지원을 받으며 비건 레시피를 개발하고 연구하는 공방 오픈을 준비했다.


공간 셋팅: 세상의 모든 사장님들이 존경스러웠던 나날들


그래, 남들 일 해주던 것 이제 그만하자. 내가 하고 싶은 브랜드, 내가 원하는 로고, 내가 원하는 카피, 어차피 다 내가 만들 수 있잖아? 라는 생각으로 신나게 브랜딩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나와 클라이언트 사이에 차이점을. 그 '디자인'과 '아이디어'를, '서비스를', 비록 내가 0부터 100까지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내것이 아닌 이유를..


그들에게는 이 무형의 '디자인'과 '브랜드'에 물리적 실체를 부여할 자본과 돈이 있었고 나에게는 없었다. 그렇다. 백날 내가 아무리 로고를 멋지게 만들어도 그 로고를 인쇄할 팜플렛을 뽑을 돈이, 간판 만들 돈이 없다면.. 아무리 스케치업을 멋지게 돌려 공간을 디자인해도 그 공간 바닥과 벽을 시공할 돈이, 그 안을 채울 가구가 없다면.... 나는 결국 사장님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나름대로 공간을 열어보겠다고 모아놓은 돈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프리랜서 생활을 그만두고 여기에 더 집중하자며 생전 안 하던 선택과 집중을 한답시고 일도 다 스톱했다. 생활비를 포함한 기본 자본금으로 1,000만원 정도를 준비하고, 이 정도면 꽤나 넉넉한데!? 생각했다. 우선 기본적인 시공 (벽, 바닥, 조명 세팅)은 전에 공간을 쓰던 사람이 깔끔히 기본 톤으로 해두어서 그냥 두기로 결정하고 가구나 필요한 집기 구입과 가게 오픈 준비까지의 내 한 두달치 생활비하면 충분하겠지하고 계산한 것.


다음은 내가 간과한 것들이다.


1. 사업을 준비하면서 내 일상의 루틴이 아예 바뀌기 때문에 내가 기존에 지출하던 '생활비'는 전혀 맞지 않았다. ex) 동선, 일정 등이 달라지며 택시 타기, 외식하기 등. 특별한 일손 고용 없이 주변 지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다보니 밥 한끼 대접하는 일이 엄청나게 늘어남, 집을 비우는 시간이 늘어나서 펫시터 필요, 진짜 바쁠 때는 집을 치우는 서비스도 써야했음.


2. 중고로 사고 당근마켓으로 사고 어찌저찌하면 2백~5백이면 되지 않을까?(시공비와 같은 것 제외하고 순수 가구 등의 꾸밈비) << 절대 아님.

우선 나는 공간에 있는 90%의 가구는 당근마켓에서 구매했다(이것 역시도 나의 재정 상태의 현금흐름에 큰 관여를 하며 힘듬을 안겨주었다. 기억하자! 중고는 현금으로밖에 못 산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외관 페인트비, 간판비 (너무 비싸서 입간판 말고는 아직 외부는 못 달았다), 온냉풍기 설치비, 각종 자잘한 집기들 등등. 등등.. 등등.... 그야말로 비용이 끝도 없이 발생한다.


3. 실질적인 매출이 발생하기까지의 시점 계산. 

나는 공간만 세팅하면 내가 사장님이 된다라는 환상에 빠져 거기에서 돈을 벌어야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이곳에서 다시 생활비 + a 의 안정적인 자본 흐름을 만들기 전까지 내 수입이 생기는 활동들을 멈추면 안된다는 것을 잊어버린 나의 삶은.... 고달펐다. 



