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이 본래성을 회복하는 방식
<버닝>의 내러티브는 많은 부분 몸짓에 빚을 지고 있다. 현실과 비현실이 혼재된 이미지 속에서 텍스트는 자연스럽게 고정성을 탈피하고, 이야기의 선형성은 인물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영화의 거대한 목적 앞에 뒤틀려버린다. 대신 우리는 컷이나 페이드아웃으로 전환되는 시공간에 잔류한 인물의 몸짓을 통해 어떠한 알고리즘을 읽어낼 기회를 얻는다. 가령 종수의 '잠'이 그렇다. 영화 속에서 잠자는 종수는 이전 또는 이후의 시간을 교란한다. 연못가에서 벤과 그를 뒤쫓아 온 종수를 담은 신은 갑자기 종수가 잠에서 깨는 장면으로 컷 된다. 묘연한 연대기의 행방을 뒤로하고, 우리는 남자아이가 화염에 휩싸인 비닐하우스를 응시하던 신에서 종수가 잠에서 깨는 장면으로 이어지던 트랜지션의 투박한 리듬을 떠올린다. 잠에 들기 이전의 시간은 과연 실재하는가. 잠에서 깬 이후의 시간은 잠에 들기 이전과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가. 본질은 알 수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텍스트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였고 이 사이에 인물의 '잠'이 위치해있다는 점이다. 종수의 잠은 결말 부근 다시 한번 등장한다. 해미의 방 침대에 누워있는 종수, 그 뒤에서 해미는 그의 자위를 돕는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신에서 해미는 증발한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지고 바지춤이 반쯤 내려간 종수만이 홀로 잠을 청하고 있다. 페이드아웃과 인으로 연결되는 다음 장면에서 종수는 잠에서 깨 드디어 '소설'이라는 것을 쓰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 해미의 방 시퀀스 직후, 마치 극을 마무리하는 엔딩의 형식을 취하듯 긴 줌아웃으로 길게 빠져나와 처음으로 종수가 아닌 벤에게 타이머를 쥐어주며 독단의 길을 걷는다. 우리는 ‘잠’이 텍스트 사이에 틈입함을 넘어 영화의 사유 체제를 탈바꿈해버린 이 지점에서, 그간 불가항력으로 대변되던 수동적인 몸짓이 적재적소에 파고드는 주체의 위치로 전복되는 광경을 목도하고 잠을 하나의 사유 흔적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면 약 세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종수의 자기위로는 어떠한가. <버닝>에서 자기위로는 인물의 그 어떠한 발화보다도 솔직한 표현방식이다. 적막이 가득한 공간에서 손동작이 만들어낸 노이즈는 해미가 줄곧 이야기하는 삶에 대한 태도나 벤이 언급한 동시존재의 논리보다 직관적이다. 그것은 상대가 없는 걸 잊어야 하는 과정이며 쾌락의 본질적 의미를 구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욕구이자 받아들여야만 하는 자연의 섭리이며 심(心)과 신(身)이 동시에 작용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이 동작을 법원이나 공항 같이 검문소(단계)를 거쳐야만 비로소 현실을 맞이할 수 있는 기관 사이에 인서트처럼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모순된 욕망이 중첩되어 언제든 깨질지 모르는 현실세계의 파편을 접합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종수의 자위행위는 이야기 속에서 이따금 중단된다. 그의 몸짓이 해미로부터 강제 소명되어 멈추어진 순간, 절정에 이르지 못한 숨결은 헛된 갈구처럼 허공에서 흩뿌려진다. 하지만 이 욕구를 결코 '꺾인 욕구'라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다. 종수의 자기위로는 자유의 몸짓이다. 그는 언제든 다시 남산타워의 빛이나 벽에 붙은 해미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욕망의 정도를 조율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몸짓의 중단은 충분한 사유에 이르지 못한 인물의 상태를 암시함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주체적 사유의 몸짓만이 가장 강력한 갈구의 흔적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버닝>에서 종수의 숨소리와 그 숨결과 맞닿은 음악의 비트는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선명해진다. 트럭을 타고 움직이던 종수가 땅에 두 발을 딛고 내달리며 깨어있는 자의 입김을 내뿜을 때, 인물의 호흡은 산발적으로 흩어져 스스로 파주를 배회한다. 파주 벌판을 헤쳐 달리는 종수의 뜀박질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하여 자신을 상실하는 쪽으로 살아왔던 인물의 ‘일상성’을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종수는 그동안 파주 집에서 밥을 먹거나 뉴스를 보고 외양간을 치우는 등 평소의 무력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쓴 글은 ‘아버지의 용서를 구하는’ 탄원서이다. 동네 사람은 탄원서를 보고 “글을 잘 쓰네. 근데 이 부분은 잘못됐어. 아버지가 이웃에게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지”라고 지적한다. 상상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 아닌 경우, ‘꾸며 쓰기’는 그저 거짓에 그칠 뿐이며 이는 단순한 일상적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종수가 해미의 실종을 통해 ‘죽음’이라는 삶의 유한성을 인식하게 된 지점부터 어쩌면 영화는, 아니 종수는 결국 자신이 소설을 쓰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을 것이다. 이제 종수의 달리기는 인물이 세상과 발맞추는 의식적인 행보에서 나아가 창작을 위한 예술가의 소재 고안의 몸부림으로 읽힌다.
이창동은 원작인 『헛간을 태우다』를 옮겨오며 제목에서 분명한 목적어였던 ‘헛간을’을 삭제하였다. 공란으로 남겨진 자리에 무엇이 들어와 앉을 수 있을까. ‘숨을 태우다’ ‘열정을 태우다’ ‘어설픈 사유의 흔적을 태우다’ ‘불안한 청춘의 발자국을 태우다’ ‘나를 둘러싼 사회적 외피를 태우다’ ‘당착 한 현실의 일부를 태우다’ 영화는 무한한 가능성이 꿰찬 자리를 두고, 태움(버닝)의 양태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태울지 묻는 질문 앞에 당도한다.
프롤로그 속 트럭의 화물칸에 붙은 차디찬 경칩으로 메워진 닫힌 화면은 휘날리는 눈발을 정면으로 맞는 엔딩의 열린 화면으로 끝이 난다. 사회적 규범 안에 종속되어 피상적인 대화로 삶을 지속하던 인물의 폐쇄성은 드디어 내면의 소리를 기울이는 개방적인 움직임으로 거듭난다. 영화는 약 두 시간 반에 걸친 시간 동안 소리 없이 본래성을 향한 방향으로 숨 가쁘게 뛰어왔다. 우리는 와이퍼로 성에가 닦여 선명해진 마지막 종수의 얼굴을 통해 <버닝>이 회복한, 세상에 매몰되어있던 인물의 의지적이고 고유한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된다. 물론 이와 같은 엔딩을 두고 일각에서는 다소 비약에 이르는 논리로의 귀결이라거나 결국엔 인물들이 모두 혐오의 세계에 순응한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삶이라는 존속적인 시간보다 오늘이라는 하루가 급급한 리틀헝거들에게 (그러나 우리는 결코 리틀헝거를 손가락질할 수 없는 세상에 던져졌다) 어쩌면 이 결말은 ‘굳이 평안함을 깨고 마는 대책 없는 속단’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영화는 그것이 종수가 스스로를 진심으로 대하는 방식이라고 줄곧 이야기해온 것을. 종수의 방향성에 대한 도덕적 또는 합리적 평을 내리기에 앞서, 우리는 적어도 영화가 일관된 방식으로 본래의 몸짓을 취하고자 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해당 글의 시리즈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