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Hi) 헤이즐, 안녕(Bye) 헤이즐
누구에게나 죽음은 어렵다. 죽음을 맞이하는 건 나이를 불문하고 쉽지 않은 과정이다.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삶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삶이 끝나가는 것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 죽음을 삶의 일부로 마주하라고 말하는 영화가 있다.
두 주인공은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다. 환우회에서 남자 주인공 어거스는 자신의 죽음이 '그저 그런 존재가 잊히는 과정'이 될까 두렵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그에게 헤이즐은 모차르트 같은 위인도 언젠가는 사람들에게 잊힌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헤이즐이라고 마냥 담담한 것만은 아니다. 헤이즐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 [거대한 아픔] 속 주인공 소녀가 죽고 난 후, 주변인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끊임없이 궁금해한다. 거스의 마음이 떠나는 자의 마음이라면, 헤이즐의 마음은 남겨진 자들에 대한 마음이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 의연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음 이후 남겨진 존재를 걱정하고, 죽음 자체가 고통스러울지 두려워하고. 더 아름답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자고로 인간의 마음이란 모두 그러지 않을까.
이후 거스가 자신의 암이 재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거스의 추도사 부탁을 받은 헤이즐은 이런 말을 한다.
“너는 네 삶이 의미 있게 기억되기 위해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의 삶을 사랑하고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게 네가 가진 전부야. 부모님, 친구, 그리고 나. 네가 이것들로 충분하지 않다고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할 거고, 너를 기억할 거야. 0과 1 사이에는 무한한 숫자가 있어. 그리고 어떤 무한대는 어떤 무한대보다 크지. 너는 내게 한정된 나날 속에 영원함을 주었고, 나는 거기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추도문을 읽으며 헤이즐은 그제야 자신한테 솔직해진다. 잊히는 게 익숙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을 주고받았던 자들에게 지워지지 않을 하나의 기억으로 남고 싶다고.
어떤 마음은 무한하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에 한 번 깊숙이 발자국을 새기면, 그 흔적은 영원히 남기도 한다.
-by 씨네꾼
로맨스/드라마 장르를 표방한 영화 <안녕, 헤이즐>은 원작 소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영화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주인공들은 삶의 방향성을 찾아나가는 데에 있어 약간의 철학을 곁들인다.
어거스는 암이 주는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문다. 이는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이 ‘생명력을 앗아가도록 만들어진 도구’보다 우위에 있음을 입증하기 위한 장치다. 어거스의 이런 행위는 마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 속 주인공 홀든 콜필드의 빨간 사냥 모자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데, 이 반복적인 행동은 거스의 ‘반항’과 ‘이탈’의 욕망 그리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영화에서 헤이즐은 <거대한 아픔>의 작가 피터를 만나기 위해 르네 마그리트의 '파이프' 작품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는다. 헤이즐의 엄마는 이 모습을 보고 가히 모순적인 문장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실제 ‘파이프’와 언어 ‘파이프’ 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 속 언어 체계는 그것을 당연히 여긴다. 마그리트는 바로 이 ‘일상성’에 대한 파동을 일으켜 기존의 언어 질서를 흔든다. 우리는 마그리트가 남긴 문장을 통해 사물을 지시하는 언어와 이미지의 간극에 대해 생각한다. 당연하게 여기던 행위와 현상의 괴리를 느끼고,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 부호가 생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화는 이러한 상징적 기호를 헤이즐이 ‘죽음’을 이해하는 과정과 연결시키고 있다. 실제 죽음과 예상하는 죽음은 아주 다를 수도 있고, 이는 언어로 표현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는 뜻을 빗대어 표현한 건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에서 헤이즐은 소설가 피터로부터 그토록 궁금해하던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에 대해 듣는다. 피터는 헤이즐에게 ‘트롤리 딜레마’에 대해 말해준다. 궁극적으로 피터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필자는 그의 말을 이렇게 이해했다.
우주의 질서는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우주에는 인간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어떠한 힘이 있다. 어쩌면 인간은 거대한 우주의 희생양에 불과한 것일지 모른다. (원제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뜻을 되새겨보라)
남겨진 삶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이성적 판단과 감정적인 판단을 조화롭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삶에 집중하면서 살아나갈 것이다.
영화는 익스트림 클로즈업 샷으로 찍은 헤이즐의 얼굴로 시작하고 끝이 난다. 수미상관 구조로 보이는 이러한 연출은 한국 제목과 얼추 맞아떨어진다. 관객은 두 시간에 걸쳐 헤이즐과 만나고 헤이즐과 헤어진다. 아니, 실은 ‘헤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영화 속에서는 '헤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를 깊이 이해했다면 알 것리다. 우리가 그녀와 이별하고 나서야 진정으로 그녀의 마음에 동화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을. 화면 속 꽉 찬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제 우리는 남겨진 자들에 대해 진정으로 생각해보게 된다.
*안셀 엘고트 논란이 있어서 해당 배우의 사진은 올리지 않습니다.