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이 본래성을 회복하는 방식
<버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여기서의 세계란 앞서 말한 것처럼, 거친 욕망이 교차하지 못하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상이 나타나는 시대를 뜻한다) 안의 존재를 사람-사람 사이에 놓인 형태로 보고 그들이 교섭해나가는 방식에 주목한다. <버닝>이 러닝타임의 약 반에 걸친 시간을 해미의 흔적을 좇는 종수의 로드무비형 몽타주에 주력한 점은 이것이 사건중심인 '척'하지만 결국엔 인물중심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해미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고, 심지어는 미스터리 장르에서 긴요하게 쓰이는 플래시백의 이미지로도 되풀이되지 않는다. 대신 종수가 그녀를 둘러싼 단선적인 관계들과 접촉하며 영화의 분위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종수가 벤을 추격하는 모습을 계속 비추는 것은 표면적인 스릴러의 틀을 배제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공교로운 기술이다. 그러나 <버닝>에서 언급된 메타포를 확장하여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르의 모형에서 벗어나 인물이 각 인물과 관계 맺으며 나타나는 행동과 정서에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해미가 존재하는 시간 동안 종수를 불러낸 것은 늘 해미였다. 그러나 그녀가 없어진 뒤, 종수는 처음으로 먼저 연락을 취한다. 종수는 아르바이트 면접 대기 장소에서 해미에게 "통화 좀 하자"며 음성메시지를 남긴다. 이때 그의 얼굴은 시종일관 누군가를 관찰하며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것과 다르게 호접지몽에서 갓 깨어난 사람처럼 또렷하다. 우리는 종수의 자발적 의사 표출이 이 전화로 처음 드러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전까지의 종수는 해미의 부름, 벤의 권유, 변호사의 설득 등 외압에 의해 움직이는 수동적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해미에게 메시지를 남긴 바로 그날, 종수는 면접장소를 스스로 박차고 나온다. 그리고 어느 비닐하우스 앞에서 서성거리던 도중 해미에게서 걸려온 의문의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수화기 너머로는 “거기 있으면 안 돼요”라고 말하는 소리와 함께 차량의 경적과 발걸음 소리가 절박하게 겹쳐 들린다. 다급해 보이는 발신인의 상태에 종수는 해미의 집으로 곧바로 달려가 보지만 그녀의 집 문은 굳게 잠겨있다. 종수는 계속해서 해미에게 전화를 걸며 그녀의 행방을 살피는 자신의 모습을 스크린에 노출시킨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관객은 우습게도 종수가 해미를 찾는 모습보다 불에 탄 비닐하우스를 찾는 신을 더 빈번하게 목격한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골똘해진다. 한순간에 없어진 해미와 사회에서 쓸모 없어 타버린 비닐하우스. 흔적조차 사라진 고양이와 애초에 존재하였는지조차 불분명한 우물. 실은 평행선을 달리는지도 모르는 도구와 존재를 동일시하여 간주하길 권유 받는 느낌이 들 때 즈음 플라톤이 주창한 '동굴의 비유'가 떠오른다. 어쩌면 우리는 주인공 시점쇼트라는 동굴 속 그림자에 가려진 채 이 수수께끼를 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관객은 그제야 자신이 본인도 모르는 새 종수의 믿음에 동참하고 있음을 알아챈다. 종수는 벤과 해미의 사이, 그들이 남기고 떠난 말(言) 사이에 놓인 존재로, 이 수수께끼 앞에 심려로서 홀로 서있다. 과연 비닐하우스는 태워졌는가. 우물은 정말 있었는가. 심증과 물증의 간극은 커지고 주변인들 간의 증언은 상충한다. 종수만이 그 대립각 사이에서 독자적인 길을 만들 뿐이다.
이제,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발견하지 못한 종수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우물의 존재유무다. 그는 이장으로부터, 해미의 가족으로부터 '우물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은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육 년 만에 다시 만난 엄마가 우물이 있었다고 말하자, 종수는 마치 원하는 답을 찾은 듯 더 이상 그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종수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은 그것이, 거기에, 존재했었다, 이다. 그것은 거기에 존재했으며, 존재했기에 이제는 없는 것이다. 이 점은 역으로 해미가 말했던 '없는 것을 잊는다'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없는 걸 잊는다는 건 있다고 상상하라인가 아니면 없다는 사실 자체를 잊음으로써 마치 있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인가. 후자의 의미 앞에서 종수의 관계 맺음은 무용해진다. 그러기에 종수는 교섭하는 존재로서 자신의 심려를 실현하고자 이 거대한 문제 앞에서 벤을 지목한다. 벤은 (비단 그것이 비현실일지라도) 꼭 범행 장소를 다시 방문하는 범인처럼 종수의 집 근처에 위치한 연못가를 관조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해미가 키우던 ‘보일’이라는 이름에 반응하는 고양이를 어디에선가 데려왔으며, 자신이 만났던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들의 소지품을 전리품처럼 소장하고 있다. 우리는 벤이 해미의 실종과 직접적으로 결부되었느냐의 여부가 종수에게 우선순위로 고민되는 지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벤은 이미 해미에 대한 종수의 심려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야 말았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를 문제 앞에 놓인 ‘염려’라고 명명하며, 염려의 존재는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심려한다고 정의 내린다. 허나 심려는 본래 ‘자신이라는 존재’를 인식하여 나타나는 마음이므로 깊이 파헤치면 본인과의 관계 맺음에서 오는 ‘마음 씀’의 방식이다. 예컨대 우리는 이미 영화 곳곳에서 교섭의 비근한 양식의 일종으로, 종수 부가 자존심을 굽히지 않아 징역을 선고 받으면서 아들인 종수를 처연하게 응시하는 모습, 종수 모가 ‘네가 무슨 돈이 있어’라고 하면서도 결국엔 종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모습, 해미의 가족이 종수를 향해 '해미한테 카드 빚을 갚기 전까지는 집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전해'라고 말하는 모습 등을 목격해왔다. 단, 영화 속에서 부모 세대의 심려가 그저 결과의 형태로 나타난다면 자식 세대인 종수는 염려의 마음이 어떻게 심려를 실현하려 드는지 주목해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버닝>은 원작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의 '나'처럼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무뎌지며 '불에 타서 무너져가는 헛간을 생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종수가 반격하듯 '벤'을 태우는 걸 실현(또는 상상)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이는 <버닝>이 원작과 다르게 주인공의 세계 적응기이자 비극적인 성장통으로 장르 이면의 길을 내보이는 방식이다.
*해당 글은 시리즈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