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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젤 Dec 22. 2021

[상념] 세계와 본인의 경계선

부족한 나를 세상에 녹아들게 하는 방법에 대하여

이전 글에 이어서, 이번에는 조금 다른 평면에서. 이전 글이 되고 싶은 나, 일하는 나에 대한 거였다면 이번 글은 있는 그대로의 나에 대한 이야기.


객관적인 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도 어려운데 감정을 돌아보는 메타인지가 되는 사람들은 정말 존경받아 마땅하다. 감정이라는 것이 돌아보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라고, 자연스럽게 되는 거라던데, 흘러 흘러가는 감정이야말로 흘러 흘러가는 커리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닐지. 이것도 결국 맷집 - 회복 가능성 - 의 영역이겠지만. 교류와 관계, 무엇보다 내가 나를 사랑하자고 마음먹는 그 순간에도 이렇게 나 스스로를 평가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상념이 들었다. 가장 효율적으로 잘 닦인 길을 따라 걷는 것(나 자신의 셀링포인트를 알고 능숙하게 포장하는 것)과, 느리게 걸으며 고양이와 꽃을 보는(느리게 걷자 - 장기하) 삶에는 분명 차이가 있기 때문에. 두 개가 같이 갈 수 있다면 정말로 편한 삶이겠지만, 인생이 늘 그럴 수는 없으니까.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양'은 이상적인 인간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지에 가깝다. 그러니까, 교육의 목적이 어떤 사람이 되면 세상에 적응하기에 편한지,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무엇이 예의인지를 알려주는 것, wollen(to be)의 지향점을 가르쳐 주는 데에 그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 이상적인 인간이 다 못 된 대부분의 사람의 sein(as is), 현재 상태에서는 어떻게 다른 사람과 소통하여야 하고, 어떻게 해야 본인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본인의 부족함을 온전히 본인이 소화하고 남 탓으로 돌리지 않을 수 있는지, 이상적인 인간과 본인의 괴리에 대하여 세상에 알리고 또는 알리지 않고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이상적인 인간이 아니며, 기질적인 차이로 인하여 이상에 도달하는 방식도, 기간도 다르다. 사람들은 이상적인 인간이 아닌 스스로와, 이상적인 인간에 도달하기 전의 스스로(혹은 도달할 노력조차 하지 않고자 하는 스스로의 게으름 또는 악함)를 인정하고, 그러한 스스로를 세상에 녹아들게 하기 위하여 다양한 전략을 사용한다. 그러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스스로의 부족함을 세상에 설득하고 스스로를 세상에 녹아들게 하는 방식에 대하여는, 어떠한 교과서에서도 사람들에게 알려준 적이 없어서, 배울만큼 배운 식자들도, 교양 좀 있다 하는 사람들도 미숙함을 세상에 내보이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솔하게 세상에 부딪히고, 스스로를 내보일 용기를 가지고, 나의 양태와 형태를 명확히 인지하고(그게 설령 유동적으로 변화하더라도, 변화하는 스스로를 관찰하고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세상과 타인에게 설명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설득하고 양보하고 다가서고 물러서고 그렇게 세계와 본인의 경계를 보다 확고하고 단단히 하면서도, 그 경계선의 거칠음을 끊임없이 다듬어, 나의 경계와 거칠음과 끊어진 어떤 경계의 한 끝이 나와 타인 어느 쪽도 찌르지 않게 하는 사람은, 정말로 대단하고 훌륭하다.


자신을 내보이는 용기가, 인간이 낼 수 있는 맨 처음이자 가장 본질에 닿아 있는 용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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