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형 프리랜서의 지속가능성
무턱대고 시작해버린 프리랜서 체험기도 1년이 넘었다. 이제는 체험이 아닌 현실이 된지 오래고, 회사를 다니지 않고 졸업하자마자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대체 무슨 자신감인가 하던 시선이, 어떻게 저떻게 1년쯤 버티고 나니까 제법인데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렇게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일만 지속적으로 따올 수 있다면 프리랜서 생활은 버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오후 3시에 아무도 없는 카페에서 책읽기, 하루 세 번 개들 산책 시키기, 하루씩 돌아가면서 격일로 일하기, 코로나 걱정없이 하루종일 집에서 하고 싶었던 온갖 취미생활 하며 뒹굴거리기.. 이토록 아름다운 일상이 어디 있을까 싶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지금까지 살아남은게 정말 기적같다고 할만큼 일이 끊겨서 큰일이다 싶을 때 갑자기 다음 일이, 와 진짜 큰일이다, 이젠 진짜 끝이구나 싶을 때 또 다음일이 하는 식으로 정말 1년을 버텼다. 정말 운이 좋게도 아주 긴 공백 없이 일을 따올 수 있었는데 그 때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게 돌이켜보면 어떻게 가능했는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굶어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몇 가지 방법들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1. '지원'은 최선을 다해서 하자.
당연히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하기 싫은 일도 있고 느낌상 이 일은 나한테 안 떨어질 것 같은데 하는 일들도 많다. 나는 디자인과 번역 분야에서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이런거다.
* A4당 1만 5천원 성인 웹소설(한 마디로 야설이죠) 번역 구인
* ㅇㅇㅇ 속눈썹 상세페이지 제작 (페이 30)
첫 번째 같은 경우에는 돈도 적고 하기도 싫은 일이다. 두 번째 같은 경우는 페이는 나쁘지 않은데 재미가 쥐뿔도 없을 것 같은 일이다. 그치만 돈은 없다. 뭐든 해야 한다. 예전에는 이런 일에 지원할 때는 포트폴리오도 지원메일도 대~충 쓰게 됐다. 되면 되고 말면 말자의 심리였다. 프리랜서 생활을 해오면서 일이 예상치 못한대서 떨어진다는걸 몸소 느끼며 이제는 뭐가 됐건 '지원'은 최선을 다해서 한다. (지원을 최선을 다하는 건 쉽다. 일까지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다.)
야설번역은 도무지 하기 싫어 패스했고 속눈썹 담당자에게 연락을 했더니 이미 사람을 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관심이 생긴다고 혹시 지금 상세페이지에 조언을 해 줄 수 있냐고 묻는다. 당연히 나한테 떨어질 파이가 없다고 판단은 됐지만 그래 뭐 조언 정도야 뭐가 어렵겠어, 전체적으로 훑어보며 괜히 멋진 말들 써가며 UX writing 차원에서 어쩌고 사용자들은 어쩌고 요새 트렌드는 어쩌고 하고 길게 보내줬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나에게 다른 일을 줬다. 속눈썹보다 훨씬 나은.
이런 경험이 처음이 아니다. 딱 한 번 오프라인 미팅을 갖고 무산되어버린 프로젝트가 있었다. 대략적인 이야기만 들었을 때도 뭔가 고가 안 될 것 같은 프로젝트로 들렸다. 로드맵이 너무 모호했고, 담당자는 지나치게 흥분해 있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 약 한 시간 넘게 열띤 대화를 주고 받고 돌아오니, 아니나 다를까 프로젝트가 무산되었단 연락을 받았다. 에휴 그럼 그렇지, 괜히 시간 쓰고 돈 썼네 했는데 한 달 뒤, 그 때 만났던 분이 나랑 너무 잘 맞을 것 같은 프로젝트가 있다며 창업 준비중인 동료들을 소개시켜줬다. 만나보니 말씀주신 대로 내 흥미나 관심사랑 꼭 맞는 분야라 미팅 분위기도 좋았고 그렇게 스무스하게 일을 따왔다. 제법 큰 규모의 일을.
만약 내가 그 사람과 대화할 때 나에 대한 관심사나 디자인 능력치를 열심히 얘기하지 않았다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은 소개였다. 난 다시 다짐했다. 그래 일은.. 대충 해도 돼. 클라이언트만 만족시키면 돼. 그치만 지원은.. 지원만큼은 최선을 다하자.
2. 확실히 자신 있는 한 가지가 없다면 여러 가지를 어필한자.
원래부터 이것저것 다 건드리기 좋아한 나는 디자인을 전공하면서도 그렇게 해왔고 그렇게 이거 하나만은 제가 기깔나게합니다 라고 말 할 것 없는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일을 따올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를 다 할 수 있기 때문이였다.