어쩌면 이 정도의 계산은 사업이든 뭐든 자기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은 당연하게 해봐야하는 계산이였을지도 모르겠다. 다행인건 없는 돈이 내가 무슨 짓을 한다고 더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그 쥐꼬리만한 예산으로 공간을 무사히 열었다는 것. 그렇게 공간을 오픈한지 벌써 4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따뜻한 공간 (입간판을 제외한 사진에 있는 모든 물건은 당근마켓에서 구해온 것들이다)


처음에는 원래 하던 비건 요거트와 버터, 치즈 등의 레시피를 개발하고 제품을 판매해야지 하던 계획도 하면서 조금씩 방향이 바뀌어가 지금은 대략 비건 와인바가 되어버렸다. 멈춰서 돌이켜보면 아니, 나 이래도 되는건가? 싶지만, 지금까지 지나온 길들의 갈림길에서 매번 꼼꼼한 고민 끝에 한 결정들이 모여 지금에까지 왔으니 잘 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싶다.


짧은 시간 동안 든든한 동료도 생겨 맛있는 비건 음식들을 만들어가고 있고, 채식인 비채식인 할 것 없이 다양한 분들이 방문해주시며 매번 너무 맛있다는 호평을 듣는다. 자랑아닌 자랑을 하자면 우리 가게는 아주 협소해서 2명 손님이 가장 많이 오는데 이렇게 2명이서 온 손님들이 평균적으로 다섯 개에서 많개는 여덜 개의 디쉬를 보통 시키신다. 모두 처음 먹어보는 맛이라며 계속해서 주문하고 음식들을 칭찬해주실 떄의 짜릿함이란! 


비건 헤븐의 다양한 메뉴들


정식 식당으로 가게를 오픈하고 두 달 차 정도에 접어든 지금.

'거리두기 완화' 소식에 아주 잠시 들떴던 마음을 뒤로 하고 순식간에 심각해져버린 코로나 상황에 당장 다음주부터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 좁은 가게에 어떻게 테이블 간격을 일 미터를 띄울 수 있을까 연구하는데 또 메시지가 날라온다. 


" 모든 일반음식점 영업주들은 보건소에서 코로나 검사 실시를...."


아, 지금까지 내 코에 긴 막대기 쑤셔넣는 일만은 한 번도 당한 적이 없건만, 결국에 내 차례가 오는구나.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낸다. 다들 답장이 없다. 한참 뒤에야 온 답장들을 보니 다들 어디서 노느라 바쁘다.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열심히 잊어보기 위해 열심히 놀고있는 친구들.... 을 보자니................................부럽다.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다.


갈 길이 정해진대로, 어쩔 수 없는 알람소리에 일어나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고 회사 사무실 책상에 앉아 일을 보다가 정해진 시간에 점심을 먹고 퇴근만 기다리다가 후다닥 집으로 피신하는 삶. 따박따박 들어오는 녹봉의 삶. 규칙적인 삶. 


그치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지(정확히 말하자면 이제와 나를 받아줄 곳이 없지). 매일매일 먹고 살 걱정이라는 소상공인의 말이 너무 와닿는다. 매일매일이라는 표현도 참으로 뭉뚝한 표현이다. 매일매일 안의 그 24시간 안의 60분 안의 1분 1초가 그 고민에 휩쌓여 있다. 이걸 이렇게 할까, 저걸 저렇게 할까?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하면 그렇게 할 수 있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이 와인을 시킬지, 이 메뉴의 가격을 얼마로 할지, 오늘 귀찮은데 하루만 청소기를 안 돌릴지, 식물에 벌레가 자꾸 나오는데 약을 쳐야하는지, 소상공인 대출을 받을지 말지, 그 외에 243245435635개 정도의 선택해야 할 일들..!!!!


프리랜서의 삶도, 자영업자의 삶도. 녹록치 않다.

그치만 확실히 깨달은 것. 지금 이 삶의 형태에 불만을 가지고 또 다른 삶의 형태에 도전한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녹록치 않을 것이다. 


그래, 남들 회사갈 생각에 나는 마음만 먹으면 낮잠을 잘 수도 있지. 

근데 그 마음을 먹으면 제 인생이 좃될 수도 있다구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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