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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픈 비건 Oct 11. 2019

꽈배기가 뭐라고

그깟 2000원이 없어서 

오늘은 정말로 꽈배기가 먹고 싶었다. 3개에 이 천원인데 그 이 천원이 아까워서 꾹 참고 지나갔다. 그리고 집에 와서도 그 설탕 묻은 꽈배기를 한참 더 먹고 싶어 했다.


돈을 아껴쓰기 시작한 지 이 주 정도 되었다. 돈이 없는 삶은 정말이지 비참하다. 6일 뒤에 갚아야할 카드빚을 만들어 내려고 입지 않는 옷가지까지 모두 내놓아 팔고 있는 지경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무서운 것 하나 없이 신용카드로 돌려막기 하며 외국에서 시간을 보낸게 벌써 5개월. 처음에는 나름대로 이렇고 저런 합리적인 이유로 씀씀이가 커졌지만 그렇게 계속해서 미래를 땡겨쓰는 삶은 정말 불안정했다. 뭘 해도 그 밑바탕에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따라 붙었고 타지에서 돈 한 푼 못 벌고 쓰기만 하는 처지를 떠올리면 무기력함이 나를 얼싸 안았다. 한 번은 생수를 사 먹을 돈이 없어서 3일간 수돗물을 마셨다. 그러다 돈이 조금 생기자 쌓였던 스트레스 때문에 냉큼 지출을 하고, 그렇게 카드빚뿐만 아니라 스트레스까지 돈으로 돌려막기를 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한계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들자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렇다. 나는 돈 한 푼 못 버는 20대 후반 망나니였고 그런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참으로 무가치하다. 당장 카드대금이 빠져나가는 날이 코앞인데, 더 이상 돌려막을 방도도 없으니 정말로 안 쓰는 공책 한 권까지 천 원, 이 천원하며 팔고 있다. 그렇게 정말 글자 그대로 한 푼, 두 푼 모은 돈과 운 좋게 책 사이에서 발견한 껴 놓고 까먹은 100유로가 내가 수중에 있는 돈 전부이다. 은행에 가서 100유로를 환전하니 13만원이 되었다. 만약 카드가 정지되면 이 돈으로 다음달까지 버텨야 한다.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아무리 꽈배기가 먹고 싶어도 그냥 지나쳐야 하는 것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내 모든 행동범위가 돈으로 환산되는 것이다. 



꽈배기를 지나치는 행동 = +2000원

버스 대신 따릉이 타기 = 1250 - 1000 = +25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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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면서 한 번도 돈 때문에 큰 고생을 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갖고 싶은 걸 다 가질만큼 여유롭게 자라지도 않았다. 몇 백원 아끼려고 친구들과 20분을 더 걸어 할인마트에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러 다녔고 백화점에서 옷을 사달라고 졸랐다가 부모님께 뒤지게 혼났다. 그래도 집에 쌀이 떨어진 적은 없다. 


가난이라는 무시무시한 그림자가 어떤 느낌인지 헤아려본다. 이보다 몇 배는 더 깊은 어둠이 몇 배는 더 긴 시간동안 한 가족 전체를 지배한다고 생각하니 내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종류의 것으로 느껴진다.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게으르고 돈 벌 궁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계속 가난하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사실 가난이라는 상황 자체가 사람을 제대로 사고하지 못하게 한다. 


우울증 환자가 너무 무기력해서 약을 타러 병원에 가지 못하는 것과 똑같다. 우선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기가 어렵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해야 한다. 서빙이든 설거지든 해서 몇 만원 모으는 것도 감지덕지인 터에 커리어는 무슨 커리어를 쌓는단 말인가. 또 무엇을 해도 마음의 여유가 없다. 커피 한 잔 사먹는 것도 아까워서 카페에서 안 만나고 날씨 좋다는 핑계로 계속 한강으로 사람들을 불러냈다. 그렇다면 한강에는 카페가 없느냐. 친구들이 목이 마르다고 들어간 요트 선착장 근처 카페에 갔다가 한 잔에 육 천원 하는 아메리카노를 보고 식은땀이 주르르륵. 이렇게 돈에 관련된 일거수일투족 하나하나를 머릿속으로 계산하다보니 마음에 여유가 생길 리가 없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어찌되었건 내가 속으로 끙끙 앓으면 그만이지 싶지만 때로는 남에게 피해가 가는 일도 생긴다. 가난하면 정직해지기도 어렵다. 양심이나 도덕보다는 돈이 우선이 될 수 밖에 없다. 며칠 전에는 먼저 사겠다고 한 사람이 분명히 있는데도 고작 몇 천원 더부른 뒷사람에게 물건을 팔았다. 