생각보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프로젝트와 스타트업, 창업 아이템들이 있고 대부분은 한 가지를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보다는 두루두루 여러 가지에 도움과 의견을 얻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창업 초기 단계에 팀에게 폰트를 엄청 잘 만드는 디자이너나 사진 하나는 기깔나게 예술적으로 뽑을 수 있는 디자이너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사람들은 사진도 조금, 브랜딩도 조금, 편집도 조금 모든 걸 조금 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것들을 총괄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지원을 할 때 별로 대단한 경력이 아니더라도 여러가지 분야별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어필했을 때 일을 따오기 쉽다고 느꼈다. ㅇㅇ씨 영어도 할 수 있어요? 하면서 영어 때문에 나를 디자이너로 뽑아간 사람도 있었고, ㅇㅇ씨 포토샵 할 수 있어요? 하면서 웹툰 번역을 하며 식자까지 한 번에 부탁하겠다고 나를 번역자로 뽑아간 사람도 있었다. 클라이언트가 어떤 걸 원하는지 정확히 모를 때 이것저것 어필하는 것이 나는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존나 쓸데없고 관련없는걸 어필하면 안되겠죠...) 특히 요새처럼 유투브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채널이 브랜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때 개인 SNS 계정이나 사소한 영상 편집 능력으로도 어필이 가능하다.
3. 지원하는 일의 '분야'에 대해 관심 있는 척하라. (혹은 알고 가라)
'척'이라고 해서 대단한 거짓말까지 하란 뜻은 아니다. 나같은 경우에는 워낙 잡다한 지식쌓기를 좋아하고 여기저기 안 건드려본 것들이 없다보니까 이런 '척'이 능숙하게 나오곤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수건을 브랜딩하고 싶다는 클라이언트가 있었는데 한 때 나는 친환경 패브릭에 대해 혼자 알아봤던 적이 있어서 클라이언트가 전문적인 섬유 관련 용어를 쓸 때 이해하는 '척'하는 것이 가능했다.
클라이언트는 자신이 전문가인 분야/ 혹은 창업을 위해 공부중인 분야에 대해 대화가 통한다고 느낄 때 마음을 한 번 활짝 연다. 친환경 관련 제품이라면 제로 웨이스트나 비거니즘과 같은 키워드를 살짝씩 건드려봐도 좋고 뷰티 쪽이라면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유저의 심리 같은 걸 던져줘도 좋다. (물론 어설프게 안다는게 티나면 안됩니다) 이게 잘 되려면 사실 평상시에 여러 방면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 것이 좋다. 마치 주식공부를 할 때 일상 속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는게 도움이 되듯, 일을 따올 떄 역시 그렇다.
그리고 클라이언트가 '어, 이 사람 말이 통하잖아!' 라고 느낄 때, 일은 따올 확률이 굉장히 높아진다. 나도 하필이면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일을 들고 온 클라이언트와 딱 1시간 통화만으로 내 포트폴리오도 보지 않고 1500만원짜리 일을 따 온 적이 있다. 나랑 계약하겠다고 말했을 때 농담인 줄 알았는데 바로 그 주에 올라오셔서 계약서를 쓰고 선금을 끊어주셨다. 물론 조금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자신이 공부하고 자부심을 갖고 있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분야에 대화가 통하고 상대도 관심이 있다고 느낄 때 클라이언트들은 움직인다. 그들도 결국 사람이다.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일은 어디서 어떤 이유로 올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선택되는 이유 역시 뭐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니 많은 클라이언트들과 연결 되어 있을 수록 좋다. 그러면 이번이 아니고 다음번에라도 필요할 때 나를 찾아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 나를 찾을 지 모르니, 나에 대한 다양한 것들을 어필하는 것이 좋다.
또, 클라이언트도 결국 사람이다. 예산, 포트폴리오, 경력.. 모두 중요하지만 결국 감정이 가장 큰 결정을 내리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 사람이 하려고 하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고, 대화를 하고 알고 있는 것들을 어필하라. 클라이언트의 마음에 드는 순간 게임은 끝이다.
일단 일을 따오고 나면, 이제는 느긋하게 생각해도 된다... 나에게 일을 주었다는 엄청난 감사한 마음에 나를 갈아넣으며 일하지 않아도 된다. 적당히, 시킨것만, 받은만큼만.. 일을 하며 프리랜서의 삶을 만끽하자. 돈이 떨어져 가도 걱정하지 마라. 어떻게든 다음 일을 따오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해왔듯이.
세상 모든 프리랜서들이여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