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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픈 비건 Oct 24. 2021

당신의 멘탈 체크가 필요할 때

쥐어짜내지 말고 보송보송 말리자

토요일, 전주에서 열리는 플리마켓에 참여하기 위해 지난 몇 일간 열심히 준비한 비건 버터를 들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며칠째 여러 가지 일들이 겹치면서 잠을 제대로 못 잔지 며칠, 오늘을 위해 열심히 준비만한큼 기대를 한껏 앉고 3/1 지점쯤 갔을 때, 돌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급하게 휴게소에 멈춰 숨을 고랐다. 들이 마쉬고, 내쉬고, 들이 마쉬고 내쉬고. 아무리 호흡을 해봐도 갑자기 몸이 딱 멈춰 굳은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고 눈앞이 캄캄했다. 갑자기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미 모든 준비가 끝마쳐 있고 가기만 하면 되는데 도무지 갈 수가 없었다. 누워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게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결국 전주에 도착하지 못했다.


집에 와서는 약을 먹고 하루 종일 잤다. 바쁘다보니 며칠씩 빼먹어가며 듬성듬성 먹은 항우울제와 아침 운전 때문에 거르고 있던 잘 떄 먹는 수면제까지 한 번에 먹고 동면에 들어간 사람처럼 자고 또 잤다. 눈이 떠지면 다시 잤다. 눈이 떠지면 또 다시 잤다. 


그렇게 아침이 왔다. 


자괴감이 나를 둘러쌌다. 모든 준비를 다 해놓고 코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무너져버렸다. 오늘 하루도 아무 생각없이 쉬고 싶었지만 그럴수도 없었다. 오늘도 몇 주 전부터 계획된 비건 모임이 있었고 나는 호스트였다. 서 너가지 요리를 준비하고 가게를 싹 치우려면 최소 세 시간은 필요했다. 


아침 아홉시,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무얼먼저 해야할까. 가게를 치워야할까, 장을 봐야할까, 어제 하루종일 확인 못한 여러가지 미팅 문자들을 확인해야할까, 나가지 못한 플리마켓에 대해 공지를 올려아할까, 아니 일단 병원부터 가봐야할까.


다 제쳐두고 대청소를 시작했다. 쌓인 택배박스를 뜯고, 종이테이프를 떼서 가지런히 상자를 하나씩 접었다. 쌓여 있던 설거지를 해치웠다. 고양이털을 이불에서 모두 떼냈다. 돌려놓고 며칠 쨰 방치해두었던 빨래를 다시 돌리고 하나씩 널었다. 청소기를 돌리고 구석구석 먼지를 닦았다. 호흡을 했다. 이제야 집이 조금 집 다워졌다. 샤워를 하고 나를 꺠끗이 하고 아무거나 옷장에서 손에 잡히는대로 옷을 입지 않고 오늘 입고 싶은 옷을 찬찬히 골랐다. 여유부릴 시간은 없지만 꼭 그렇게 해야만 했다. 생각을 하면서 행동해야 했다.


나의 일상을, 생각하면서, 숨을 고르면서 하나씩 수행해야했다.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말고, 소중하게.


집이 정리되고 나니 머리속도 조금 말끔해졌다. 며칠 째 못 잔 잠을 몰아자서인지 정신도 조금 돌아온 것 같았다. 가게로 와서 준비를 시작했다. 막상 손을 움직이고 시작하니 생각보다 준비는 빨리 끝났고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정신 질환을 가지고 살아간지 10년째, 가끔 나는 내가 아픈 곳이 있다는 것을 까먹는다. 그리고 보통 사람이 하는 것만큼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때로는 보통 사람이 하는 것보다 더 많이 하려고 힘을 쥐어짜낸다. 그러다보면 꼭 툭 하고 무언가가 끊어져버린다. 


현대인이라면 아마 누구라도 정신과를 방문했을 때 몇 가지 진단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노력에 중독되어 있다. 코로나가 오고 밖을 나갈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언제부터 자기계발에 미치기 시작했다. 바디프로필, 미라클 모닝, 독서모임 등등.. 나는 무엇을 해도 아직은 사회 속에서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어딘가에 도달하고자 달려간다. 나를 쥐어짜낸다. 내 욕망과 절망으로 가득 찬 바구니에 푹 나를 담그고 계속해서 쥐어 짠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갖고 싶은 걸 가질 수 있을 때까지.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나를 쥐어짜내는 일이 아니라 우리를 뽀송뽀송하게 말리는 일이다.


내가 가진 욕심들 욕망들 갖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그 모든 생각들로부터 바싹! 나를 말리는 일 말이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보며 햇빛을 잔뜩 몇 시간이고 쬐여본 일이 언제가 있을까?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북향집으로 이사온 뒤로부터 우리 집에서는 도통 빨래가 잘 마르지 않는다. 말라도 어디선가 덜 말린 빨래 냄새가 난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새아파트에 살면서도 나는 해가 쨍하게 비추던 옛 빌라집이 그립다.


가끔 우리는 멈춰서야한다. 가끔이 아니라 자주 멈춰서야한다. 그리고 나를 쥐어짜내지 말고 나를 적시고 있는 모든 것들을 햇빛에 바싹바싹 말려야 한다. 생각만 해도 기분 좋지 않은가? 보송보송하게 마른, 섬유유연제를 쓰지 않아도 풍겨오는 햇빛과 바람의 향. 


안 되면 되는 것 하자, 나를 쥐어 짜내지 말자. 보송보송 나를 말리자.

그렇게 멈춰서서 가도, 혹은 평생 멈춰서 있어도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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