만만해 보이고 아무도 지원을 안 할 것 같은 애매한 글쓰기 공모전에도 나가려고 글을 몇 편 썼다. 글은 나로부터 나와야 하고 뭐가 드러나야 하고 어쩌고 저쩌고는 다 개나 주면 되겠다. 공모전 제목에도 써 있듯이 이것은 '스토리 텔링' 이다. 거금의 상금이 걸려있는 웹소설 공모전도 눈에 띄었다. BL, 19금 가능. 그래 이거다. 이거야말로 노려볼만하다. 나는 내가 야설 작가가 된다면 야설계에서 한 획을 긋는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 밖에도 성형외과 코디네이터, 보험설계사, 입시 컨설팅을 하면 내가 떼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직업들을 한 번도 진지하게 고려해 본 적은 없다.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배부른 생각이나 해댄 것이지. 


이제야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이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와닿는다. 그냥 예의바른 소리인줄로만 알았는데, 그래! 직업에는 정말로 귀천이 없다. 사람 머리를 자르든, 개 머리를 자르든, 옷을 팔든 음식을 팔든, 사람을 살리든 관을 짜든. 그저 다 먹고 살려고 하는 거구나. 


돈이 궁하고 나니 내 삶의 많은 선택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된다. 개를 키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본다. 애정과 관심? 그 근본에는 돈이 있다. 지금 키우는 개를 파양했던 전 주인 커플이 생각난다. 둘 다 일을 해서 많은 시간과 애정을 쏟을 수 없기에 슬프지만 더 좋은 집에 보내기로 결정했다고 하셨다. 아니다. 그 분들은 돈 때문에 파양한 것이 필시 틀림없다! 돈이 있으면 애견 유치원에 보내서 개들끼리 띵가띵가 놀게 해 줄 수도 있고, 아니면 잔디가 있는 넓은 집에 살아서 혼자서 마음껏 뛰어놀게 해 줄 수도 있다. 아니 그냥 일을 때려치고 하루종일 개랑만 놀면 된다. 


그러니까 사실 그분들의 설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생략된 것이다. 


'저희가 (돈이 없어서) 둘 다 일을 하다보니까 많은 시간과 관심을....~'. 


사실 세상 만사가 거의 이렇다. 


'제가 요새 (돈이 없어서) 너무 바빠 가지고..',

'제가 (돈이 없어서) 밖에 나가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제가 (돈이 없어서) 쇼핑을 안 좋아해서...' 


일류 회사이든 삼류 회사이든 채용 면접에서 묻는 지원 동기에 대한 답 역시 (돈)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다. 그 회사가 구글인지 민음사인지는 아무 상관 없다. 이 질문의 핵심은 (돈)을 주제로 어디까지 스토리 텔링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집에 와서도 꽈배기 생각만 하다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맥주를 사러 나갔다. 이 모든 게 이천 원을 아끼려다가 생긴 일인데 인간적으로 이천 원이 넘는 맥주를 사는 건 말도 안된다. 그렇게 이천 원이 넘는 맥주를 제하고 나니까 선택지는 단 하나. 


1600원짜리 필라이트. 

원래 같으면 쳐다도 안 보고 비웃었을 맥주다. 아사히와 기린과 함께하던 무책임한 삶이여 이제 안녕. 



꽈배기를 지나치는 행동 = +2000원

그에 따른 시발비용 맥주= -1600원

∴ 2000 - 1600 = +400원



1600원짜리 필라이트는 정말이지 맛이 없었다. 그냥 꽈배기나 사먹을걸.. 결국은 400원 밖에 못 아낀 셈이다. 400원.. 예전 같았으면 택시비가 4600원이 나온다면 5000원을 기사님께 드리고 잔돈은 됐어요라고 말하며 써버릴 그 400원. 그 짓을 대체 몇 번이나 했던가. 그 400원을 내가 챙겼더라면 꽈배기를 먹을 수 있었을텐데. 


세상 모든 물건의 값어치가 꽈배기로 환산되고 있다. 이렇게 100원 단위까지 따져보며 지내보니 일상에 조금 더 책임을 지며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삶에 대한 애착도 조금 생긴다. 세상 모든 것들을 꼼꼼히 짚어본다. 하나씩 신경써서 들여다보니 꽈배기 하나에도 이런 깨달음이 떨어진다.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보고 최선의 선택을 고른다. 그렇게 고르고도 돈이 아까워서 다시 고심의 시간을 갖는다. 어쩌면 계획적으로 돈을 쓴다는 것은 현재보다는 미래를 조금씩 신경쓰기 시작했다는 징조일 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나도 내일이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되었다. 카드빚만 다 갚으면 꽈배기를 꼭 먹을 것이다. 압구정역 4번 출구 꽈배기 3개에 2000원. 막 나온걸로 설탕많이. 핫도그는 그저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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