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집중이 아닌 분산과 연결로 살아남는 법
[Prologue. 난 뭐하나 잘하는게 없네]
시각디자인과 졸업을 앞두고 교수님과 진로에 관한 상담을 했던 날을 기억한다. 어떤 쪽으로 커리어를 쌓아가고 싶냐는 말에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자 어떤 것을 잘하냐고 교수님이 여쭤 보셨다. 그 질문에도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같은 과 동기들은 졸업할 때쯤 되니 사진이면 사진, 영상이면 영상, 무언가 하나 전공을 정해 차근차근 쌓은 것들이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엄청난 찍먹파였다.
1학년 때는 글자를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며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열심히 듣다가,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영상으로 눈을 돌렸다. 영상 편집을 밤새 해보니 도저히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 같아 그만뒀다. 그러다가 갑자기 도예 작가가 되고 싶다며 도예과 수업을 기웃거렸지만 그것도 한 학기 못 가 그만뒀다.
2학년 때까지는 별 걱정 없이 이것저것 찍먹으로 즐겼다. 학년이 올라가자 다들 자기가 잘하는 것을 찾아갔다. 다른 친구들은 포트폴리오를 쌓아 인턴 경험도 쌓고 취업 준비도 해나갔다. 나는 이제서야 말로 전공을 찾았다며 서비스 디자인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서비스 디자인으로 유학을 가겠다며 큰맘을 먹고 학교를 휴학했다가 얼떨결에 외국계 기업에서 전혀 상관도 없는 컨퍼런스 기획팀 인턴을 하고 왔다.
휴학 후 학교에 돌아오니 어느덧 졸업전시. 도저히 어떤 것으로 졸업 전시를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쌩뚱맞게 글을 썼다. 내가 쓴 글로 대충 설치물을 만들어 전시를 했다. 졸업전시를 보러온 모든 지인들이 물었다.
"이게 뭐야?"
글쎄. 그 작업은 내가 살아온 날들을 집약한 무언가였다. 뭐라고 딱히 말할 수 없는, 이도 저도 아닌 그런 무언가. 글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림도 아니고, 그렇다고 디자인물도 아닌, 그렇다고 예술작품도 아닌, 무언가.
학창 시절부터 항상 그랬다.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며 매일 해외 디자이너 패션쇼를 챙겨보다가, 환경 운동가가 되겠다고 비누로 머리를 감았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영어에 푹 빠져 번역일을 하며 영문학으로 석사를 가고 싶어 준비를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변호사가 되고 싶어 LEET 기출문제집을 수 십만원 어치 샀다. 물론 그런 일들을 진행하는 와중에 동물을 구조하겠다며 동물권 단체에서 개농장 구조 활동을 이어왔다.
서른이 넘은 지금 대학교 때 교수님이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지금은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까? 아니, 언젠가 저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하는걸까?
스스로가 못 하는게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아뿔싸, 그 말을 다르게 말하면 뭐 하나 잘하는게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모든걸 평균만큼은 하지만, 뭐 하나 확실하게 잘하는 것은 없는 능력치.
주변 사람들은 계속해서 말했다. 이제는 너도 나이가 적지 않으니, 무언가 하나를 선택해서 집중을 해야 한다고. 선택과 집중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 말을 새겨들으려고 노력했다. 이번에는 진짜라고, 더는 바꾸지 않는다고 다짐도 할만큼 했지만, 이 넓은 세상에는 재미있어 보이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내가 해보고 싶은 것도, 되보고 싶은 것도 너무나 많았다.
날 때부터 남의 말이라고는 잘 듣지를 않았다. 선택과 집중을 하라고 남이 잔소리해서 될 일이였으면 진작에 했을 것이다.
난 선택과 집중 대신 분산과 연결이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이렇게 살다 진짜 인생 망하는 것 아닌가?' 라고 매 끼를 먹을 때마다 생각했다. 매번 수입이 일정하지 않다 보니 어떤 달에는 꽈배기 사 먹을 돈 500원이 없었다.
하지만 분산되어 있던 것들을 연결하는 방법을 조금씩 알아내자, 조각 나 있던 부품들이 점차 합쳐져 하나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확신이 든다. 선택과 집중이 아닌 분산과 연결이 잘 맞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요즘 나의 일상은 이렇다. 매일 좋아하는 것만 한다. 이것저것 흥미가 가는 것들은 모조리 발을 담군다. 최근에는 요가에 푹 빠져 매일 아침 새벽에는 요가를 간다. 오전에는 헬스를 하고 저녁에는 크로스핏을 한다. 오후에는 2-3시간 정도 영어 학원으로 출근해 영유아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집으로 돌아와 브랜드 이름을 지어주는 네이밍 작업을 몇 건 마치고, 남는 시간에는 뜨개질을 한다.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개와 고양이를 키운다.
이렇게 일하면 돈은 대체 얼마를 버냐고? 매 달 수입의 차이가 큰 프리랜서의 삶이지만 이번 달에는 천 만원 정도를 벌었다. 결코 일을 적게하진 않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좋아하는 일만 했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일도 직업이 되면 싫어진다는 말이 있지만, 좋아하는 일이 매번 바뀌니 질릴 일도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다. 좋아하는 일로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 우주의 별들처럼 분산되어 있는 취미와 관심사와 커리어로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
정답은 연결에 있다.
분산된 조각들이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연결이 핵심이다. 퍼즐을 맞추듯이 정석대로 조각을 맞출 수도 있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조각들이 합쳐져 새로운 시너지를 내기도 한다. 미대를 갓 졸업했을 때만 해도 전공자가 아닌 나에게 아무도 번역 일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몇 번의 일은 따왔지만 일회성에 그쳤다.
그런데 번역 프로세스를 지켜보니, 내가 번역한 텍스트를 얹어 번역본 편집을 완성할 디자이너에게 넘기는 순서였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며 편집 디자인도 찍먹했던 나이기에 왠만한 편집 디자인 프로그램은 다룰 수 있었다.
이력서를 바꿨다. 번역 경험과 함께 편집 디자인이 가능하다고 기재했다. 그 뒤로는 일이 쏟아졌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한 큐에 번역과 편집을 완성할 수 있으니 메리트가 있었다. 끝장나게 번역을 잘하는 것도 편집을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둘 다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장점이였다.
이렇게 전혀 다른 영역의 조각들이 연결점을 찾아 이어질 때 의외의 기회가 찾아온다. 조각이 많을수록 기회는 더 많아진다. 두 개의 조각이면 조합의 경우의 수가 하나이지만 세 개의 조각이면 조합의 경우의 수는 6가지이다. 조각이 네 개라면? 다섯 개라면?
조각이 열 개만 되어도 조합의 경우의 수는 무려 3,628,800가지이다. 선택과 집중이 아닌 분산과 연결이 확률적으로는 더 많은 기회를 우리에게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 더 많은 기회를 만들고 더 많은 기회를 잡는 방법, 좋아하는 것만 하며 생존하는 방법, 그 방법은 분명히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